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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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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1914년 8월 29일의 준공식을 앞두고 지어진 대조선국민군단 병영과 숙사.
 1914년 8월 29일의 준공식을 앞두고 지어진 대조선국민군단 병영과 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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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 소리가 멈췄다. 몇 달 동안 코올라우 산맥에 꽝꽝 메아리치던 망치 소리가 멈춘 것이다. 낮에는 뙤약볕에서 파인애플 농사에 매달리고 밤에는 자지 않고 뚝딱거리던 건축공사가 마무리 됐다.

마침내 몇 백 명이 들어갈 숙사와 교실들이 완성된 것이다. 장교들과 지휘관들이 사무실로 사용할 건물은 별채로 지어졌다.

어엿한 이층자리 건물의 숙사와 또 병영 건물이 몇 달 만에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온화한 기후 때문이었다. 추위 때문에 튼튼히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건물들은 주로 목재로만 지어졌다. 경험 있는 목수 몇 사람이 기둥을 세우거나 들보를 가로지르거나 한 다음 장정들이 판자들을 못질해서 마루나 지붕을 완성했다. 몇 달 사이 입주한 장정들의 수도 백여 명에서 1백6십 명으로 늘어났다.

병영이 들어선 아후이마누 농장은 코올라우 산맥의 동쪽 기슭과 해안 사이에 있다. 마을은 진입로가 하나뿐인데다 서쪽은 산맥이 병풍처럼 막아주기 때문에 외부로 노출이 되지 않는 지형이다. 그 진입로의 길목에 초소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보초를 내세웠다.

8월 29일의 예식을 앞두고 군단은 비상이 걸렸다. 그날 밤에는 낙성 축하연회를 열고 다음 날인 일요일 오전에는 관병식과 개학식을 열 참이었다. 그 다음날부터는 정식으로 학과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준비해야 할 것들은 산더미였다. 관병식을 위해 행진연습도 해야 되고 또 축하연회에서 공연할 음악과 연극도 준비해야 했다. 그 뿐인가. 토요일 밤 축하연회의 음식은 물론 하객들의 잠자리까지 마련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호놀룰루까지는 50리나 되는 먼 거리고 다음 날 아침 또 관병식과 개학식이 있다 보니 하객들을 하룻밤 병영에서 재우기로 한 것이다. 이 역시 하와이의 기후가 온화한데다 마침 여름철이라 불편한 대로 군단 숙사에서 많은 사람도 잘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조선국민군단 개학식이 있은 후 기념사진을 찍은 단원들.
 대조선국민군단 개학식이 있은 후 기념사진을 찍은 단원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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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국민보 신문과 입소문을 통해 예식에 참석할 하객들의 참석 절차를 한 달 전서부터 널리 알렸다.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은 참석자의 성명, 참석자 수, 남녀의 구별과 장유(長幼)의 분간을 밝혀 신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정확한 숫자를 알아야 음식과 잠자리를 준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다만 여관이 아니라 병영인 만큼 잠자리와 음식이 군인들을 위한 수준임을 밝혀두었다.

50리나 되는 산길을 걸어서 올 수는 없는 일. 철도가 놓여 있지도 않아 마차나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교통으로 호놀룰루에서 카할루 지역까지 트럭은 75전, 버스는 1불을 받고 있었다. 박용만은 자동차 회사와 얘기해서 트럭과 버스를 몇 대 전세했다. 출발 시각은 8월 29일 오후 2시 반으로 하고 호놀룰루 시내의 국민회 총회관 앞에 모이면 군단원들이 안내하기로 했다.

참가 신청자들은 무려 5백여 명이었다. 총회관 앞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버스와 트럭이 12대나 동원됐다. 인원이 많다 보니 출발이 한 시간이나 지연됐다. 마침내 자동차 행렬이 산길을 달려 병영에 도착했다. 수십 명의 군단원들이 한 줄로 도열했다가 하객들이 차에서 내리자 박수를 치며 맞았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그들이 일제히 외칠 때 대열 중의 군단원 몇은 요란하게 북을 두드렸다.

숙소를 배정 받고 저녁식사를 한 다음 낙성 축하 기념식을 가졌다. 먼저 애국가 합창이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나팔 소리와 북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가운데 모두들 우렁차게 부르던 애국가는 차츰 목매인 소리로 변했다.  총회장 김종학의 축사가 있었고 군단장 박용만의 경과보고 등이 있었다. 이어 음악과 연극 공연이 있은 다음 밤늦게 연회가 끝났다.

연병장에서 훈련을 하다가 휴식 중인 국민군단 단원들.
 연병장에서 훈련을 하다가 휴식 중인 국민군단 단원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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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30일 오전 10시서부터 개학식이 시작됐다. 연병장에는 총회장을 비롯한 하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백60명의 훈련생들은 4개 중대로 나뉘어 연병장으로 행진했다. 행진 중에는 박용만이 작사한 '국민군가'를 목청껏 불렀다.

                    국민군가

   (1) 오, 우리 국민군 소년자뎨 건쟝 아희들
       다 나와 한 목소리로 군민군 군가 불으셰
       (후렴) 불으셰 국민군 군가 질으셰 우리 목소래
                잠든 쟈 깨고 쥭은 쟈 일도록
                우리 국민군 군가 놉히 불으세

   (2) 억게총 박와총 련대 종대 압호로 나간다
       뎐군긔 가 곳마다 국민군 군가 불으셰

   (3) 산 넘고 물 건어 백만 덕병 한 칼에 벼힐
       승젼고 크게 욼여라 국민군 군가 불으셰

   (4) 흑룡강 맑은 물 남북만쥬 풀은 풀 넓은 들
       우리말 안쟝 벗여라 국민군 군가 불으셰

행진은 총회장 앞에 정지했다. 대대장의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김종학 각하를 향해 받들어 총!" 구령이 있자 생도들은 일제히 총회장을 향해 목총들을 가슴 앞에 끌어올렸다. 그 순간 나팔이 울리고 북소리가 진동했다. 곧 이어 선서식이 있었다.

"대조선국민군단 군단원들은 조선 민족이 독립을 이룰 때까지 힘을 다해 군사훈련을 받겠습니다. 대동단결하여 개인의 모든 희생을 견딜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합니다." 대대장의 선창에 의해 단원들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고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선서했다.

이어 이승만이 연설자로 나섰다. "동포 여러분, 군단원 여러분. 나 이승만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동포들이 이 미주에 와서 하루라도 조선을 잊지 않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울 것으로 믿습네다. 스스로 돕는 자는 하늘이 돕는다는 말이 있습네다. 대조선국민군단은 하나님을 믿는 군대입니다.

박종수씨가 군단의 군목이 돼 있는 것은 그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군대는 끝내 승리하고야 말 것입네다...."

이날 이승만은 '믿음'이라는 주제로 전도연설을 했다. 군단원들의 정연한 분열식 행진이 있은 다음 개학예식이 모두 끝났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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