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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학교 최보경 교사(역사)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사건에 대해 검찰이 '징역 2년'을 구형했다. 3년 가까이 끌어온 재판이었다. 검찰의 구형에 최 교사는 "분단의 시대가 낳은 인연으로 조금은 편치 않게 만나 뵙게 된 검사님께 그동안 노고에 감사 인사를 드린다"면서 "희망을 노래할 것"이라고 최후진술했다.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형사2단독 박재철 판사는 25일 오후 국가보안법 위반(고무찬양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최 교사에 대한 결심 공판을 열었다. 경찰·검찰은 2008년 2월 24일 최 교사의 집과 간디학교 교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여 그해 8월 그를 기소했다. 최 교사에 대한 공판은 3년간 19차례(연기·취소 포함)나 열렸다.

 

 

이날 공판은 '증거자료 목록'을 정리한 뒤, 검찰 구형에 이어 피고인 심문과 최후진술 순서로 진행되었다. 법정에는 간디학교 교사와 학생, 졸업생, 학부모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자리가 부족해 일부는 서 있기도 했다.

 

재판이 진행된 3년 동안, 검찰은 세차례 공소장을 변경했으며, 담당 판사가 한 차례 바뀌기도 했다. 최 교사가 간디학교 수업 교재로 만든 <역사배움책>과 컴퓨터에 저장되었거나 집에 갖고 있었던 경남진보연합·전교조·진보연대 등의 자료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검찰,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 구형

 

검찰측 공판검사는 "그동안 역사교육의 관점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면서 "한 국가의 역사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국가 존립과 유지를 위한 역할은 지대하다, 더구나 학생들의 역사 인식에 우려할 만한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어 검찰은 "북한은 3대세습 등의 과정에서 보듯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 반국가단체의 활동은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검찰은 "피고인이 소지한 자료나 문건, <역사배움책> 등은 북한의 주장에 입각한 내용이다"라며 "학생들의 역사의식 인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밝혔다. 검찰은 최 교사한테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을 구형했다.

 

피고인 심문 "교육청 주관 통일연수로 금강산 갔다 오면서"

 

피고인 심문 때 최 교사는 "압수수색이 있었던 2008년 2월 24일은 개학을 앞둔 시점이었는데, 수업자료까지 모두 압수되어 학기초 수업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면서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국가보안법이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한다며 서명운동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최 교사는 "압수해 간 책과 자료들은 서점에서 판매되는 책과 이미 공중파를 통해 방연된 프로그램으로, 예를 들면 교육방송의 지식채널e와 KBS VJ특공대 등이어서 처음에는 무척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며 "압수수색이 진행된 날 저는 북측 금강산에 있었는데, 경남도교육청에서 주관한 통일교육 담당자 연수 차 갔던 것"이라고 밝혔다.

 

<역사배움책>에 대해, 최 교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늘 변한다"면서 "간디학교도 변하고, 학생들의 성향과 관심사도 변한다, 배움책도 변해야 한다, 배움책에 실려 있는 사료들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언론기사들도 많은데 가급적 최신의 기사들로 구성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쉽게 와 닿는다"고 소개했다.

 

자신의 교육관에 대해, 최 교사는 "새가 좌우의 날개로 균형을 잡듯이 역사 교육 또한 일방통행의 역사가 아니라 소통의 역사여야 한다"며 "평화와 공존, 설득과 자유로운 비판의 역사가 되어야만 올바른 역사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석태 변호사 "검찰은 공소권 남용을 했다"

 

이석태 변호사는 최후변론을 통해 '무죄'를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공사장에 기재되어 있는 10개항 가운데, 피고인이 만든 자료는 2개항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경남진보연합과 전교조, 진보연대 등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적 목적성이 중요한데, 지금까지 판례는 '이적목적 추정'이었지만, 지난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는 '이적목적 추정을 검찰이 입증하라'는 것이었다"면서 "자료가 컴퓨터나 집에 있다고 해서 이적성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피고인의 경우 이적 목적이 증명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보수 단체 관계자들이 최 교사가 만들었거나 갖고 있었던 자료에 대해 감정을 했었는데, 이에 대해 이 변호사는 "감정서는 문서 내용을 주관적으로 쓴 것으로, 유효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공소권 남용이다"고 말했다.

