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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고용노동자. 누구는 '위장노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동자이지만 노동자가 아닌, 하는 일은 노동자인데 법적으로는 사업자인 사람들. 골프장 경기보조원, 학습지교사, 보험설계사, 레미콘기사, 택배기사, 퀵서비스 배달원, 대리운전자, 화물차운송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노동법의 보호에서 배제돼 왔다 <오마이뉴스>는 '우리는 특수고용노동자다' 시리즈를 통해 특수고용노동자의 처지를 살펴보고 제도의 문제점을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말]
교통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퀵서비스 노동자들.
 교통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퀵서비스 노동자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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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군대에서 가장 힘든 훈련으로 꼽는 것은 유격 훈련 아니면 혹한기 훈련이다. 빨간 모자를 쓴 조교가 유격 훈련 최대의 '적'이라면, 혹한기 훈련은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훈련장 어디에서도 24시간 내내 추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

최저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맹추위가 계속되는 요즘, 도심 한복판에서 혹한기 훈련과 같이 추위와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매서운 칼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도로를 질주하면서 말이다.

퀵서비스 노동자 김상호(34)씨. 그는 경력 4년차의 '초보 퀵서비스맨'이다. 짧지 않은 기간 일했지만 그는 자신의 일과 관련해 "아직 잘 모른다"고 말한다. 자기보다 '초보'들도 많지만 그의 주변에는 경력이 10년이 넘은 선배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는 2006년 결성된 퀵서비스노동조합의 조합원이기도 하다.

점심도 거르며 움직였지만 하루 소득은 7만여 원 

지난 7일 오전 서울시청 부근에서 김씨를 만나 그의 하루를 들여다봤다. 그는 장거리를 잘 뛰지 않고 주로 서울 시내에서 일을 한다. 때문에 그의 애마는 단거리 주행에 좋은 작은 배기량 50cc짜리 오토바이. 기자가 탄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운전이 능숙한 그를 쫓아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자동차 사이를 빠져 나가기도 하고, 인적이 많은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가끔은 인도 위로 올라가야 할 때도 있었다. 흔희 말하는 퀵서비스의 '곡예운전'은 아니었지만 어디서나 항상 충돌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녹지 않은 눈이 길 곳곳을 빙판을 만들어 놨다.

그는 점심도 거르며 정신없이 움직였고, 잠시 쉬는 틈에도 주문이 들어오는 PDA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프로그램 업체가 전해주는 주문은 동시에 여러 업체에 전달되고, 그 주문을 수많은 퀵서비스 노동자들이 경쟁하며 잡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서 물건을 받고 또 동선이 비슷한 주문을 3~4개씩 한꺼번에 배달하기 위해서다. 그가 받아야 하는 주문을 놓칠까봐 옆에서 말을 걸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이날 하루 동안 12건을 배송했고 업체에 떼어주는 수수료를 제외한 7만4690원을 벌었다. 업체로 간 돈은 2만2310원이었다. 그러나 그 돈이 그의 온전한 하루 소득은 아니었다. 식대, 기름값 등은 그가 지불해야 한다. 업체는 그를 직원처럼 부리지만 그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씨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였다.

퀵서비스노동자 김상호씨. 날씨가 추워 헬맷 얼굴덮계를 닫으면 하얀 김이 서린다.
 퀵서비스노동자 김상호씨. 날씨가 추워 헬맷 얼굴덮계를 닫으면 하얀 김이 서린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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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빌딩 사이사이, 복잡한 시장 골목,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까지, 두 바퀴로 달리는 곳마다 위험이 도사리지만 이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법과 제도는 전무하다. 퀵서비스를 직업으로 인정하는 문구 하나 법전에서 찾을 수 없다.

소속된 업체가 있지만 오토바이를 구입하고 유지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물론, 안전장비와 사고를 대비한 보험료까지 모두 본인들이 부담한다. 주문을 받는 PDA를 구비하는 비용과 통신요금 또한 물론이다. 업체가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대신 노동자들이 업체에 돈을 준다. 알선수수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김씨도 한 달 PDA 통신료로 10만 원 이상 내고 있다. 시외까지 달리는 장거리 기사들보다는 기름값이 적게 들지만 그만큼 운송비 단가도 낮다. 위험 속에서 한 달 일해 모든 비용을 제외하고 그의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은 약 150만 원. 이러한 사정은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한 2008년부터 점점 나빠지고 있다.

