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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2010년 3월 31일 사망한 고 박지연씨의 빈소 사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2010년 3월 31일 사망한 고 박지연씨의 빈소 사진.
ⓒ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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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하늘 아래 안타까운 죽음들이 있었다. 가정형편상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며 온도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15세 소년 문송면이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 또 이해는 원진레이온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이황화가스 집단중독으로 인해 사망하고 온갖 질환에 신음하면서 직업병 인정을 받기 위해 싸워야 했던 해이기도 하다.

2010년의 한국. 고 박지연씨 등 꽃다운 나이의 반도체 소녀들이 죽어갔고, 펄펄 끓는 용광로 불길 속에서 29세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추모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여전하다.

OECD 선진국 중 산업재해 1위라는 한국에서는 매일 7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240여 명이 산재의 고통 속에서 신음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직업병에 걸리거나 죽어가고 있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은 책임지지 않는다. 일할 때는 산업역군이라며 장시간 노동을 부추기고, 아프면 산업쓰레기처럼 버리는 한국.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잇따른 사망과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의 집단 사망 사례는 직업병의 심각성과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수준에 안타까움을 표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한국에서 직업병으로 인정되어온 질병은 대부분 소음성 난청, 진폐증, 중독성 질환이며, 이들 직업병이 직업병 유소견자(특수건강진단 결과 D1 판정자)로 인정된 질환 중 95% 이상을 차지한다. 이 중에서도 소음성 난청이 압도적이다. 직업병으로 인정받는 것의 93.6%가 소음성 난청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산업재해인 직업병이 수천 가지가 넘는다는 점에 비춰보면 소음성 난청이 이처럼 지나치게 비중이 높은 현실은 많이 이상하다. 이는 업무 관련성 질환임에도 현실적으로 관련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질병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뇌심혈관계 질환과 근골격계 질환이다. 이들 질환은 산재 신청 시 기각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아래는 미국 산업안전보건연구원(NIOSH)을 방문한 노상철(42) 단국대 의대 산업의학교실 교수와 박재범(40) 아주대 의대 산업의학교실 교수가 밝힌 산재 판정 관련 우여곡절이 담긴 직업병 사례들이다. 한국의 직업병 관련 현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례들이기에 소개한다.

[사례 1] 소음성 난청

고장이 난 장비나 설비를 고치는 공무부서는 어느 회사에나 있다. 이 부서 노동자들의 경우, 건강검진을 하면 가장 안 좋게 나온다. 한곳에 뿌리를 박고 늘 하던 일, 즉 정형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경우 작업위해인자 노출 측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용접·절단부터 고장 수리까지 비정형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경우 측정이 어렵다. 이 업종에 있는 노동자들 수도 적은데다, 측정해 놓은 자료가 없어서 이들에 대한 연구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이런 부서에서 근 30년을 근무한 사람이 있었다. 다른 대학병원에서 일반질환(D2, 비직업성 소음성 난청)이라는 판정을 받고서는 D병원 산업의학과를 찾아와 "억울하다. 직업성 소음성 난청임을 밝혀달라"고 했다. 그러나 회사는 비정형적인 일을 하기 때문에 측정할 의무가 없다는 핑계를 댔고, 작업위해인자 노출 측정 데이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10년 전의 병원 자료를 비롯해 최근의 작업장 특수건강검진 자료까지 모두 찾아보았다고 한다. 10년 전부터 청력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과 작업장 특수건강검진 자료에 적힌 당시의 소음 정도를 통해 이 노동자가 직업 이외의 이유로 청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적다고 보고, 모 전문의는 직업성 소음성 난청(D1)으로 소견서를 써 주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노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며 기각되었다. 중앙에서 심의하는 재심 신청도 기각되어 재판까지 갔고, 2년을 끈 이후에야 산재로 인정받았다.

판사가 피고(회사) 측 변호사에게 "원고의 난청이 직업성보다는 비직업성에 근거한다는 증거를 대라"고 했으나, 피고 측은 그 증거 자료를 낼 수 없어 결국 산재로 인정된 것이었다. 노출력(근거가 되는 작업장 측정자료)이 없어서 기각되었으나 산재가 아니라는 증거도 없어서 산재로 인정된 사례다.