 

검찰은 최 교사가 갖고 있었던 자료를 만든 단체인 전교조와 경남진보연합, 진보연대 등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이 변호사는 "그 단체들이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단체부터 수사하는 게 순서라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수사에 의심이 가며, 이곳 또한 공소권 남용이다"고 밝혔다.

 

또 감정인에 대해, 이 변호사는 "대체로 북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라며 "인도적 지원조차 퍼주기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한 감정의 의견도 존중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런 지렛대로 교사를 감옥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강조했다.

 

이석태 변호사는 "간디학교 '식구총회'를 본 적이 있는데, 학생들은 개방적이었고 의견이 불합리하면 반대를 했다"면서 "피고인이 문제가 있다면 학생과 졸업생까지 방청을 하거나 릴레이 단식을 하고, 촛불을 들었겠나, 학생들은 역사의 실체를 똑똑히 보고 '우리 선생'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 3년간 재판을 끌어 왔는데 무죄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선고공판, 내년 2월 1일

 

최보경 교사는 작성해 온 "희망을 노래하다"는 제목의 최후진술문을 읽어내려 가면서 중간에 울먹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재판의 과정은 나의 교육관을 되짚어 보게 했고, 시대를 되짚어 보게 하였다"며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제 삶을 성찰하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당대의 사람들의 삶도 돌아보게 하였다, 역설적으로 제게 국가보안법과 시련이 없었다면 이런 성찰이 가능했을까?"라며 "처음에는 분노했는데 지금은 버렸다, 바로 저에게 관계의 사랑과 행복을 가르쳐 준 제자들, 동료교사들, 학부모님들, 그리고 함께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날 공판을 마친 뒤 간디학교 학생과 교사, 학부모, 졸업생들은 법원 한 귀퉁이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석태 변호사는 "최보경 교사가 진술하는 동안 저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선고는 2011년 2월 1인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101호 법정에서 열린다. 다음은 최보경 교사가 이날 한 최후진술 전문이다.

 

 

최보경 교사의 최후진술 "희망을 노래하다"

 

존경하는 판사님!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다가온 결심공판을 보며 문득 이 사건이 언제였던가?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그 날은 제 인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어 지금도 메아리칩니다. 이제부터 최후진술을 하겠습니다. 참으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까를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비록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드시더라도 피고인의 심정을 헤아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북녘의 하늘

 

그리고 그렸던 북녘 땅! '내 생애 단 한번이라도 북녘 땅을 디딜 수 있을까? 그 땅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어떨까?' 조국의 분단 현실을 온 몸으로 부딪혀 살았던 대학 시절 늘 머릿속에 맴돌던 망상이었습니다. 현실화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북녘의 땅과 하늘에 대한 망상은 늘 허무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포옹하는 그 순간의 감격은 그 무엇으로, 그 어떤 수사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터져 버린 눈물이 심장을 멎게 하였습니다. 남북이 함께 부르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 힘차게 맞잡은 두 손을 흔들며 목이 터져라 함께 불렀습니다. 분명 저는 남녘의 땅에 있었으나 마음은 이미 북녘의 땅에 있었습니다. 소떼가 남북의 땅을 가로지를 때, 유람선이 남북의 바다를 가로지를 때 이미 우리네 마음속의 통일은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이산가족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뼈 속 깊이 패었으나 버스 창 밖으로 맞잡은 두 손은 더 이상 헤어짐이 아니었습니다.

