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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종달리 앞바다의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 억새와 바람 제주 종달리 앞바다의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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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여, 연일 이어지는 한파로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들숨을 통해 내 몸으로 들어온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아, 시원해! 바람이 달라!" 그랬습니다. 육지의 칼바람과는 다른 시원한 바람이었습니다. 때론 미친 바람이 불어올 때도 있지만, 이렇게 부드러운 바람이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바람일 것입니다.

제주도 동부지역의 중산간, 억새가 무성하다.
▲ 돌담과 억새와 소나무 제주도 동부지역의 중산간, 억새가 무성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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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여, 바람에 흔들리며 피어나는 꽃, 그 꽃이 향기도 더 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람에 흔들리며 피어나는 것이 꽃이라 해도 미친 바람이 불어오면 꽃을 피우기도 전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역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난히 많은 눈과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오랜만에 화창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궂은 날씨에는 볼 수 없는 제주만의 빛깔이 있습니다. 바다와 오름과 하늘, 그 모든 것들의 색감을 묘하게 바꿔놓는 신비스러운 날이 있습니다. 그렇게 신비로운 날은 바다 혹은 오름 혹은 제주의 돌담을 따라 걷고 또 걷곤 했습니다.

백미러에 들어온 풍경도 미치도록 아름다운 제주도, 그러나 길이 너무 넓고 직선으로 잘 펴져 있어 속살을 볼 수가 없다.
▲ 제주도 풍경 백미러에 들어온 풍경도 미치도록 아름다운 제주도, 그러나 길이 너무 넓고 직선으로 잘 펴져 있어 속살을 볼 수가 없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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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여,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구제역이 전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아직 바다 건너 제주에까지는 오지 않았지만, 올레 1코스와 2코스가 구제역과 관련하여 잠정적으로 폐쇄되었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인간의 욕심이 개입되지 않을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 욕심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제주도의 도로는 여기저기 확장되어 빠름의 욕심을 채워주고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풍광을 이토록 빠르게 지나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천천히,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어가야 속살을 볼 터인데, 직선의 넓은 도로는 제주의 속살을 보게 하기는커녕 여느 여행지와 다를 바 없는 여행을 강요하는 것만 같습니다.

세화 해안도로 근처의 돌담과 억새
▲ 제주도 돌담 세화 해안도로 근처의 돌담과 억새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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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다도, 바람과 여자와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람은 변했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람과 돌입니다. 바람과 돌, 모두 존재하지만 하나는 눈에 보이고,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람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 그것이 제주의 풍광을 만들어가듯이 우리네 삶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 결과일 것입니다. 현대인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치중합니다. 속내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소홀하다 보니 모든 것이 가벼워졌습니다. 너무 가벼워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쭉정이 같습니다.

같은 곳에서 만난 전혀 다른 풍경, 시간에 따라 변하는 제주의 빛
▲ 억새 같은 곳에서 만난 전혀 다른 풍경, 시간에 따라 변하는 제주의 빛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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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바람을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은 억새 우거진 곳입니다. 연록의 싹을 내고 날카로운 날을 세우며 피어났던 억새, 은빛 물결을 이루던 계절을 보내고 나면 부드러워집니다. 단 하루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은 날이 없었던 억새, 그 억새는 어쩌면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듯한 돌담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돌담도 바람에 흔들렸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 담으로 존재했습니다. 그 흔들림이 없었더라면 이미 무너져 버렸을 것입니다.

동북 근처에 있는 팽나무, 바람따라 휘어진 나무, 그러나 더 아름다운 나무
▲ 팽나무 동북 근처에 있는 팽나무, 바람따라 휘어진 나무, 그러나 더 아름다운 나무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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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여, 바람에 눕는 풀, 젊었을 적에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차라리 바람에 맞서다가 뿌리가 뽑히거나 가지 부러지는 나무가 멋졌습니다. 모든 나무가 바람에 다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맞서는 것만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 이질적인 생각이 나이 들어감의 증거가 아닌가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바람에 눕는 것이 삶의 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온전히 담은 씨앗을 맺는 것, 또 다른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내는 일이겠지요. 그 중요한 일을 위해서 바람에 눕는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닐 터입니다.

벗이여, 세상과 타협하며 살자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부러지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알고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 끈질기게 인내하십시다. 손가락질, 오해, 현재의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내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웃을 수 있도록 살아갑시다.


태그:#제주도, #팽나무,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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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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