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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불이 나서 초토가 된 범어사를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불이 난 천왕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어떤 스님이 인생은 화택(火宅)이라고 표현한 말이 생각났다. 당시 이 말씀을 들을 때는 고개가 갸웃거려졌으나, 불이 마치 맛난 살을 날름날름 삼켜버려 자취 없는 천왕문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니, 문득 그 스님 말씀의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스님의 말씀은 어리석은 중생이 귀중한 삶이 초읽기로 불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겠지만, 어쩜 순간 순간 불조심을 하라는 말로 갑자기 생각케 되는 것이었다.
 
홀랑 다 타버린 천왕문. 이제는 그 옛날의 천왕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불에 타서 사라진 아까운 숭례문도 생각났다. 어쩜 인생도 이렇게 어느 순간의 실수로 홀랑 타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자못 입맛이 씁쓸하였다. 
 

 
그렇다. 범어사에서 발생한 이번 방화사건은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일이라 말해도 될 정도다. 수없이 있어왔던 화재로 인한 문화재 소실에 대해 반성이 있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제대로 된 진화시설설치 지원도 문제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범어사 일주문도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국보급 문화재가 있는 범어사, 앞으로 화재 예방에 신경을 곧두세워야 겠다. 이런 말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말같지만, '불에 한 번 덴 아이는 불을 두려워한다'는 영국속담처럼 불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겠다. 
 
그러나 인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가. 불이 타서 흉흉한 범어사 산문과 달리 요사채 뒷 마당에서는 겨울 김장 담그는 보살들이 고무장갑을 끼고 비닐 앞치마를 입은 채 바쁘게 움직이고, 울긋 불긋 동짓날의 산문에서 시작된 연등 행렬이 겨울바람에 천녀의 옷깃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까악까악 까치는 울고 금정산에 오를수록 하얀 고드름은 동양화처럼 아름다웠다. 산벗 형님과 다박다박 범어사 계곡에서 고당봉을 향해 걷기 2시간 쯤 지나, 잎을 다 버린 겨울 나무 속에 무슨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큰 바위 옆에서 낙엽 깔린 자리를 찾아 두 사람은 가지고 온 싸늘한 점심밥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계곡에 고드름이 얼 정도의 싸늘한 냉기를 물리치기 위해 보온병의 따뜻한 물에 밥을 말아 물 마시듯이 먹었다. 그러나 금방 밥을 만 물은 싸늘했다. 손이 얼어 숟가락 잡는 게 어둔 할 정도였다.

 
그래서 잠시나마 따뜻한 가스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산벗 형님과 대신 추위에 언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얼마간의 추위를 녹이고 금정산 정상을 향해 걷고 또 걷는 산행을 재촉하였다. 확확 얼음 씹는 것 같이 차디찬 밥이 몸 속에 들어가서 불을 지피는지 산을 오를수록 이마에 굵은 구슬땀이 흘렀다.
 
그렇다. 금정산의 멋은 고드름이 얼음 송곳처럼 자라는 겨울이라야 가장 금정산답다.
 


태그:#범어사, #화택, #겨울 범어사, #겨울 풍경, #겨울 금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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