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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치마가 아닌 하얀 치마를 두른 적상산 능선
▲ 적상산 붉은 치마가 아닌 하얀 치마를 두른 적상산 능선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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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강추위다. 바람도 매섭다. 동장군, 엄동설한, 혹한기 등 한겨울 표현법도 다양하지만, 빙하기가 따로 없을 듯하다.

추위를 피할까, 추위에 맞서볼까 고민한다. 따뜻한 방에 리모컨이 있다. 컴퓨터도 잘 돌아간다. 이름 하여 방콕도 가능하다. 읽을 만한 책도 있으나 집중이 안 된다. 그렇다. 산! 겨울산이 있다.

매서운 추위였다.
▲ 적상산 매서운 추위였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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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날이다. 일요일(16일) 아침 배낭을 꾸렸다. 뜨거운 물, 겨울 옷, 도시락, 귤 몇 개, 삶은 계란을 담는다. 물론 카메라도 챙긴다. 아이쿠! 빼 먹으면 안 되는 것! 아이젠을 챙긴다. 배낭 옆구리에 스틱도 묶는다.

너무나 오랜 시간 산 아닌 곳에서 살며 일에 젖어왔다. 23년 전에 교직에 입문하여 고교생들과 특별활동을 한답시고 인솔 교사 자격으로 몇 차례 산에 올랐다. 이후 연중 한두 차례 같은 행위를 반복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산에게 객이 되었다. 산이라는 주인에게 등산객이 되어 산을 섬기게 된 것이다. 산행 초보에게 산을 알게 해 준 스승이 있다. 나보다 2년 후배지만 산 사나이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산행 초보에게 멋진 길라잡이가 된 후배 박종근
▲ 적상산 산행 초보에게 멋진 길라잡이가 된 후배 박종근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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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아홉 살 박종근. 대전의 한 여자고등학교 국어 선생. 히말라야 트레킹은 기본, 틈만 나면 국내 명산에 나홀로 등반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주일 전에도 이박삼일 동안 설악산 등반을 마쳤고, 사흘 전에는 덕유산 눈꽃을 담고 왔다. 

지난 토요일 오후 박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요일에 산행을 하려는데 같이 갈 수 없느냐는 나의 제안이었다. 박 선생은 따져 묻지 않고 동의했다. 설렌 마음으로 일요일을 기다렸다. 우리는 어디로 무슨 산으로 갈지 소통하지 않았다. 어디로 무슨 산으로 가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와 함께 산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일요일 오전, 그가 차를 몰고 내 집 앞까지 왔다. 배낭을 짐칸에 싣고 차에 올랐다. 그가 물었다.

"무주 적상산 가보셨나요?"
"거기 양수 발전소라는 게 있지요? 차로 몇 번 가본 적은 있습니다만..."
"눈꽃 좋은 덕유산엔 사람이 너무 많고, 그 옆에 적상산 한 번 올라가 보실까요?"

그의 제안에 무조건 동의하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대전 인근 안영 나들목을 지나 무주 적상산 서창공원지킴터까지 가는 동안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적상산(赤裳山)'은 말 그대로 '붉은 치마 모양의 산'이다. 붉은색 바위지대가 마치 붉은 치마를 입은 것 같다고 하여 적상(赤裳)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창공원지킴터에서 바라본 겨울 적상산은 더 이상 적상산이 아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백상산(白裳山)이었다. 능선 주변부가 온통 흰 치마로 둘러싸인 듯 신비감을 자극했다.

눈꽃
▲ 적상산 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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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 적상산 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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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 적상산 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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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눈꽃이 화려하고 웅장하다면 적상산 눈꽃은 아기자기하고 살갑다. 멀리서 보면 흰 치마를 두른 듯하나 가까이에서 보면 가지가지마다 꽃을 피워 사방팔방이 장관이다. 가을 하늘보다 파란 겨울 하늘, 그 바탕화면에 키 큰 나무 눈꽃들이 수를 놓는다. 고개를 젖혀 카메라에 담는다. 굳이 마음에 드는 곳을 포착하지 않아도 공중 어디든 액자에 담긴 작품이 된다. 산에 오르기를 얼마나 잘 했는가.

