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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지성 리영희 선생 추모 49재'를 알리는 봉은사 앞 펼침막.
 '실천하는 지성 리영희 선생 추모 49재'를 알리는 봉은사 앞 펼침막.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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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내린 눈이 골목에 흔적을 남긴 22일 오전, 서울 봉은사를 찾은 이들을 맞아준 건 고 리영희 교수의 얼굴이었다. '실천하는 지성 리영희 선생 추모 49재'가 이날 오전 11시에 봉은사 법왕루에서 열린다는 펼침막 속에서 고인은 여전히 거짓을 질타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봉은사에 들어서니, 지난해 12월 5일 세상을 떠난 고인을 추모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법왕루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모여든 이들로 법왕루 안은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웠다. 많은 분들이 오셨으니 조금씩 자리를 좁혀서 앉아 달라는 안내가 이어졌다.

오전 11시, 봉은사 주지 진화 스님의 인사말로 49재가 시작됐다. 진화 스님은 "간밤에 꽃눈이 내렸는데, 이 땅에서 대립이 소멸되길 바랐던 고 리영희 선생의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운을 뗐다. 진화 스님은 "고 리영희 선생이 불교 신자는 아니셨지만 <금강경>을 많이 읽으셨다고 들었고, 작년에는 이곳에 오셔서 명진 스님과 함께 공양도 하시는 등 봉은사와 인연이 깊은 분"이라며 "모시게 돼서 영광"이라고 말했다.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가 열린 봉은사 법왕루.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가 열린 봉은사 법왕루.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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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스승 리영희는 용감하고 솔직했다"

인사말에 이어 고인을 기리는 추모사가 이어졌다.

구중서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20년 전 고인이 한 강연을 떠올렸다. 구 이사장은 "1991년은 동유럽 나라들의 자유화에 이어 소련이 개혁·개방을 거쳐 공산당을 해체하고 연방 체제도 붕괴하는 해였다"며 "(강연에서) 선생은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적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구 이사장은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은 선생의 강연에 충격을 받고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선생은 다만, 시종일관 이성과 진실을 수호했고 이 점에서 그는 오히려 용감하고 솔직했다"고 말했다.

구 이사장은 "말과 글로만 진실을 주장한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실천한 선생은 우리에게 너무 크게 은공을 베푼 시대의 스승이었다"며 차분히 고인을 기렸다.

구 이사장에 이어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고인을 추억했다. 박 이사장은 "봉은사는 다산 정약용이 과거 공부를 한 곳"이라고 말문을 연 뒤,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직후 쓴 '다산 선생과 리영희 선생'이라는 글을 낭독했다.

박 이사장은 "처한 시대가 다르고 역사적 조건이 달랐지만, 다산과 리영희 선생에게서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며 "아닌 것은 죽어도 아니고 진실은 끝까지 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로 인한 온갖 고통을 감내했던 분이 리영희 선생이라면,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실사구시의 훌륭한 학문을 개척했던 학자가 다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이사장은 "정말로 평화로운 나라이기 위한 온갖 지혜가 그리운 때인데, 지혜를 지닌 분들은 떠나고 옛날의 지혜는 부활할 줄 모르니 이 안타까움을 어찌 할까요"라며 고인의 빈자리를 아쉬워했다.

박 이사장은 "20년 가까이 선생님을 모시고 주말마다 오르던 '거시기 산악회' 등반은 우리의 행복이었다"고 회상한 후 "산에서 혹은 하산하여 선생님과 나누던 한잔 술은 이제는 다시 할 수 없는 즐거움이니 너무나 안타깝다"며 고인의 안식을 기원했다.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가 22일 봉은사 법왕루에서 열렸다.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가 22일 봉은사 법왕루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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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판자촌 화재에서 1.7평 인생을 보신 분"

박 이사장에 이어 권태선 <한겨레> 논설위원이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고인을 기렸다. "선생님은 판자촌 화재 사건에서 그 주민들의 1.7평 인생을 보신 분"이라고 추억한 권 위원은 "선생님께서 떠나신 올겨울이 유난히 추운 것은 맹추위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며 악화된 남북관계, "스스로 권력의 시녀가 된 냉전적 수구 언론", 후퇴하는 민주주의 문제를 거론했다.

이어 권 위원은 "염치없는 저희들이지만, 거듭된 해직과 투옥 그리고 병마와 싸우면서 소시민적 안일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셨던 선생님께 이제 다시 이승의 일로 번뇌를 일으킬 수는 없다"며 "남은 몫은 부족하더라도 저희 후학들이 감당할 터이니, 이승의 일에 대한 근심과 염려는 모두 거두고 극락왕생하시라"고 말했다.

