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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럽지 않은 인생이 있겠는가마는, 어떤 이의 삶은 이름 석 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신산(辛酸)하다. 박헌영. 조선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고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한 항일 운동가이자 비타협적 공산주의자인 그는 해방 후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에 의해 결국 숙청당한, 혁명에 버림받은 혁명가였다.

 

그렇다면,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의 아들은 어떤가.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재롱을 피운 기억도 없고, 아버지가 넌지시 얹어주는 반찬을 먹어본 적도 없이 자랄 수밖에 없었던 혁명가의 아들이 현대사의 질곡을 어떻게 헤쳐 왔을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아니다. 어쩌면 그 누구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감히.

 

 

지난 12일 찾아간, 경기도 평택 무봉산 자락에 있는 만기사(萬奇寺)는 소한 때 내린 눈이 며칠째 고스란히 쌓여 있었고, 낯선 손[客]보다 먼저 절 문에 이른 백구가 총기 있게 멍멍 짖어댔다. 천왕문을 천천히 걸어 나오는 원경스님의 모습에는 기자가 섣부르게 기대한 세상에 대한 원망도 서러움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혁명가 박헌영의 유일한 아들은 무상(無常)한 승려의 모습으로 걸어왔다.

   

"세상에 업(業) 아닌 것이 뭐가 있습니까? 모든 것이 업입니다. 불행도 행복도 다 업이에요. 타고 나는 것이지요. 저는 서산 큰스님의 게송(偈頌)을 좋아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봄을 맞고 싶은 마음에 동쪽으로 갔지만 정작 매화는 자신의 정원에서 쌓인 눈을 뚫고 꽃을 피우고 있더라는 내용입니다. 행복을 찾아서 길을 떠나곤 하지만 그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씀이지요. 도(道)를 찾아 떠나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 도를 구해야겠지요. 그 인간의 도리를 업이라고 하는 겁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학문을 통해서, 정치를 하는 사람은 정치를 통해서 도리를 깨달아야겠지요. 그래서 금생의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것도 다 업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심춘막수향동거(尋春莫須向東去) 서원한매이파설(西園寒梅已破雪)

 

차를 끓이는 원경스님의 옆에는 반야(般若)라는 이름의 강아지가 얌전히 앉아 그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다. 개도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느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더니 원경스님은 "개가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이, 사람이 사람으로 환생하기보다 빠르지 않을까요?"라고 답하며 웃음 지었다.

 

敎化  "도를 닦고 그리고 중생을 계도하는 것, 자기와 인연 있는 모든 곳에 함께 하는 것, 이것은 승려의 의무입니다. 피땀 어린 시주물을 받아먹고서 중생과 나누지 않는다면 그건 잘못된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님이든 신부님이든 모든 종교인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사람을 맞아들이고, 문턱이 있으면 안 되고, 깨달음을 나누는 것이 교화(敎化)겠지요. 그렇게 하면서 자기 스스로 교화되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러면서 다시 또 자기에게 돌아오고 그러는 것이라고 봅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뵌 기억은 여섯 번 정도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평생을 항일운동 해 오신 분인데 어린 저하고 놀아줄 시간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아버지 박헌영 선생에 대해 원경스님은 담담한 어조로 추억했다. 태어난 지 백 일도 안 되어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타인의 손에서 자란 그였지만 불행한 유년이라는 세속적인 언사가 원경스님에게는 당치 않아 보였다.

 

"해방이 되고 큰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같이 밥 먹고 안겨서 잠자고 한 적은 없어요. 그저 아버지의 서재에서 놀았고, 가끔씩 오시는 아버지를 뵐 수 있었을 뿐이었죠. 당신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느 날 저를 품에 안고서 몇몇 지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고는 미군정에 쫓겨 북으로 가셨지요."

원경 스님이 그러모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여섯 조각에 불과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어찌 없었겠는가마는, 사상가로서 지도자로서의 아버지를 그저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는 열 살 때도 이미 열 살짜리 철부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세월이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언제나 낯설은 산등성 위에서

당신을 기다렸던 어린 것이 벌써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런대로 심심찮게 외로움을 달래주던

정겨웠던 사람들은 모두 다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 버린 지금은 텅 빈 외로운 곳

오늘도 쓸쓸하고 외로운 적막한 산등성 위에 홀로 서서

무리를 잃어버린 외기러기마냥 그리움에 쌓여

저녁노을 넘어가는 아랫마을만 바라봅니다

  원경스님의 시 <그리움> 일부

 

 

詩, 落書  남산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때, 그를 돌보아주던 김삼룡 선생과 이주하 선생이 체포되면서 비정한 대한민국 현대사는 어린 아이를 거리로 내몰았다. 충격과 공포에 떨며 골목을 배회하고 있던 차에 박헌영 선생과 남로당 핵심부 김삼룡 선생 사이에서 통신역할을 하던 한산스님(김제술)을 만났고 그 길로 열 살짜리 소년은 화엄사 주지 서동월 스님에게 가 머리를 깎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했어요. 백석의 시집은 안고 살았는데,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 싶더라고요. 하하."

