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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집 여자의 질투, 아랫집 여자의 후회, 옆집 여자의 외로움, 그 속에 당신 이야기가 있다'

이런 부제가 붙은 <아줌마 X>(씨네 21북스)는 결혼과 함께 마치 매복하고 있던 적군에게 기습당하듯 느닷없이 아줌마가 되어 버렸다는 저자가, "나는 절대 (저)아줌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다짐 또 다짐 했건만 애 낳고 살림하면서, 그리고 남편과 시댁식구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속절없이 아줌마가 되어버리고 말았음에도, 삶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참혹하게 아름다운 그런 아줌마들을 위로하고자 쓴 책이다.

<아줌마 X> 겉그림
 <아줌마 X> 겉그림
ⓒ 씨네 21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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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들의 온갖 사연들을 마치 단막극을 보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콩트식으로 쓴 에세이집이라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아줌마 X>의 첫 주인공은 시어머니의 시앗, 그러니까 시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여보란 듯 문상 온 시아버지의 첩을 흠씬 두들겨 팬 덕분(?)에 '효부'라 불리게 된 아줌마A.

사실 나는 '효부'란 말을 '칠거지악'과 '현모양처'와 더불어 몸서리치도록 싫어한다. 여성들의, 특히 며느리들의 무조건 헌신을 바라고 강요하는 이 말을 곱게 볼 요즘 아줌마들이 있을까마는 말이다.

시어머니는 툭하면 아무개네 며느리는 주말마다 몸에 좋다는 온갖 것들 사들고 와서 밥해먹고 간다더라. 누구네 며느리는 꼬박꼬박 얼마씩 용돈을 준다더라. 누구네 집 생일치레를 먹고 왔는데 어땠다느니 등. 걸핏하면 어른들 입에 '효부'로 오르내리는 남의 집 며느리들 이야길 하곤 했기 때문이다. 아들 내외의 경제사정이 그다지 여유롭지 못함을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가장 먼저 헤아려 줘야 할 텐데도 말이다.

여하간 정말 듣기 싫은 '이 말'이 '시'자가 들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남편과 몇 차례 부부싸움을 한 이후 더욱 끔찍한 웬수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런 효부를 전혀 의외의 모습으로, 그리고 다소 유쾌하게 만난 것은 <아줌마 X>의 아줌마 A 덕분.

아줌마 A는 왜 시아버지의 첩을 두들겨 팼을까

"이제 시어머니 K의 연인은 아들이었고, 운명의 연적은 시앗이 아닌 며느리, 아줌마 A였다. 아줌마 A의 시집살이가 어떠했는지는 굳이 말로 옮기지 않겠다. 다만 몇 가지만 이야기 하자면 이렇다. 깍두기 무를 썰 때는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3센티미터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 시어머니 K의 지론이었다. 아줌마 A가 그 규격을 맞추지 못하자 시어머니는 아줌마 A의 손등을 칼등으로 치며 자를 갖다 주었다.…그때였다. 시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시앗이 소복을 입고 나타난 것은. 그때 아줌마 A가 갑자기 머리꼭지가 휙 돌았는지 시앗에게 육개장 그릇을 집어 던지고 이 뺨 저 뺨을 쳤다.…평생 시어머니 K에게 한 번 대들어 보지 못한 아줌마 A는, 시어머니를 팬다 생각하고 시앗을 두들겨 팬 것이다. 이년아 좀 맞아 봐라.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하고…." - '효부'중에서

아줌마 A의 시어머니 K는 시앗, 그러니까 남편의 첩을 떼어버리려고 별별 짓들을 다했단다. 위자료를 두둑하게 쥐어주며 애걸복걸하거나 얼러도 보고, 머리채를 쥐고 협박도 해보고, 남편 속옷에 부적도 몰래 넣어보고. 하지만 남편 입속의 혀처럼 남편의 비위를 잘 맞추며 남편이 매달 주는 생활비에 매달려 사는 그 여자는 오히려 더욱 찰싹 들러붙었다나. 그리하여 시어머니 K가 결국 포기를 하고 만 것이고.

아줌마 A가 엄숙해야 할 시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난동을 부린 것은 시아버지의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여자 고르기 취향 때문. 시앗이 하필 시어머니와 전체 윤곽이 닮았기 때문이다. 여하간 시어머니 살아생전의 철천지원수였던 시앗을 실컷 패고 경찰서로 끌려가 벌금을 물고 풀려난 아줌마 A는 졸지에 시어머니의 평생 한풀이를 해준 효부가 되었다나.

또 다른 아줌마 B의 이야기. 부자 남편을 둔 아줌마 B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이 그렇게 잘났다. 그런 아들이 어느 날 150센티가 될까 말까한 여자를 데리고 와 인사시킨다. "쟤를 만나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배웠다. 배울 것 참 많은 좋은 여자다.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 취직했는데 연봉도 높다…."라며.