 

경상남도 교육청에서 통일담당자연수를 신청하라는 공문이 접수되었습니다. 장소는 금강산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는 저를 추천하였습니다. 얼마나 그리고 그렸던 꿈이었던가? 언제나 허무함으로 끝나버린 꿈은 이제 현실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설레임.... 그렇게도 좋았을까? 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2008년 2월 22일 북녘으로 가는 길. 아직 찬 바람이 옷깃을 세우게 하였지만 마음은 너무나도 따뜻하였고 창 밖에 주렁주렁 매달린 황태는 이 곳이 강원도임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가방 속에 있던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읽으며 가는 내내 식민지 조국의 아픔과 분단의 슬픔이 스크랩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북녘으로 간다. 그 곳의 땅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어떨까?' 이윽고 버스는 남녘을 지나 북녘에 도착하였고 안내원은 버스에서 내리라 하였습니다. '내가 드디어 북녘의 땅을 밟는다.'는 환희는 그 순간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땅을 딛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 하늘은 구름 한점 없는 청명함 그 자체였습니다. 황홀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났습니다. 리목란 동무입니다. 웃음이 예쁜 친절한 여성 동무였습니다. 집은 평양이라고 했었습니다. 남녘 손님을 위한 가게에서 물품을 판매하던 리목란 동무는 남녘에 꼭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꼭 통일해서 남과 북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지금 리목란 동무는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좋은 신랑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라고 인사하고 남녘으로 내려왔는데 좋은 신랑은 만났는지 모르겠습니다.

 

2박3일의 짧았지만 내 생에 결코 잊을 수 없을 시간이 지났습니다. 다시 남녘으로 내려오는 버스를 갈아탔습니다. 반납했던 휴대폰을 찾았고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뚜뚜뚜...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또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가 무거웠습니다. 얼른 빨리 오라고만 합니다. '뭔가 있구나.' 저는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갔던 어느 선생님께서 자신에게 온 문자 메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최보경 산청지회장 집과 학교에 압수수색'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머리에 둔기를 맞은 듯 저는 한동안 할말을 잃었습니다. 집으로 내려오는 길이 참으로 멀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 속 텔레비전에서는 다음날 있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준비를 알리는 뉴스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2. 약속

 

입학식에 갔습니다. 큰 딸 민희의 초등학교 입학식입니다. 그리고 중고 피아노를 샀습니다. 입학식 동행과 피아노는 두 딸에게 약속한 아빠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웠습니다. 구속이 되면 약속을 지킬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중고 피아노를 알아보고 샀습니다. 집에 놓인 피아노를 보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습니다.

 

제가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PD수첩을 비롯해서 각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KBS, MBC, SBS 등 방송 3사에게 취재하겠다고 합니다. 제 딸 민희와 민서는 신이 났습니다. 아빠가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말입니다. 친구들에게도 자랑했답니다. 저는 그냥 웃었습니다. 유치원생이었던 두 딸은 이제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국가보안법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아빠 무슨 죄를 지은거야? 아빠가 피고인이지?" 뭐라 얘기해 줘야 할지 고민이 커졌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두 딸이 지난 공판에 처음으로 왔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공판보다는 공판 내내 '두 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라는 고민과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물어 보았습니다. 두 딸은 말했습니다. "아빠 앉아있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그리고는 신나게 자기들 하고 있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언젠가 두 딸과 진지하게 아빠와 국가보안법에 대해 이야기 할 날이 올 것입니다.

 

3. 작은 간디들

 

존경하는 판사님! 이제 저는 사건 발생 후 지금까지 내내 동요 했던 제 마음을 붙들어 주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집과 학교는 보이지 않는 난리가 났습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 누구도 쉽게 제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아니 뭔가 말해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은 그런 법이었습니다. 저는 동료교사들과 제 제자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의연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 어차피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마음의 평정심을 찾기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얼마 후 졸업생들이 학교로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강당에서 재학생들과 간담회를 가졌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를 논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사회의에도 와서 자신들의 생각을 풀어놓았습니다. 이 날 이후 교사회는 교사대책위원회를 꾸렸고, 졸업생은 졸업생대책위원회를, 재학생은 재학생대책위원회를, 학부모회는 학부모대책위원회를 꾸려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회견과 서명운동에 돌입하였습니다. 시민사회단체에서도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함께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어찌 제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가슴으로 함께 해 준 이들이 없었다면 어찌 제가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이들은 저의 '존재이유'가 되었습니다.

