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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해외의 독립운동 지평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4월 13일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며, 3월 30일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의 주도로 '대조선독립단'이 결성됐다.

 

본국에서의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가 선포되기 약 1개월 전 만주 지린에서 조소앙이 기초한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그리고 곧이어 동경에서도 유학생들에 의한 '2.8 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무오독립선언'은 음력으로 무오년인 1918년 12월에 발표됐는데, 김규식, 김좌진, 박용만, 신규식, 신채호, 안창호, 이동녕, 이동휘, 이승만, 이시영 등 39 명의 저명한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서명했다. 그들은 대륙과 대양을 넘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만 타 지역 인물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소통의 방법도 알고 있었다.

 

3.1 독립운동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잔혹했다. 교회 건물 안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가하면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해 살상했다. 시위 3개월 동안 사망자는 7천5백여 명에 달했고 1만6천여 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 붙잡혀 가고 수많은 인민들이 투옥당해도 조직적으로 이에 대응할 구심점이 없다 보니 시위운동은 점차 그 동력을 잃어 갔다. 1910년 나라가 망한 후 10여 년이 지날 때까지 그런 조직을 꾸려내지 못한 것은  민족의 역량이 그것 밖에 되지 않아서였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한 것은 1910년 8월 29일. 바로 같은 해 10월 5일자의 <신한민보>에 박용만은 '대한인 자치기관'이라는 논문을 실으면서 "가정부를 세워 입법, 행정, 사법의 3대 기관을 두어 각지의 대한국민에게 담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3.1운동보다 10여 년을 앞선 그의 주장을 어떻게든 추구했다면 결집력은 달라졌을 것 아닌가. 또한 그는 "이제 형질상의 구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의 신한국은 바야흐로 울흥하기를 시작하니 어찌 희망이 깊지 않으리요..."라고 선언하면서 잿더미 위에 주저앉지 말기를 촉구하지 않았던가.

 

4월 13일 수립된 상해의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김규식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했다. 상해 말고도 3.1운동을 전후로 본국과 러시아 지역 등지에서 8개의 '가정부'가 생겨났다. 4월 23일 서울에서 전국 13도 대표들이 모여 구성한 한성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외무부 총장 박용만을 임명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각지의 '가정부'들을 안배해 같은 해 9월 15일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다. 대통령에 이승만, 외무총장에 박용만, 군무총장에 노백린이 임명됐다. 박용만이 제1차 조각에서 빠진 것은 그와 이승만 사이의 갈등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박용만은 그 다음 해 3월 29일 상해에 도착했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우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내각에서 같이 일하기를 원치 않았다. 또 그의 노선은 '무력 항쟁'이 아닌가. 북경으로 옮긴 것은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만주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본국에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미주에 알려진 건 3월 9일이었다. 상해에 있던 운동가가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에 전보를 친 것이다. 3월 10일자 <호놀룰루 스타블리틴>지에는 이런 기사가 보인다. "지난 주 '태평양시사'의 주필 박용만 씨가 한 장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것은 코리아의 독립에 관한 이 전보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박용만이 받은 편지는 '무오독립선언'이었을 게다. 호놀룰루의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 4월 30일자 신문은 박용만의 번역문을 실었는데 그 제목은 'Declaration of Independence by the National Assembly of the Korean National Independence League(대조선독립단 민족의회의 독립선언)'이었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밝히면서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라고 끝을 맺었다.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운운하며 비폭력을 주문한 기미독립선언서와는 사뭇 톤이 다른 것이다.

 

이승만은 무장투쟁에는 거리를 두는 사람인데 어떻게 '무오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렸는지 알 수 없다.  

 

박용만과 그 지지자들은 1919년 3월 30일 호놀룰루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창립했다. 5월 1일자 <신한민보>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하와이에서 조직된 대됴션 독립단은 3월 30일 하오 1시 반에 호놀룰루 한인 자유교당에서 대됴션 독립 션포를 경츅 하는 동시 대됴션 독립단 되는 례식을 거행코져 각 디방 대표와 남녀로유 동포 약 3백50여명이 강경한 츙의와 만강의 열졍으로 셩대히 경츅선포 례식을 거행하얏다더라."

  

그들은 '대조선독립단'을 영어로 'Korean National Independence League'라고 표기하고 "제1조 본 조직체는 국내와 원동의 각 단체로 조직된 대조선독립단의 한 분자로서 이름을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지부라 함"이라고 명기했다. 무오독립선언을 영어로 번역할 때 사용했던 선언주체의 명칭을 그대로 차용한 것을 보면 원동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한 박용만이 두 지역을 아우르는 조직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얘기다.

 

'대조선독립단'은 갈리히연합회의 '태평양시사'를 인수하여 기관지로 삼고 신문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하와이를 떠난 박용만이 북경에 가서 활동할 때도 탄탄한 연대를 유지하며 후원금을 보냈다.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나기 약 2주 전 그에 대한 이승만파의 증오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들은 박용만의 살해를 모의하고 동조자들의 서명까지 받았다. "朴容萬(박용만)을 엇디하얏던지 무슨 모양으로던지 잡아업시하자고---" 하는 문구를 여과 없이 적은 것을 보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살기가 묻어난다. 험악한 당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그나마 박용만파는 독립운동이라는 대의와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파는 본연의 사명인 독립운동보다는 눈앞의 박용만을 제거하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였던 모양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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