매우 위험한 직업이지만 최근 어려워진 경기 탓에 취업 장벽이 거의 없는 퀵서비스 노동자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업체도 우후죽순 생겼다. 특별히 등록절차가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종사자와 업체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한 통계가 없을 정도다. 2008년 노동사회연구소는 퀵서비스 업계 종사자를 13만 명, 다른 업종으로 운영되는 영세 사업자까지 포함하면 최대 20만 명으로 집계했다. 그 후로도 퀵서비스 종사자는 증가추세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해진 주문량을 여러 노동자가 나누게 되면서 일 자체도 줄었고, 업체 사이의 과다경쟁으로 운송료까지 떨어졌다. 운송료를 낮춘 업체들은 수수료를 높여 수입을 유지하려 했고, 그럴수록 퀵서비스 노동자들의 수입은 줄어만 갔다. 모든 상황이 악화일로를 걸어온 것이다.

이날 지켜본 김씨의 하루를 통해 퀵서비스노동자의 현실을 살펴보자.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김씨의 시점에서 기사를 재구성했다.

8500원→ 6160원, 운송료는 낮아지고 수수료는 천정부지

김상호씨는 작은 오토바이로 일을 하고 있다. 서울 도심만 다니기 때문에 큰 오토바이는 필요없다고.
 김상호씨는 작은 오토바이로 일을 하고 있다. 서울 도심만 다니기 때문에 큰 오토바이는 필요없다고.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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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PDA 전원을 켭니다. 하루 종일 쳐다봐야 하는 화면이에요. 빠르면 오전 8시부터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제가 다니는 구역에 일이 많지는 않아요. 그러다가 회사원들이 출근하고 업무를 시작하는 9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주문이 들어옵니다.

제가 퀵서비스를 시작한 건 2008년 3월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이삿짐센터에서 5년 정도 일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다 퀵서비스 아르바이트 구인광고를 보고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제가 오토바이가 한 대 있었거든요.

저는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미혼이고 여자 친구도 없어요. 요즘 퀵서비스 한다고 하면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어머니도 제가 일 나갈 때마다 위험하다고, 그만하라고 뭐라 하세요.

그래도 저는 이 일이 적성에 맞아요. 하루 종일 시계 한 번 안 보고 일할 정도로 재밌게 일하고 있습니다. 업체에서 가져가는 수수료가 줄고 산업재해보험만 된다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하고 싶은 일이에요.

수수료는 정말 말도 안 되게 높아졌어요. 제가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수수료가 운송료의 15%였어요. 만 원짜리 배달하면 1500원을 업체에 주는 거죠. 그런데 그게 18%, 20%로 오르더니 요즘에는 23%까지 치솟았어요. 그런데 운송료는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업체가 많이 생기면서 다른 업체 손님을 뺏으려고 원래 시청에서 역삼역까지 만 원이었다면 8000원을 부르는 업체들이 생겼어요. 결국 그렇게 따지면 예전에 시청에서 역삼까지 배달하면 8500원을 버는 거였는데, 지금은 6160원밖에 못 받게 됐어요. 거기에 휘발류 값도 올랐지, 오토바이 부품가격도 올랐지, 물가는 좀 올랐습니까?

가끔 '총 맞을' 때가 있지만 그런 일은 드물어요. '총 맞았다'는 건 평소보다 훨씬 좋은 금액으로 주문이 들어올 때를 말하는 겁니다.

말이 너무 많았네요. 일 나가야죠. 저는 주로 시내만 돌기 때문에 가는 곳이 좀 정해져 있어요. 저는 아침에는 보통 큰 빌딩 앞에서 대기합니다. 을지로 3가에 가면 장교빌딩이 있는데 을지로가 시내에서도 딱 중간이라 기사들이 거기 많이 모입니다. 그쪽으로 가죠.