 

특히 제 제자들의 눈물겨운 마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를 위한 글을 써서 각종 언론에 기고하고, 책자를 제작하고, 종이학을 접어주고, 소환조사를 받으러 가는 제게 파이팅을 외쳐주었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탄원서를 받았습니다. "우리 역사 선생님을 지켜주세요.", "보경샘의 수업을 계속 듣고 싶습니다." 라고 외치는 제자들을 보면서 저는 속으로, 속으로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소 후 지금까지 단식릴레이를 하고 저를 위한 뱃지를 만들어 달고 다닙니다. 비를 맞으면서도 촛불문화제를 열었고, 흰옷을 입어 함께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또 저와 국가보안법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각종 영상제에 출품하여 시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결코 죽는 날까지 제자들의 사랑과 믿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이제 저의 작은 간디가 되었습니다. 간디는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성자 간디는 다른 아닌 저의 제자들이었습니다.

 

4. 성찰과 행복

 

존경하는 판사님! 이제 마지막으로 성찰과 행복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행복의 성찰입니다. 이번 사건은 제게 분명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련은 성찰의 소중한 시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간디학교 교사의 삶을 산 지 12년을 맞았습니다. 지금까지 어쩌면 저의 주변 환경은 뒤를 돌아 볼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난 재판의 과정은 나의 교육관을 되짚어 보게 했고, 시대를 되짚어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제 삶을 성찰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당대의 사람들의 삶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역설적으로 제게 국가보안법과 시련이 없었다면 이런 성찰이 가능했을까요?

 

그리하여 얻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바로 행복의 깨달음입니다. 세상 모두는 행복하길 바랍니다. 누구는 돈으로 행복을 찾고, 누구는 권력으로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관계'로 행복을 찾았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며, 배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제 삶을 통해, 우리들의 '관계'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가슴 깊은 속에서 울림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고백합니다. 처음 저는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지난 10년 저의 일상 하나하나를 감시하여 보고하고, 저를 빨갱이 교사로 낙인찍은 것에 분노했고, 전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식구를 보며 분노했고, 수업을 하면서 '이건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을까?' 하며 스스로 내면을 재단하는 저를 보며 분노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노할 가치도 없는 지금의 현실에 분노하는 제 모습에 또다시 분노했습니다.

 

스스로 간디의 삶을 좇아 간디의 심정으로 법정에 임할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분노 앞에서 저는 참으로 나약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적들로부터 신에 대한 모독죄와 청소년 타락죄의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섰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이를 인정하고 우선 목숨을 구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사유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 스스로 독배를 마셨습니다. 간디와 소크라테스는 결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너무도 괴로웠음을 고백합니다.

 

지금 저는 분노를 버렸습니다. 무엇이 그 분노를 버리게 했을까요? 그건 바로 저에게 관계의 사랑과 행복을 가르쳐 준 제자들, 동료교사들, 학부모님들, 그리고 함께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분노는 사라졌고, 공판 과정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결국 검찰은 3차례나 공소장을 변경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이제 어떠한 판결이 내려지더라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저는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두 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희망의 노래를 부를 그날을 기약하겠습니다. 6.15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합의 정신이 실천되고, 세상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사건 발생부터 지금의 결심공판까지 지난 3년의 시간은 저에게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었고, '관계의 행복'을 깨달은 배움의 시간이었으며 '희망'을 발견한 시간이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쁜 의정 활동 중에서도 기꺼이 탄원서를 보내주신 주신 여덟 분의 국회의원님과 서른 분의 경상남도 도의원, 시군의원님, 간디학교 동료 교사와 제자들, 학부모님들, 멀리 유럽 벨기에에서 저의 소식을 듣고 직접 탄원서를 작성하여 보내주신 해외 동포와 1만에 가까운 국민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사건 발생 후 기꺼이 변론을 맡아주시고 먼 길 마다 않고 내려와 주신 이석태변호사님, 그리고 분단의 시대가 낳은 인연으로 조금은 편치 않게 만나 뵙게 된 검사님께도 그동안 노고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 가지 부족한 제 이야기에 끝까지 귀 기울려 주신 판사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태그:#간디학교, #국가보안법, #최보경 교사, #이석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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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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