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2월 17일

오전엔 영어공부를 하고 점심으로 숙소 내 식당에서 처음 현지음식을 먹었다. 야채류 목록에서 'mixed vegetables with quail egg'를, 면요리 목록에서 'pansit bihon'를 주문했다. 후자는 짐작도 안 되는 메뉴였지만 웬만한 면 음식은 모두 좋아하므로 용기를 냈다. 결과는 대만족. 익숙하고 신선한 재료(quail egg;메추라기알)로 갓 만든 음식은 각각 우리네 팔보채와 잡채와 맛이 흡사했다. 사흘간 식빵만 먹은 속이 쾌재를 불렀다.

익숙한 대형 프랜차이즈 대신 현지 음식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큰 묘미다.
 익숙한 대형 프랜차이즈 대신 현지 음식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큰 묘미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열기가 사그라든 오후 외출을 했다. 목적지는 전날 가려다 만 '클론마켓(Colon Market)'.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시장이다. 대로변을 등지고 넓지 않은 골목길로 가는지라 조금 긴장이 됐다. 현지인들이 밀집한 장소에 혼자서는 절대 가지 말라던 충고 때문이다. 하지만 한낮이었고, 여행이 본디 낯선 세상을 알기 위함인데 '온실' 구경만 할 수 없잖은가.

상대적 빈곤국인 필리핀 방문 전 되도록 평이한 옷들을 챙기는 내게 어머니는 "너같이 하고 다니면 도둑 걱정 안 해도 된다" 하셨다. 하지만 낡은 하의만을 입은 채 넝마를 줍는 청년, 옹알이도 안 뗀 동생을 뉘어놓고 구걸하는 어린 소녀 앞에서 내 남방은 너무 희었고, 팔목의 시계와 어머니께서 주신 얇디 얇은 금목걸이는 엄청난 사치품 같았다. 

앙상한 개의 눈엔 두려움과 체념이 눈꼽처럼 박혀 있었다.
 앙상한 개의 눈엔 두려움과 체념이 눈꼽처럼 박혀 있었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지포니와 오토바이 매연에 머리가 지끈해져선 클론마켓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재래시장처럼 일정 구획에 장터가 서 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몇몇 상점들이 섞인 특징없는 거리였다. 아니 차라리 '걸인들의 거리'라는 이름이 어울렸다. 앙상한 등을 보인 채 모로 누운 늙은 노숙자, 팬티 한 장만 입고 큰 눈을 깜빡이는 또다른 앳된 걸인… 카메라를 들이댈 수도, 섣불리 동정을 베풀 수도 없어 곤란했다.

딱한 건 사람뿐 아니었다. 어느 집앞 쇠줄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던 개의 눈엔 두려움과 체념이 눈곱처럼 박혀 있었다. 먼지 앉은 털은 원래부터 잿빛 같았다. 빼짝 마른 몸엔 갈비뼈가 앙상히 드러났다. 노인아이 할 것 없이 굶주리는 판에 짐승을 홀대한다 나무랄 순 없다. 하지만 말못하는 짐승이 느낄, 사람과 다르지 않을 고통에 살이 꼬집힌 듯 아팠다. 

그간 필리핀을 다녀온 지인들은 "바다 진짜 멋있더라" "리조트가 환상이야" 같은 감탄사만 늘어놨다. 하지만 의아스럽다. 궁전 같은 대형 숙박시설과 쇼핑몰 옆에 우글우글 모여있는 판자촌들이 의아하지 않았는지, 한껏 자유를 즐기는 순간에도 옆으로 지나가는 반 벗은 필로피노들의 눈빛이 의식되지 않았는지.

클론거리 조형물
 클론거리 조형물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돌아오던 길, 갑작스레 복통이 일었다. 아랫배였다. 급속도로 자제력을 상실했다. 한국 같았으면 공공건물이나 여느 식당 같은 데 들어가면 되겠지만 어딜 봐도 마땅해 뵈는 곳이 없었다. 개인 집에 들어갔다 행여나 변을 당할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택시를 타려니 길을 설명할 수 없었고 계속 걸으려니 눈앞이 노랬다.

구사일생, 철책 대문을 경계로 넓직한 마당에 앉은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문 앞에 선 경호원에 사정을 전하자 안주인에 허락을 구하고 잠시 후 문을 열었다. "Thank you(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던지고 집안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그런데 아뿔싸, 휴지가 없었다. 곁에 있던 경호원에 염치불구하고 "tolet paper(화장지)"를 외쳤지만 '그게 뭔데?' 하는 표정이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일단 급한 불을 껐다. 그 와중에 이물질로 얼룩진 변기에 살을 닿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드디어 마무리해야 할 시점……, 상세한 묘사는 생략하고 이제부터 수첩은 종이가 넓고 얇은 걸로 사야겠다 다짐했다. 또 하루가 저문다. 내일 오후엔 바클로드로 간다.

12월 18일

오늘 하루 두 번 '레즈비언'이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첫 번째는 나흘간 묵은 게스트하우스 주인으로부터. 체크아웃을 하려 로비로 나갔다가 그를 만났다. 웃는 낯으로 눈인사를 하기에 "머무는 동안 편안했다" 답례를 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이었는데 그가 조심스레 "혹시 레즈비언이냐?"고 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는데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 "옷차림이 너무 소박해서"라는 게 이유였다.(참고로 남색 체크 남방에 찢어진 칠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요며칠 현지 여성들의 가녀린 몸매와 실루엣이 드러나는 옷차림을 봐온 결과 무리도 아니다 싶었다. 당혹감과 '서운함'을 누르며 "울엄마도 종종 그렇게 말한다"며 웃어 넘겼다.

