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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가서 둘러 보아야 할 곳은 너무나 많지만 그중 궁궐과 함께 꼭 보아야 할 유적이 있는데 바로 종묘이다. 종묘는 종로 3가에 있는데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으로 그분들의 넋이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종묘제례를 준비하는 곳 등 여러 부속건물이 위치해 있다.
 

일단 시작의 출발은 외대문 안쪽에서 종묘에 대한 전체 안내도를 보고 들어서면 중지당과 망묘루 공민왕신당, 향대청, 어숙실, 전사청, 정전, 정전 악공청, 영녕전 순으로 돌아보는 것이 좋다.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표지 돌에 설명문이 잘 되어 있다.

 

종묘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완성되었다고 한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들어가는 길에는 세 줄로 바닥에 돌을 깔아 놓았는데 삼도라고 하며 중간길은 신도로 돌아가신 왕과 왕비의 영혼이 다니는 길이며 오른쪽은 왕이 다니는 어도이고, 왼쪽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도라 하며 깔린 돌은 박석이라 한다. 이 돌은 모양은 울퉁불퉁한데 신발 바닥이 미끄러워 걷다가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역할도 하였다.

 

망묘루는 향대청 남쪽에 있는데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는 누각이란 뜻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던 관청의 역할도 하였고 망묘루는 건물 중 한 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망묘루 동쪽에는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모셔진 공민왕신당이 있다.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바람에 실려 마당으로 떨어졌는데 조정에서 긴 회의 끝에 그 영정을 봉안하기로 결정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향대청은 종례 때 제사 축문, 모시 등 조상에게 올리는 예물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향대청 앞에는 벽돌 모양의 돌로 깔린 이 길이 있는데 향로(香路)라고 불린다. 종묘제례 때 향(香)과 축문(祝文)을 모시는 길로 어로(御路), 세자로(世子路), 신로(神路) 등과 같이 존엄함을 나타내기 위해 벽돌모양의 네모난 돌을 깔아 차별을 두었고 밟고 다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제1전시실에는 종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 수 있게 영상자료들이 있다. 제2전시실은 종묘제례 때 쓰는 유물들과 궁중제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관세이(盥洗匜)는 대제를 올리기 전에 왕이 손을 씻을 물을 담아두던 제기(祭器)로 몸체에 번개무늬 바탕 위에 여의두 무늬, 꽃무늬, 구름무늬 등을 배치하였고, 용이 물고 있는 손잡이를 부착하고 받침대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어숙실이라고 하는데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건물 기단 끈에는 불귀신을 쫓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그릇인 드므가 궁궐에서처럼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소화기 용도라 할 수 있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는 건물인 어목욕청이 있다. 전사청 옆에 있는 제정은 제사에 필요한 물을 길어 섰는데 전해지는 이야기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은 마르지 않았다고 하며 깊이는 약 4미터 정도 된다고 한다. 우물 주위에 낮은 담장을 세우고 사주문을 세워서 잡인의 출입을 막았다고 한다.

 

공신당은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져 있는데 조선왕조에서 가장 공로가 많은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공신당 앞에는 각 임금 때의 신하들의 이름이 적힌 안내판이 있다.  

 

종묘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광해군 때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 판위에는 왕의 판위와 세자의 판위가 따로 구별되어 있다. 건물이 너무 길어서인지 사진을 다 담아 내아 내기 어려울 정도이다.

 

바닥에 잘 보면 둥근 손잡이 같은 고리가 있는데 용도가 무척 궁금하여 관련 책을 찾아보니 차일(천막포장)을 쳐서 햇빛과 비를 막기 위한 천막 고정을 위한 고리하고 한다. 죄인을 묶기 위한 고리로 일부는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정전을 올라가는 계단 소맷돌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하늘의 나라가 바로 정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앞마당은 높은데 월대라고 하는데 제례를 행할 때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던 장소이다. 정문 신방목에는 삼태극 도형이 새겨져 있고 정전의 산실은 문이 닫혀 있어 볼 수 없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1608년 다시 지었다. 늘어난 신주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로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영녕전 악공청은 정전에 악공청에 비하여 규모가 작다. 공신당 옆에는 칠사당이 있는데 봄에 모시는 사명과 사호, 여름의 사조, 가을의 국문과 공려, 겨울의 국행과 그밖에 중류의 7사에 제사 지내는 곳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는 조상을 숭배하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 수 있는 현장으로 아끼고 앞으로 잘 보존되어야 할 자랑스러운 문화유적이다. 주변에는 종묘 시민공원이 있어 휴식공간이 제공되고 있다.


태그:#종묘, #영녕전, #어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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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문화유적을 찾아 답사를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구석진 곳에 우리문화를 찾아서 알리고 문화관련 행사를 좀 더 대중에게 보급하고자 하며 앞으로 우리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나아가려고 합니다. 괌심분야는 역사유적, 석조조형물과 민속,고건축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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