일하다 다치거나 사망해도 보상 받기 어려워

다음 주문을 받기 위해 PDA로 들어오는 정보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 김상호씨. 대부분의 정보를 여러 업체가 공유하기 때문에 좋은 주문을 따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다음 주문을 받기 위해 PDA로 들어오는 정보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 김상호씨. 대부분의 정보를 여러 업체가 공유하기 때문에 좋은 주문을 따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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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여도 쉬거나 얘기 나눌 수가 없어요. 보세요. 다 PDA만 쳐다보고 있죠? 좋은 금액이 뜨거나 가까운 곳에 여러 개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주문을 먼저 찍어야 하니까 그래요. 저도 여기서 눈을 떼고 있다가는 몇 시간 동안 허탕 칠 수도 있어요.

여기 오는 길에 몇 번 어디 부딪칠 뻔했죠? 오토바이 운전이 미숙하기도 하지만 워낙 복잡한 곳을 다니니까 더 위험이 많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10번 정도 사고가 났는데 다 제가 피해자였습니다. 정말 다행이죠. 근데 제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두려워요. 사람을 친다는 것 자체가 무섭지만 보험도 못 들었거든요. 우리는 산재가 없어서 각자가 다 자기 돈 들여서 보험 가입해야 합니다. 사정이 어려우면 못드는 거죠.

제가 일하는 동안에만 선배 두 분이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2009년 6월에 광명사거리에서 직진하던 선배 한 분이 신호 위반 승용차에 치여서 돌아가셨습니다. 일하다 죽었지만 가해자에게 말고는 보상 받을 곳도 없었어요.

작년 2월에도 수원에서 선배가 운전 중에 PDA 주문을 따려다가 앞에 서있던 버스에 충돌해서 돌아가셨죠. 그런 경우는 자기 과실 때문에 보상 받기도 어려워요. 우리가 일요일에는 일을 잘 안하는데 그날이 일요일이었습니다. 형님 애들 중에 대학 갈 애가 있어서 등록금 마련하려고 주말에도 일 나왔다가 참변을 당한 겁니다.

"인간 이하로 쳐다보는 눈빛, 다 느낀다"

길을 건너고 있는 김상호씨.
 길을 건너고 있는 김상호씨.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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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래도 별 일이 없네요. 가끔은 물건 보낼 준비도 안 해놓고 주문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럼 정말 미치죠. 우리가 괜히 '퀵'입니까? 빨리빨리 움직여야 그나마 배송시간 맞춰서 여러 개 할 수 있는데, "5분만, 10분만 기다려라"고 하면 정말 답답합니다.

그래서 몇 번은 "준비 안됐으면, 다 된 다음에 다른 퀵서비스 불러라"라고 간 적도 있어요. 그래야 시간 아껴서 다른 주문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못해요. 손님들이 업체에 불만을 제기하면 업체에서 배차를 제한해 버려요. 주문을 안 내려주는 겁니다. "너 말고도 할 사람 많다"는 거죠.

손님들이 우리를 인간 취급 안할 때도 많아요. 반말로 대하고, 욕은 안하지만 인간 이하로 쳐다보는 눈빛들 있잖아요. 이제 그냥 보기만 해도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알아요.

퀵서비스가 못 가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백화점이에요. 백화점 가면 경비하는 덩치 좋은 애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아요. 롯데백화점 빼고는 거의 대부분 그래요. 그 사람들은 우리 복장이나 몰골이 위화감을 조성하고 불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백화점에 배달가면 밖에서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이게 다 우리가 잘 뭉치지 못해서 그래요. 내 생각에는 우리가 파업하면 장난 아닐 것 같은... 서울 시내 운송이 완전히 마비될 걸요?

작년 11월 24일에 퀵서비스노조 첫 집회를 열었어요. 한 300명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100명밖에 안 왔어요. 전날 연평도 포격사태가 일어난 것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참여가 저조해요. 조합원도 300명이 넘는데 조합비를 내는 사람은 20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네요.

어쨌든 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나서야 합니다. 산재 적용은 물론이고 업체 설립 기준이나 퀵서비스 노동자 자격 기준 같은 게 있어야 지금 같은 상황이 나아지겠죠. 법전에 '퀵서비스'라는 네 글자 넣기가 그렇게 힘든가요?


태그:#특수고용, #특수고용노동자, #퀵서비스,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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