어색한 분위기가 금방 가시고 그가 이번엔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북한과 남한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는 것이었다. 티비 뉴스에서 관련 국내 소식을 보도 중이었다. 복잡한 사정을 모두 말하긴 역부족이었지만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북한의 무력도발은 분명 잘못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남한의 책임이 크다. 현(現) 대통령은 지나치게 친미적이며 철학이 얕다."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부시티 'Allson's inn' 직원들. 프론트 앞 왼쪽 아저씨가 나를 '레즈비언'으로 의심한 이곳 주인이다.
 세부시티 'Allson's inn' 직원들. 프론트 앞 왼쪽 아저씨가 나를 '레즈비언'으로 의심한 이곳 주인이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두 번째 의혹 제기는 세부막탄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였다. 천정의 손잡이는 떨어져나가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차였지만 나흘 전과 같은 거리를 100페소 싸게 간다는 데 만족했다. 그런데 이 운전기사 어딘가 이상했다. "세부에 처음 왔냐"로 말문을 트더니 이어 "당신 참 아름답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가 없다고 말했건만 계속해서 번호를 알려달라고 졸랐다.

예순이 가까울 듯한 기사의 추근거림에 모진 말은 못하고 거듭 됐다고만 했다. 그런데 이번엔 또 결혼을 했냐고 물었다. 안 했다고 하니 왜 안 했냐고 묻는다. 덧붙여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이"라면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일에 이유가 뭐 따로 있겠는가. 잠자코 있으니 "혹시 여자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1시간 사이 같은 의혹을 두 번씩 받다니…. 어깨에 힘을 주며 "절대 아니다"라고 답했다.

드디어 공항 도착. 어서 요금계산을 내고 1초라도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기사도 나도 잔돈이 없었다. 현지에서 보통 이런 경우 기사들이 거스름돈을 안 주려고 꼼수를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늙은 기사는 본인이 직접 나서 동료 기사에 돈을 바꿔왔다. 지독하게 성가신 성격이었지만 나쁜 마음을 품은 건 아니구나 생각했다.  

탑승시각까진 3시간여 남았다. 공항 1층 레스토랑에서 맛없는 점심을 먹고 집에서 가져온 책을 읽다보니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시간을 넉넉히 두고 위탁수화물을 접수하고 다시 대기실에 앉아 책을 읽었다.(참, 세부공항에선 짐뿐 아니라 짐주인 무게도 같이 잰다!) 출국 40여 분을 남겨 놓고 짐을 챙겨 출국로비로 들어갔다. 그런데 기내에 갖고 탈 배낭을 검색대에 통과시키는 데 사인벨이 울렸다.

세부막탄항공 세부퍼시픽 항공 수속대
 세부막탄항공 세부퍼시픽 항공 수속대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문제가 된 건 멀티탭이었다. 그간 여행을 하면서 이런 걸 한 번도 갖고다닌 적이 없었으므로 멀티탭이 기내 소지 금지 물품인지도 몰랐다. 버리거나 공항 내 여행사 같은 곳에 줄까도 생각했지만 가격도 만만찮고 여러모로 갖고 가는 게 좋겠단 결론을 내렸다. 결국 노트북 케이스에 넣어 수화물 운임료 600페소를 추가로 냈다.

하지만 또하나 깜빡한 것이 있었다. 필리핀 공항에서 도난이 잦다는 사실. 바클로드로 가는 40분 동안 정말이지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몇 백 페소를 아끼겠다고 배낭 대신 노트북에 멀티탭을 넣은 것을 포함해, 더 큰 불안감을 안겨준 건 이륙 직전까지 정비사 몇몇이 비행기 몸체에 뭔지 모를 기체를 주입하는 모습이었다.

녹슨 가스통하며 그닥 믿음직하게 안 보이는 서너 장정들의 표정에서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저렴한 가격이 장점인 세부퍼시픽이지만 뒤늦게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 싶었다. 관련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듯한 다른 남자 승객이 한참 작업 모습을 지켜봤다. 비행 도중 불안한 대기 상태로 기체가 두세 번 요동칠 땐 심장이 튕겨나올 뻔했다. 순간 그따위 철덩어리에 운명을 맡긴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우여곡절 끝에 약 두 시간 전 바클로드에 있는 어학원에 도착했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기숙사 방을 배정받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데낄라와 '소맥'을 차례대로 들이키고 기절하듯 잠들고 싶다. 하지만 이제부터 어학원의 규칙에 따른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앞으로도 몇 번 비행기 탈 일이 걱정이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그만 쉬어야겠다.

이륙 직전까지 정비사 여럿이서 비행기 몸체에 뭔지 모를 기체를 주입 중이었다.
 이륙 직전까지 정비사 여럿이서 비행기 몸체에 뭔지 모를 기체를 주입 중이었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twitter ID : sindart77 홀로 꿈을 좇는 여정에 매력적인 벗들과 멘토들의 응원이 필요합니다.



태그:#바클로드, #레즈비언, #필리핀여행, #세부퍼시픽, #공정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