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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걷고 싶었던 길, 새도 날아가기 힘들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새재라는 이름이 예뻐서 더 끌렸던 길, 혼자서 호젓하게 걷고 싶은 길. 문경새재는 나에게 그런 길이다.

혼자만의 여행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한 달 전부터 친구들과 문경여행을 계획했다. 순전히 문경새재를 걷고 싶은 마음에 의한 것이었다.

11월 6일 이른 아침 동서울터미널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뚜벅이족인 우리는 버스를 타고 문경터미널로 이동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발권을 하고 시간이 남아 롯데리아에서 간단히 아침을 때운 후, 오전 8시 20분 배차 버스를 타고 2시간 20분 정도가 걸려 도착한 문경터미널.

터미널에서 문경새재까지는 택시나 버스 중 하나의 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버스는 터미널에서 바로 발권이 가능하며 택시는 터미널 앞에 언제나 대기 중이다. 택시요금 얼마나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우리는 몇 푼이라도 아끼겠다고 버스를 이용하기로 한다(새재에서 나올 때는 셋이서 6천 원의 택시요금을 부담했으니 버스요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버스 요금은 1인당 1500원이며, 배차는 오전 7시 20분 첫차를 시작으로 오후 6시 50분 막차까지 20~40분 간격으로 일정하지 않다. 오전 11시 25분 문경새재행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달리니 문경새재 주차장에 도착한다. 문경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 우리는 문경새재에서 가까운 꿈꾸는 새재펜션을 예약했다. 펜션으로 가서 체크인한 후 짐을 풀고 몸을 최소한으로 가볍게 한다. 펜션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 산골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한 후 트레킹을 시작한다.

옛길박물관
 옛길박물관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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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걸을 코스는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에서 제2관문 조곡관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왕복 2~3시간 정도의 가장 간단한 코스이다. 옛길박물관에서부터 충렬사까지 36km의 전 구간이 탐나지만, 함께한 친구들을 위한 배려로 가장 쉬운 길만 걷기로 한 것이다. 대신, 정한 코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완주하자는 나만의 미션을 마음속으로 새기며 길에 들어선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길, 설렘을 동반한 시작이다. 가을이 깊이 새겨진 모습이 나를 더 설레게 한다. 길의 시작점인 새재광장은 수많은 식당가, 장사치들, 관광객들이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주말여행에서 한적함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차피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광장 옆으로는 청와대 건물을 연상케 하는 옛길박물관이 보인다. 옛길박물관은 올해 5월 원래 새재박물관이었던 이름을 바꿨으며 다양한 유물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앞 공원처럼 조성된 앞마당에서는 다양한 조각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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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으로 곱게 물든 가로숫길을 따라 5분여 정도 걸으면 제1관문 주흘관이 나타난다. 본격적인 새재길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제1관문을 통과하니 향기부터 다르다. 향긋한 솔내음이 코끝을 스치며 온몸으로 파고 든다. 몸뚱이의 기운이 맑아지는 그 내음을 맘껏 들이마시려고 코를 킁킁대며 걷는다. 조금 후에 왼편으로 KBS 촬영장이 보인다. <제중원>, <천추태후> 가장 최근은 <거상 김만덕>까지 다양한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다. 요즘 여행지마다 흔한 곳이 드라마 촬영장이라 들어가 보지는 않았으나, 흥미가 있다면 구경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특히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디서 무엇이 촬영되었는지 맞춰보는 재미도 있으니 말이다. 입장료는 2000원, 저렴한 편이다.

문경새재는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뒤덮인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소중한 흙길이라 더욱 좋다. '자연이 살아 숨쉬는 문경새재, 맨발로 걸어보세요'라는 표지판의 문구가 나를 유혹한다. 내 발이 숨을 쉬고 싶다며 답답한 신발 속에서 꿈틀대지만 나는 단호하다. 주변을 쓱 훑어봤지만 맨발로 걷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의 눈치를 많이 의식하는 편인 내 성격도 문제지만 발을 내놓기엔 사실 조금 쌀쌀한 날씨다.

문경새재의 아름다운 단풍
 문경새재의 아름다운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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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문경새재의 단풍은 절정을 이룬다. 올가을엔 단풍구경 좀 하겠다고 여기저기 참 많이도 쏘다녔는데 이곳만큼 단풍이 예뻤던 곳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색색의 향연들, 적당히 떨어져 흐트러진 흙길 위의 낙엽들이 보는 이의 시선을 뺏을 만하다.

특히 지압길 주변은 정말 압권이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저마다 걸음을 멈추고 곱디고운 나뭇잎들 세상으로 들어온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셀카를 찍기도 하고, 애인이나 가족의 사진을 담아주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그것을 갖고 싶은 욕심이 해소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그들 속에서 일행을 세우고, 나를 세운다.