 

잎보다 꽃부터 터뜨리는 벚꽃

나는 너를 사랑의 선물로 꺾어 들었다네

세상을 물어 또 무엇하랴

봄꽃 아래서

  원경스님의 시 <봄꽃> 일부

 

한산스님이 어린 그를 단양 구인사(救仁寺)에 두어 달 맡겨 두면서 그곳에 있던 상월 원각스님에게 하던 이야기를 원경스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총기가 있습니다. 내가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26일만에 다 뗐답니다."

 

그의 아버지 박헌영은 경성고보(현 경기고)15회 출신이다. 각 나라 사회주의 주요 간부급을 교육할 목적으로 코민테른이 설립하고 직접 운영한 특수대학인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박헌영은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치민[胡志明]과 함께 수학했다. 3·1운동의 유인물을 준비하던 경기고보 졸업반 시절에 이미 '선생'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탁월한 이론가인 아버지의 유전자가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 없다.

 

"그 당시 삶이 급박하고 외롭고 하다 보니 어른들에게 귀여움 받으려고 책도 읽고 했던 것이지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은 안 해요. 많이 배우지도 못 했고요."

 

원경스님은 남산초등학교 3학년을 마지막으로 제도권에서 수학을 하지 못 했다. 지식이 오히려 수행을 할 때 방해가 되기도 한다지만, 그 시대에 그의 아버지와 동문수학을 했던 이의 아들들이 호의호식하며 성장했고 현재 대한민국의 지도층이 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고관대작은커녕 어느 권력의 문지기도 되지 못 한 그의 삶에 가슴 한편이 뜨끔해 오고 입맛이 써지는 것을 세속의 인지상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원경스님은 평생 동안 써온 시를 정리하여 시집을 엮어 냈다. 시집의 제목은 <못다 부른 노래>(도서출판 시인). 그는 자신의 시를 굳이 '낙서'라고 겸손히 표현했다. 시인 김지하가 서문을 통해 '참으로 예쁘고 참으로 서럽고 또 참으로 웅장한 선시(禪詩)'라고 밝힌 것처럼 원경스님의 시들은 그가 세상에 물방울처럼 떨어뜨린 지혜와 깨달음의 글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 차원에서 낙서(落書)임에는 분명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우리 인생 모두가 '못다 부른 노래'를 부르다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아들  "철이 들면서 대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깊이 했습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만난 것이 자신들에게는 다시 더 없는 행복이라고 하고, 단지 사상과 이론에 매혹된 것이 아니라 의지하고 싶은 자애로운 분으로 기억했습니다."

 

원경스님은 박헌영 선생에 대해 사상가이기보다는 항일운동가로 기억했다. 조국의 광복이 목적이었지 사상투쟁이 목적일 수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순수민간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발족하는 데 힘을 실어(1986년)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일반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학술적인 연구 뿐 아니라 항일정신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제 발로 제 마음대로 찾아가게 하자

그러면 어느 하루아침에 인구통일이 되리라 ...

사회주의면 어떻고

자본주의면 어떠랴 ...

누가 국토를 갈라놓고 옥신각신 끝이 없는고

이제는 남부끄럽다

나의 조국 통일방안으로

어서 빨리 우리도 통일부터 이루어보자

  원경스님의 시 <통일방안> 일부

 

"우리 민족은 참 험난한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때마다 작은 것부터 잘 다스려나갔기 때문에 큰 성취를 이루어냈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 세대는 산속에서 집도 없이 떨며 살았고, 거리에 나뒹구는 시신을 보면서 자랐지만 지금 우리나라를 이렇게 건설한 것도 이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좀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기보다 콩 한쪽도 나눠먹는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합니다."

 

원경스님은 '양보하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소외된 곳이 있기 마련이지만 남을 나처럼 사랑하면 음지가 양지되기도 하고 그 양지가 다시 음지가 되기도 하면서 세상사가 굴러가는 것이라고 했다.

 

1953년 2월 '저 아이는 살려라'는 남부군 이현상 대장의 뜻에 따라 국군토벌대의 눈을 피해 지리산을 내려왔던 그 소년은 지금 나이 일흔의 노승이 되었다. 나이 일흔이면 종심(從心)이라고 했다.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는 의미다[從心所慾 不踰矩]. 현대사의 질곡을 헤치고 살아 와 큰 산처럼 우뚝 선 원경스님. 그를 주목하고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그러다보면 우리도 반야(般若)의 도를 깨우칠 지도 모르잖은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시사뉴스피플 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원경스님, #박헌영, #못다 부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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