[사례 2] 직업성 비염

제조공장에서 금속가공에 쓰이는 기름(금속가공유 또는 절삭유)에 노출될 경우 직업성 비염이 생길 수 있다. 자동차 엔진의 피스톤 링을 만드는 지방의 모 회사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엔진 링 중 상당량을 전문적으로 생산해 공급하는데, 이 회사 노동자들이 몇 해 전 4월에 단체로 병원을 찾았다.

역학조사 결과 코 분비물 속에 금속성분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일부 금속에 대한 과민반응 특수검사에서 양성소견을 보였다. 최종적으로 직업성 비염으로 판명됐고, 그 후 이와 유사한 사례들에서 인근의 유사사업장을 포함하여 많은 공장의 노동자들이 앓고 있던 비염이 직업성으로 인정받았다.

[사례 3] 직업성 천식

박재범 아주대 의대 산업의학교실 교수.
 박재범 아주대 의대 산업의학교실 교수.
ⓒ 박재범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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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내장재 생산과정에서 쓰이는 TDI와 MDI라는 화학물질이 있다. 지방의 모 기업 노동자들이 치료해도 잘 낫지 않고 주기적으로 재발하는 호흡기 증상으로 인근의 호흡기내과를 방문했다.

이 병원의 산업의학 전문의는 20명 이상이 같은 질환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업무 관련 원인 물질이 있는지를 의심했다. 그래서 해당 사업장을 방문한 이 전문의는 회사 책임자와 노조 대표에게 작업자들의 증상과 관련한 원인 규명과 예방을 위해 작업환경측정을 포함한 역학조사를 권유하였다. 이에 회사 측에서는 추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대답하였으나 그 후 2년 동안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회사가 노조 대표를 매수하여 노조를 해체하고 유야무야하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 작업 관련 증상이 지속되면서 이들은 계속 같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던 중, 이러한 사실이 노동부 근로감독관에게 알려져서 역학조사가 실시됐고, 약 1년간의 역학조사 결과 모두 직업성에서 비롯된 천식으로 인정받았다.

[사례 4] 유기용제에 의한 피부질환(접촉성 피부염)

지방 모 기업의 한 현장 노동자가 손에 생긴 피부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인근 병원의 피부과에 갔다. 그러나 담당의사는 이것이 이 노동자의 직업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해, 확진을 위하여 산업의학과로 환자를 보냈다.

산업의학과를 찾은 해당 환자는 부서 전환을 하여 손의 피부증상은 호전되고 있다고 하였으며, 단지 자신의 이전 부서에서 후임자가 자신이 하던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걱정된다고 하였다. 이 환자는 업무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작업장의 노출가능물질에 대한 역학조사가 필요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이 노동자가 근무하던 회사는 직업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이에 관한 조사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다. 이 때문에 해당 환자 질환의 직업 관련성 규명 작업은 더 진행되지 못했으며, 환자도 산업의학과 진료를 거절하였다.

[사례 5] 다중화학물질민감증(MCS)

4년 전부터 한복집을 운영해온 여성 김모씨(53세)는 1년 전부터 몸에 이상을 느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두통과 어지러움 증상이 발생했다. 그러더니 기침, 가래, 호흡 곤란 등 호흡기 증상 외에도 말과 손동작이 둔해졌고 손 떨림 증상도 나타났다. 3개월 전부터는 걸을 때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증상도 나타났다. 또 운전할 때에는 쉽게 방향을 잃었다. 이 외에도 메스꺼움, 구토 같은 소화기 증상도 나타났다.