좋아하는 사람과 둘만의 공간에서 눈꽃의 축복 아래 복분자를 마신다. 산에 오르기를 얼마나 잘 했는가!
▲ 적상산 좋아하는 사람과 둘만의 공간에서 눈꽃의 축복 아래 복분자를 마신다. 산에 오르기를 얼마나 잘 했는가!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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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기로 했다. 눈밭에 둥근 터를 만들었다. 둘이서 누리기에 적당한 공간이다. 복분자 색깔이 흰눈과 조화돼 더없이 곱다. 좋은 사람과 건배를 한다. 술에만 향기가 있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도 분명 삶의 향기가 있다.

"박샘은 언제부터 산을 좋아했나요?"

그의 대답을 듣는다. 20여 년 전 교직 초창기였다고 한다. 대전에서 제주도까지 학생들을 인솔하여 수학여행을 가는데 출발한 지 몇 시간도 안 돼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것. 풍랑이 심해 목포항에서 배를 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담임 회의를 했고, 학생들 의견을 들었다. 학교에서 일단 나왔는데 어디라도 가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방향을 바꿔 설악산으로 향했다.

학창시절 설악산을 갔을 때는 산을 본 것이 아니라 여학생만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교사가 되어 설악산에 오르니 비로소 산이 보였다. 그 뒤로 설악산은 그에게 단골 산행지가 되었고, 그는 지속적으로 전국 명산 등반에 몰두했다. 그것도 모자라 몇 년 전부터는 히말라야 고산 지대에 올라 산이 주는 매력에 심취했다.

"박샘은 왜 그렇게 산에 오르나요?"
"좋잖아요. '아, 좋다! 아, 좋다!'라는 말을 산 아닌 곳에서 몇 번이나 하겠어요. 산에 오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잖아요."

아름다운 동행!
▲ 적상산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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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분자 서너 잔을 주고받는다. 영하 20도 속에 몸과 마음이 뜨겁다. '아, 좋다!' 매서운 추위를 잊은 지 오래다. 열 명 남짓 등산객 일행이 지나간다. 적당히 오른 술기에 지나가는 분들에게도 술잔을 권하고 싶다.

"한 잔 하고 가시지요."

몇 분이 술잔을 받아주신다. 술잔을 털며 '캬~!'로 이어지는 덕담이 참 따뜻하다. '아, 좋다!' 일행 중 한 분이 '배고파 죽겠다'시며 넉살 좋게 삶은 계란을 달라신다. 이내 껍질째 씹어 드신다. '이제 살겠다'시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얼마나 배가 고팠기에...' 우리 둘이서 활짝 웃었다.

까마귀 한 마리가 쉰 목소리로 까악까악 울어대며 주변을 서성거린다. 점심을 먹고 남은 음식을 한 쪽에 남겨둔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겨울 함께 잘 먹어줘서 고맙다.

안국사 도량의 평화로운 정경
▲ 적상산 안국사 안국사 도량의 평화로운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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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만난 산이지만 당신이 있어 든든합니다.
▲ 적상산 늦게 만난 산이지만 당신이 있어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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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지붕 눈이불이 포근해 보인다.
▲ 적상산 절 지붕 눈이불이 포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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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능선을 지나 안국사에 다다른다. 절 기붕에 흰눈이 포근하게 쌓였다. 도량을 둘러 보고 하산을 시작한다. 바람이 거세다. 눈이 바람 부는 쪽으로 절묘하게 쌓여 눈길을 잡는다.

오직 감탄 뿐!
▲ 적상산 오직 감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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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 많은 등산객이 눈길을 걸었다.
▲ 적상산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 많은 등산객이 눈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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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아닌 곡선이라서 좋다. 살면서 아무리 반듯하게 걸으려 해도 반듯하지 않은 길이 났다. 적당히 구부러진 길이 우리가 걷는 길일 것이다. 돌아서면 보이는 길이 없어서 좋다. 걸어도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길이 산길이다.

하얀 눈 위에 비친 내 그림자. 눈처럼 순수하게 살 수는 없을까?
▲ 적상산 하얀 눈 위에 비친 내 그림자. 눈처럼 순수하게 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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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추위였다. 찬바람이 겨울 장갑의 보온력을 뚫었다. 손끝이 아려 여분 장갑을 덧끼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 잃어버린 것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열정이나 도전 정신이었다. 산은 나에게 무기력이나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끈기 있게 서 있다. 좋은 사람이 있고 든든한 산이 있다. 산에 오르기를 얼마나 잘 했는가. 


태그:#적상산, #박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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