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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황토빛 억새와 푸른 소나무와 맑은 하늘과 구름과
▲ 제주의 겨울 황토빛 억새와 푸른 소나무와 맑은 하늘과 구름과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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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근처를 그토록 많이 지나다니고, 바라보았으면서도 이제야 걷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주에 살 적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육지로 떠난 후에는 갈 수 없어 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간혹 제주를 찾았을 때에는 이미 한 번쯤 걸어봤기에 그리웠던 그 길을 걷느라 이 길을 걷지 못했습니다.

이른 아침, 종달리 바다의 검고 날카로운 돌
▲ 종달리 바다 이른 아침, 종달리 바다의 검고 날카로운 돌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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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연같이, 그렇습니다. 급작스럽게 온 길이라 변변한 신발도 갖추질 못해 정장에나 어울리는 구두를 신고 걸었습니다. 먼지라도 앉을까 반질반질 빛나던 구두는 이미 오늘 새벽 종달리 앞바다의 날카로운 돌멩이에 여기저기 긁혔습니다. 그래서 부담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터리로 고슬고슬 갈아 보리며 유채를 뿌려놓은 밭, 그러니까 아직은 연록의 빛깔보다는 황토빛깔이 더 많은 밭을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저 너머에 아끈다랑쉬오름이 보인다. 우측의 나목이 겨울임을 알려준다.
▲ 아끈다랑쉬오름 저 너머에 아끈다랑쉬오름이 보인다. 우측의 나목이 겨울임을 알려준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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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질반질하던 구두가 여기저기 긁힌 것도 모자라 뽀얀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양이라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발을 지키는 제 소임을 다해준 덕분에 걷지 않았던 그 길을 걸었습니다. 문득, 영갑이형(김영갑, 사진작가)도 이곳을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모악 갤러리에서 보았던 그 사진의 한 풍광은 여기 어디서 찍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 세상에서 쉬는 영갑이 형 때문이 아니라, 더 잘 살아보겠다고 이곳을 떠나 잘 살지도 못하는 나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왜 그때는 이 길에 서지 못했는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종달리 전망대 부근 해질무렵
▲ 억새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종달리 전망대 부근 해질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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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바람에 미쳐 그 바람을 담으려고, 필름을 사려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곳을 걸었을 영갑이 형, 이제 당신이 뷰파인더로 바라보았던 그것들이 신화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고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고, 그 육신이 셔터 누를 힘조차도 없어진 후에야 조금씩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제주의 바람을 담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많은 이들이 영갑이 형이 걸었던 흔적을 더듬어가며 뷰파인더에 제주의 풍광을 담았지만, 아직은 그토록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경지는 살아생전에는 이르지 못할 경지일 것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추웠지만, 그래도 꽃은 피었다.
▲ 애기동백 올해는 유난히도 추웠지만, 그래도 꽃은 피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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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돌아와 거실에 앉아 밖을 바라봅니다. 창밖으로 붉은 애기동백이 흐드러진 동백나무 두 그루, 아이보리 색깔의 지압용 구슬을 닮은 팔손이나무의 꽃, 배 모양의 전망대, 청자색의 바다와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만으로도 수많은 말을 하는 팽나무
▲ 팽나무 앙상한 나뭇가지만으로도 수많은 말을 하는 팽나무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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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곳을 떠났을까?
아니, 이곳에 계속 있었어도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웠을까?
내가 사랑했다는 제주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방편이 아니었을까?

바람이 무척이나 세찬 겨울날, 해안가의 풀들이 모두 누웠다.
▲ 세화 해안도로 바람이 무척이나 세찬 겨울날, 해안가의 풀들이 모두 누웠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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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은 살아갈 날들을 위해 하나 둘 비울 것들을 정리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어느새 정리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아픈 몸으로 두모악 갤러리를 지킬 때에도 왜 형님의 눈이 그렇게 또렷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텅 비우고 제주의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던 형님, 그 제주의 바람이 그 영혼을 휘감았을 것입니다.

양지바른 곳에서 온 겨울을 나고도 피어난 갯쑥부쟁이
▲ 갯쑥부쟁이 양지바른 곳에서 온 겨울을 나고도 피어난 갯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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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추운 겨울입니다. 그래도 제주도 아니랄까 봐 간간이 꽃이 있습니다.
지난가을에 피었던 갯쑥부쟁이와 감국과 해국도 양지바른 곳에는 드문드문 남아있고, 동백과 유채는 이미 피었더군요. 아, 보랏빛 광대나물꽃도 피었고, 하얀 냉이꽃은 한창이더군요. 꽃몽우리 가득한 수선화 줄기도 쑥쑥 올라와 있습니다.

진즉에 걸어갔으면 좋았을 길, 그러나 이제라도 걸어서 행복했던 길, 그 길에서 나는 울었습니다. 혹시, 이 길에서 영갑이 형도 울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태그:#제주도, #김영갑, #겨울바다,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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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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