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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다. 이 날은 1948년,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 일컬어지는 세계인권선언문이 만들어진 날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은 올해로 62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엔 인권이 취약한 이들이 적지 않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장애인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에 장애인들이 그동안 겪은 차별과 편견을 글로 썼다. 9회에 걸쳐 연재할 '장애인 커밍아웃' 기사는 장애인들이 겪은 차별의 '커밍아웃'이다. 또한 이 글은 사회가 외면한 장애인 차별이, 장애인들에 의해 '아웃팅'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연재엔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몇몇 비장애인도 함께 했다. [편집자말]
필자가 남편의 이발을 할때 사용하는 이발기기들. 이발하는 시간이 행복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필자가 남편의 이발을 할때 사용하는 이발기기들. 이발하는 시간이 행복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 우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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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구석에 있던 보자기를 꺼냈다. 변기뚜껑을 닫고 보자기로 덮은 뒤 그 위에 물을 채운 분무기, 제일 얇은 빗, 일회용 면도기, 가위를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앉을 수 있도록 욕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았다. 이제 남편을 불러 윗옷을 벗기면 된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아무 옷도 입히지 않는다. 처음에 옷을 입힌 채로 머리를 깎았다가 머리카락이 옷에 온통 달라붙어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바닥에 앉힌 후 이발기를 손에 들고 욕실 문턱에 섰다. '드르르, 드르르' 소리와 함께 뒷 머리카락이 신문지와 욕실바닥에 흩어졌다. 이윽고 남편은 옆으로 돌아앉았고 지저분하게 뻗쳐 나와 있던 옆머리도 말끔해졌다. 그리고 앞머리. 앞머리는 가위로 살짝 살짝 여러 번 가위질을 해야 한다. 한 번에 싹둑 자르면 일명 '호섭이 머리'가 된다. 남아있는 뒷머리 털과 옆 부분을 면도기로 다듬어 주는 것으로 내 임무는 끝. 욕실 문을 닫고 나오면 남편이 머리카락이며 이발기 따위를 말끔히 정리한다.

몸이 힘들어 대충 깎은 남편 머리... "고맙다"는 남편 말에 미안해진다

필자 부부의 모습. 남편은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데, 장애인 부부 역시 비장애인 부부들과 다를 바 없이 삶의 희노애락을 겪는다.
 필자 부부의 모습. 남편은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데, 장애인 부부 역시 비장애인 부부들과 다를 바 없이 삶의 희노애락을 겪는다.
ⓒ 우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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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머리를 내가 직접 잘라주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4월부터다. 결혼 전까지 구례에 살던 남편은 결혼 후 광주로 이사 오면서 머리 자를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구례에 갈 일이 생기면 가는 김에 늘 머리를 자르던 그곳에서 이발을 하고 왔다. 그러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지 남편은 나에게 이발 부탁을 해왔다.

그 때 내 미용 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작 길어진 내 앞머리나 살짝 다듬는 정도가 다였다. 이런 나에게 남편은 머리 깎는 것은 아주 쉬우니 걱정하지 말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결국 나는 머리를 깎아주기로 결심하고 전기이발기까지 구입했고 벌써 열 두어 번 정도 사용했을 것이다.

남편은 이발을 마치고 나면 항상 말끔한 모습으로 깨끗이 씻고 나오면서 환하게 웃는다. "수고했어요, 점점 솜씨가 좋아지네" 하는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원래 잘 웃고 칭찬도 잘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잠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이런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제는 머리를 자르면서 좀 짜증이 났다. 120센티미터의 내 키는 남편의 머리를 자를 때 참 불편하다. 남편을 의자에 앉히자니 너무 높고, 엉덩이를 땅에 대고 앉게 하면 또 너무 낮아 허리를 약간 구부려야 한다. 30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내 체구로 버티기에는 약간 힘이 들었다. 이발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허리와 다리가 아파왔다. 그래서 남편 머리를 그야말로 '대충' 깎아 줘버린 것이다. 속도 모른 남편은 그저 고맙다고만 했다.

뇌성마비 1급인 남편도 나 못지않게 힘들었을 것이다. 남편은 작은 자극에도 움직이는 자신의 몸을 조금이라도 덜 움직여 보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 있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내 몸이 힘들다고 "수고했어, 여보"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서로 격려해주고 믿어주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부부인 것을 왜 난 잊고, 또 잊고, 자꾸 잊어버리고 사는 것인지. 그래도 이런 내가 좋다고 입을 헤벌리고 웃는 남편이 있어 참 행복하고 감사하다. 아무래도 우리 부부는 사랑의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 있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우지은님은 국가인권위원회 장애인차별금지법 모니터링단(광주인권사무소)으로 활동하고 있다. 모니터링단은 그동안 지자체 청사 장애인 접근성 및 편의제공 여부, 공공기관 주관 지역행사 장애인 접근성 및 편의제공 여부 등을 모니터링해 왔다.



태그:#세계인권선언기념일, #12월10일,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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