김씨는 평소 별다른 증상 없이 건강한 편이었다. 8년 전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완쾌되었고 갑상선 호르몬 수치도 정상 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김씨의 건강이 나빠진 것은 1년 전 한복가게가 있던 건물 2층에 전자회사가 입주한 후부터다. 전자회사는 큰 소음을 발생시켰고, 국소배기 장치 배출구를 1층 한복집 뒷문에 설치하였다. 손님들은 가게에서 가스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였고, 3층 거주 주민들도 김씨와 비슷한 증상으로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였다. 김씨가 배기구를 다른 곳으로 치워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씨의 증상은 1년 동안 점차 악화되어 한 달 전부터는 한복집 운영을 중단해야 했다. 휴일이나 휴가 기간 동안 출근하지 않으면 증상이 호전되었지만, 출근하면 여지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후 김씨는 여러 병원을 다니며 검사를 받았다. 혈중 중금속 검사, 뇌 CT, MRI 검사, 각종 혈액 검사, 모발 검사, 호르몬 검사, 면역 검사, 대장내시경 검사, 위 검사 등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김씨는 위궤양, 만성 인후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증상의 호전은 없는 상태이다. 김씨는 한 대학병원 산업의학과에서 다중화학물질민감증(Multiple Chemical Sensitivity, MCS)이란 진단을 받았다.

다중화학물질민감증이란 중년 여성들 사이에 흔하며, 다양한 종류의 낮은 농도의 환경물질에 노출되어 발생하는 여러 가지 증상의 복합군을 말한다. 보통 후천적이고, 비교적 분명한 사건(환경물질에 노출, 유기용제 중독, 호흡기 계통 자극, 농약 중독 등) 이후 발생하며, 김씨처럼 여러 기관에서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작업장 환경 기준보다 매우 낮은 농도의 화학물질로도 증상이 악화될 수 있으며, 어떤 생리적 기능 검사로도 증상을 설명하기 어려워 조기에 진단하기 어렵다.

일단 증상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경우 원인물질이 제거되어도 완치가 쉽지 않다. 대개의 경우 환경물질 노출 정도에 따라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면서 증상이 영구적으로 지속된다. 다행인 것은 병이 지속되어도 생리적 변화나 합병증이 발생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김씨의 경우처럼 여러 신체장애 때문에 직업을 잃거나, 심한 경우 주유소의 휘발유 냄새에도 반응하여 사회적 활동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완치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 사회적, 개인적, 직업적 기능을 도달 가능한 최대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현실적인 치료 목표가 된다.

이를 위하여 환자뿐 아니라 가족, 직장에도 질환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며, 되도록 화학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생활환경을 변화시키는 노력도 중요하다. 정신적인 측면도 병의 발생과 악화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주위의 지지가 필요하며 직업 재활 등 경제적 도움도 필요하다.

김씨의 경우 발병 당시 개인사업자이며, 발병원인이 작업장 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어서 산재보상보험의 적용이 되지 않았다. 김씨는 현재 전자회사를 상대로 민사 소송 중이다.

노상철 단국대 의대 산업의학교실 교수.
 노상철 단국대 의대 산업의학교실 교수.
ⓒ 전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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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직업병은 사회현상이다. 미국의 IBM 공장이 있던 뉴욕주의 한 도시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거주민도 질병에 시달렸다. 이후 환경주의자와 소비자그룹은 반도체 작업장을 환경친화적인 곳으로 만들려 노력했고, 노동자와 아이들, 지역공동체를 포괄하는 보건으로 관심영역을 넓혀 정부기관의 역학조사를 이끌어내고 보상을 받았다.

IBM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인정 싸움을 도왔던 아만다 호스 변호사는 "다른 사람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제품을 만들다가 직업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과 그 가족을 위해서라도 '한사람에게 일어난 사고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 한 사고'임을 기억하자. 예방은 데이터를 모으지 않거나, 흔치 않은 암으로 죽을 때까지 데이터를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책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노상철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의미심장하다. "오랜 세월 동안 노동자들은 '탄광의 카나리아'로 여겨졌다. 직업병은 대중에게 발생할 수 있는 특정 질병에 관한 첨병 역할을 할 수 있다. 산업보건사업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사명감을 갖고, 우리는 현상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그의 말은 "직업병을 줄이려는 노력을 위한 캠페인은 노동자에게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잠재적 위험과 이득을 평가하는 데서 업계의 이익이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한다면 다음 피해자는 당신일 수도 있다"는 아만다 호스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태그:#직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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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이코노미스트, 통계학자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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