문경새재의 맑은 계곡물
 문경새재의 맑은 계곡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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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어느새 길의 왼편으로 나타나는 계곡물이 이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맑다 못 해 투명한 물, 그 위를 덮고 있는 낙엽들마저 깨끗하게 느껴져 후후 불며 한 모금 마시고 싶다. 푸훗, 그러기엔 낙엽이 너무 많은가? 진공청소기만큼의 폐활량이 필요하겠군. 계곡으로 내려가 물의 청아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이 일행들은 길가 정자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정자 옆으로 웬 돌무더기들이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지형이 허전한 곳에 인공적으로 산처럼 쌓아놓은 것으로 조산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인공산을 만들어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한다.

이제 반이다. 일행들을 재촉해 다시 길에 오른다.

문경새재 조령원터
 문경새재 조령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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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후에 돌담으로 쌓인 장방형의 터가 나타난다. 이곳은 조령원터라고 불리며 그 옛날 이곳을 지나가던 관리들이 자고 먹을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곳이었다. 문경새재는 영남지방과 한양을 연결해주던 길목에 있어 역이나 원이 발달하였고, 새재 내에 아직도 세 곳의 원터가 전해진다. 조령원을 비롯하여 동화원, 신혜원이 그것이다. 내부는 4개의 건물터만 남았으며 모형으로 세워놓은 판잣집만 세워져 있다.

마당바위
 마당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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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를 걷다 보면 인상적인 바위 2개를 만나게 된다.

바로 무주암과 마당바위가 그것이다. 조령원터 옆 숲 속에 자리 잡은 무주암 아래쪽으로는 옛날 무인 주점이 있었다고 한다. 없을 무(無)에 주인 주(主), '주인이 없다', 고로 누구나 앉으면 주인이 된다라는 의미에서 무주암이다. 길손들은 주점에서 준비해놓은 술과 안주를 들고 바위 위에 올라 목을 축이고 알아서 주대를 놓고 갔다고 하니 그 당시의 인심과 믿음이 부러워진다.

무주암을 지나 걷다 보면 왼편으로는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바위는 이곳에서 꽤 유명한지 식당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쉬어가는 곳이지만 옛날에는 도적떼들이 숨어 있다가 길손들을 덮치기도 했던 곳이다. 지척을 두고 놓여 있는 바위 2개가 이렇게 서로 다른 과거를 가지고 있다니 재미있다. 혹시 무주암의 그 무인주점이 사실 도적떼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얼토당토않는 상상도 해본다.

문경새재 교귀정
 문경새재 교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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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바위와 길을 사이에 두고 팔작지붕의 누각이 마주 보고 있다. 교귀정이라고 물리는 누각으로 조선시대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교인처로 사용되었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99년 복원하였고, 지금도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을 이곳에서 재현하기도 한다.

계속해서 다시 길을 걷는다. 미션 완료까지 이제 얼마 안 남은 듯하다. 길은 계속 완만한 산책로라 힘들지 않다. 일행들은 조금은 지쳐가는지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한다. 혼자만의 미션수행 중이라 그 말이 그리 반갑지는 않아 혼자 다녀올 테니 먼저 가서 쉬고 있으라고 하고 다시 길에 오른다. 함께한 여행에서 혼자 가겠다니 조금은 야속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나와의 약속이라 어쩔 수 없다. 어쩌겠나? 목표가 생기면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가 않는 걸.

용담폭포
 용담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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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나타난 용담폭포. 오래전 최수종 주연의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궁예의 최후가 촬영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물이 적어 시원스런 물줄기를 기대할 순 없다. 하지만 주변 용담폭포를 노래한 시 구절을 바위에까지 새긴 걸 보니 물이 많을 때는 어떠한 장관을 이루는지 안 봐도 알만하다.

폭포의 상류 쪽에는 꾸구리바위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흔들릴 정도였다고 하니 그 크기와 힘이 엄청나다. 꾸구리는 잉어과의 한 종류로 현재는 멸종위기를 맞고 있는 데다가 올 초에 발간된 각종 신문기사에 의하면 4대강 공사로 인해 폐사된 것도 확인되었다니 왠지 씁쓸해진다.

어느덧 마지막, 길의 끄트머리에 많은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돌탑들과 조곡폭포가 보인다.저마다의 소원을 담은 사람들의 손에 세워진 돌탑들을 보며 나도 작지만 소중한 소망을 빌어본다. 어차피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 때문에 돌을 얹지는 못하고 그저 마음속으로 읊조릴 뿐이지만.

조곡폭포의 빈약함은 조금 아쉽다. 지나가는 아주머니의 말씀으로 작은 위안을 삼아본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엔 이 폭포도 큰 물줄기를 만들어내 사람들의 옷깃을 적시기도 한단다.

제2관문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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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션완료! 조곡관 담장에 터치다운.

무언가를 목표로 걷는다는 것, 사람의 인생과도 닮아있다. 이 길 위에서 나는 또 성취감을 느끼며 만족한다. 제2관문 조곡관을 넘어 또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엔 저 길을 넘어서 36km 전 구간을 걷기로 기약하며 다시 걸었던 길을 돌아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 게재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http://dandyjihye.blog.me/140118169744



태그:#문경새재,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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