하지만 세상에서 제 아들만큼 잘난 아들이 둘도 없는 이 아줌마 B는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결혼 날짜 잡는 것을 한 달, 두 달, 1년, 2년 의도적으로 미루고 만다. 키 180센티미터는 족히 넘고 피부도 뽀얀 자기 아들에게 키도 작고 피부도 그다지 좋지 않은 여자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며.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연봉이 아직 이천이 넘을까 말까한 아들을 위해 신용카드 한 장을 만들어 주었다. 신용카드 명세서에 몇 달 후 '00산부인과'와 '00한의원'이 몇 십만 원씩 찍혀 나왔다. '아니 얘들이 애를 지웠나?…' 아줌마 B는 심장이 덜컹했지만, 차마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두 번 더 아들의 신용카드 명세서에는 '00산부인과' '00한의원'이 찍혀 나왔다. 중절수술을 하고 보약을 지어 준 것이 틀림없었다.…아들의 나이가 서른이 넘고, 그 난쟁이 똥자루만한 여자도 더 이상 만나지 않는 눈치였다. 아줌마 B는 성사되면 무조건 천만 원 하고 아들을 맞선 시장에 내보냈다. 아줌마 B는 석 달 만에 며느릿감 S를 찾아냈다.…며느리 S는 아들과 결혼을 하고 8년이 넘도록 임신을 하지 못했다. 아줌마 B는 며느리 S에게 물러나 달라고 했다.…이제 아들의 나이는 오십이 내일 모레. 아줌마 B는 술만 들어가면 십 수 년 전에 놓친 손자를 생각하며 애가 터져한다. 낳았으면 다 줄줄이 아들이었을…." ― '할머니가 되고 싶은 여자'중에서.

삼신할머니가 노하실 만하다. 아들은 멀쩡한데, 결혼 8년이 지나도록 애를 낳지 못하는 며느리에게 위자료를 두둑하게 쥐어주며 이혼시킨 아줌마B는 며느리가 물러나자마자 속전속결로 돈을 앞세워 며느리 T를 들인다. 하지만 그 며느리 역시 결혼 7년이 지나도록 애를 낳지 못했다나. 그리고 그렇게 잘난 아들의 나이 내일 모레 오십. 손이 끊길 판이다.

사연과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제 아들 잘난 줄만 알고 남의 자식 우습게 아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여자' 아줌마B의 이야기는 갓 수확하여 금방 짠 참기름처럼 아주 고소하게 읽혔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리 썩 잘나지 못한 잘난 아들 하나 놓고 며느리 피를 말리는 시어머니가 등장하는 그런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게.

시댁 때문에 속앓이 하고 있다면, 한 번 읽어보시라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의 한 장면.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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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시댁 식구들에게 시달리는 여자, 허울뿐인 박사 학위에 십수 년을 매달려 산 여자, 제사로 삶의 의미를 찾는 여자, 출세한 자식들 때문에 이 나라 저 나라로 비행기를 타고 애들 봐주러 다니는 여자, 남편의 두 집 살림에 피멍이 든 여자, 첩이 낳고 도망간 딸 때문에 딸딸이 엄마가 된 여자, 예쁘기 때문에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자 등. 우리들 주변에 너무나 흔해 둘만 모이면 눈치를 보며 수군거렸던, 혹은 "그 여자 참 안됐다"라며 동정하기도 했던 아줌마들의 이야기들이 가볍고 재미있게, 우울하고 안타깝게 소개된다.

'나처럼 힘든 여자들도 참 많구나'라며 스스로를 달래도 보고, '시'자가 들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자주 힘들다면 그들을 욕하기도 하고,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와 같은 생각도 하면서 가볍게 읽으면 되는 그런 아줌마들의 이야기가.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혼자 속앓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여하간 <아줌마 X>는 그 어떤 책들보다 아줌마들의 가슴을 가장 잘 헤아리고 살갑고 속 깊게 위로해주는 그런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명절에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받기에도 좋은 책 같다. 그러니 내가 아는 어떤 아줌마가, 나의 자매 혹은 친구나 손위 동서가 하루라도 시댁이나 남편 흉을 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병을 앓고 있다면, 이 책 한 권 권해보는 것은 어떨까.

"세상 사람들은 교통사고도 당하고, 사기도 당하고, 말썽부리는 친척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부산스러운 일상을 어찌어찌 수습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엄마들이고, 이모들이고, 결국은 아줌마들이다.…미디어는 아줌마를 모른 척 하거나 허상의 아줌마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들은 신국의 왕이거나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거나 재벌과 사랑에 빠질 신데렐라다. 나는 그런 아줌마를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진짜 아줌마'들이다. 자식을 위해 복 짓는다고 생각하고 적선하는 아줌마들, 지긋지긋한 일상의 노동을 묵묵히 감내하는 아줌마들, 그리고 삶에 대한 희망을 절대로 놓지 않는 아줌마들이다. 나의 어머니, 나의 시어머니, 그리고 내가 만들어 가는 이야기들. 세상의 수많은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누구도 특별하지 않고 저마다 특별한 아줌마들의 인생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 중 하나, 아줌마 X로서 나는 이 글을 썼다. 아무도 이 어여쁜 아줌마들을 기억해 주지 않으면 서럽지 않은가. 이 책이 그런 아줌마들에게 희망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위로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아줌마 X>|이민아 (지은이) | 씨네21 | 2010-12-27 |정가 : 12,000원



태그:#아줌마, #꽁트, #에세이, #여자, #씨네 21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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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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