세 사람의 추모사가 끝난 후 고인이 걸어온 길을 담은 영상이 상영됐다. 역작 <우상과 이성>의 머리말이 흐르며 시작된 영상은 진실을 추구한 '죄'로 옥살이를 거듭한 고인의 가시밭길 인생을 담담히 전했다. 49재가 시작될 때 '경건한 행사이니 손뼉은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사회자가 당부했지만, 영상이 끝나자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박수가 나왔다. 이 영상은 고인이 창간에 참여했던 <한겨레>에서 제작한 것이다.

영상이 끝난 후에는 정희성 시인이 '눈 밝은 사람 리영희'라는 추모시를 낭송했다. 그에 이어 봉은사 주지였던 명진 스님이 고인을 추모했다. 명진 스님은 봉암사(경북 문경)에서 동안거 중인데, 본래 이 기간 중에는 수행하는 곳을 벗어날 수 없지만 고인과 맺은 특별한 인연 때문에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에서 고인이 걸어온 길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에서 고인이 걸어온 길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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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가 바란 건 서로 밥 떠 넣어주는 소박한 세상... 지금 세상은?"

명진 스님은 "선생의 영결식에 참여하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고 운을 뗀 후 "1980년대 성동구치소 독방에서 (리영희 선생이 지은)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보면서 내 인생도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나만이 아니라 리영희 선생의 저서 때문에 팔자가 바뀐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명진 스님은 "그렇지만 우리가 빌고 원한다고 해서 선생이 극락에 가실까? 절대 가시지 않을 것 같다"며 "선생은 '명진 화상, 나 극락 안 가네. 이 세상을 극락으로 만들어 보소'라고 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명진 스님은 혼자서 밥을 떠먹기엔 너무 긴 숟가락을 예로 들며 지옥과 극락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숟가락을 갖고 웃으면서 서로 밥을 떠 넣어주는 곳이 극락이고, 각자 자기 입에 넣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명진 스님은 "선생이 바란 세상은 거창한 사상과 이념을 내세우는 곳이 아니라, 서로 밥을 떠 넣어주는 소박한 세상"이라며 "지금 세상은 어떤가? 그렇게 밥을 떠 넣어주는 세상인가? 돌이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에 참석한 명진 스님.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에 참석한 명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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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했던 명진 스님의 목소리가 고도 경제성장만을 강조하는 세상을 질타하는 대목에서 점차 높아졌다. 명진 스님은 "인간의 탐욕이 이 땅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며 "수백만 마리를 생매장한 구제역 사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소, 돼지가 무슨 죄가 있기에 저렇게 무참하게 생매장돼야 하나"라며 "그 때문에 땅은 짐승들의 피로 범벅이 됐고 하늘은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스님의 죽비는 이명박 대통령을 향했다. 명진 스님은 "이게 이명박씨가 만들겠다는 선진국인가? 선진국, 선진국 하더니 이 나라를 선짓국으로 만드는 것 같다"고 질타했다. 명진 스님은 "2007년 대선 때 BBK 영상을 보면서 '아, 이젠 선거판이 달라지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거짓말한 사람을 우리 국민들은 500만 표 차이로 당선시켰다"며 "우리 사회에서 도덕성이 회복할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현실을 질타한 명진 스님은 "(상황이 이러하니) 리영희 선생의 극락왕생을 바라지 않는다, 선생이 형형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우리가 잘못을 하면 '이러면 안 되지' 하고 꾸짖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인처럼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온몸을 바칠 이들이 늘어나야 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명진 스님은 "그때까지 눈감지 마십시오"라는 말로 추모사를 마쳤다. 명진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박수가 터졌고, 합장하며 몸을 숙이는 이들도 있었다.

육신은 떠났지만 사람들 마음속에는 리영희 정신이

그 후 봉은사 어머니 합창단의 추모가와 참석자들의 헌화가 이어졌다. 이어 고인의 부인 윤영자씨가 "훌륭한 49재 자리를 마련해줘서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말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격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1시간여 동안 49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조용히 법왕루로 들어오는 발길이 이어졌다. 참석자가 500명은 돼 보였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모이면서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서 식을 지켜봐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경건하게 고인을 기렸다.

고인의 육신은 이승을 떠났지만 그가 뿌린 정신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이날 49재에는 유족 외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정연주 전 KBS 사장, <리영희 평전>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임채정 전 국회의장, 이해동 목사,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 등도 참석했다.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에 참석한 사람들.
 '실천하는 지성 고 리영희 선생 49재'에 참석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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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리영희, #49재, #명진,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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