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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지리산 종주의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예상 못 했다. 올 5월에 다녀온 후로 무릎이 안 좋아서 근신하며 근처 산만 오르내렸다. 오직 좋아하는 운동이 걷기와 산을 오르는 거라, 지인들이 가자고 하면 자꾸 따라 나서게 된다. 산길을 걷노라면 발끝에 착착 감겨드는 땅과 바위의 촉감이 너무 좋다.

어쨌든 남편이 3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며 지리산 종주를 하면 어떻겠냐고 한다. 망설일 필요가 없는 일이다. 제일 먼저 연하천 대피소와 장터목 대피소에 예약을 했다. 천왕봉 일출을 볼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대하면서. 그런데 떠나는 전날 밤에 지리산 산불 소식을 들었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아침에 지리산국립공원 홈피에 들어갔더니 산불에 관련된 공지가 났다. 다행히 불길을 잡았고, 탐방객들의 입산통제도 없다고 한다.

10일 아침. 노고단의 진달래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10일 아침. 노고단의 진달래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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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아이젠도 챙기자고 했다. 하지만 짐을 줄이려는 마음이 앞서 "에이, 아이젠은 아니다" 하고는 넣지 않았다. 일기예보를 체크하던 당시의 지리산은 전체적으로 맑음에 가깝게 나와 있었다.

구례의 아침은 맑고 따뜻했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탄 버스가 성삼재를 오른다. 그런데 버스 속에서 올려다 본 노고단 정상 부근이 하얗다. 서리가 내렸나? '설마 눈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삼성재에 도착해서 보니 눈이었다. 하얗게 쌓인 첫눈을 지리산에서 보는 행운이건만, 아뿔싸, 가져오려고 만지작거렸던 아이젠이 눈앞에서 먼저 아른거린다.

사람들의 탄성과 사진 찍는 부산함에 노고단 정상이 왁자했다. 도대체 눈이 언제 내린 건지. 노고단으로 오르면서 만난 사람들 말로는 어제 내렸고(9일), 그 눈이 산불진압에 일등공신이었다는 소리들을 했다.

종주의 시작. 노고단 고개에서 산속 길로 접어드니 사방천지가 눈이다.
 종주의 시작. 노고단 고개에서 산속 길로 접어드니 사방천지가 눈이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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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대피소에서 아이젠을 물어보니 아직 준비해 두지 않았다고 한다. 걱정은 앞서나 황홀한 설경 앞에서 그냥 있을 수 없어 우리도 사진 찍기에 나섰다. 그리고 남편은 반대편에서 노고단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산길의 상태를 물어본다.

"말도 마소, 어제 천왕봉에 눈이 내렸는데 바람은 어찌나 부는지 무섭더만" 덩치 큰 아저씨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이젠 없이도 갈 수 있느냐고 하니깐, 어제 내렸으니 오늘은 웬만큼 녹아서 괜찮을 거라 한다. 어떤 젊은 남녀 팀들은 "더러더러 녹고 토끼봉과 명선봉에서 연하천으로 내려가는 길이 미끄럽기는 해도 스틱이 있으면 견딜 만하다"고도 한다.

11일. 하루 종일 바람이 실어 나르는 운무 속에 잠겨 연하천에서 장터목까지 걸었다.
부족한 사진기술로는 이렇게 밖에 잡히지 않아 안타깝다.
 11일. 하루 종일 바람이 실어 나르는 운무 속에 잠겨 연하천에서 장터목까지 걸었다. 부족한 사진기술로는 이렇게 밖에 잡히지 않아 안타깝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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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노고단 고개에서 천왕봉 종주 25.5㎞의 길로 들어섰다. 봄에는 꽃봉오리가 팥알처럼 박혀있던 진달래나무들이 하얀 쌀가루에 푹 빠졌다 나온 형상들을 하고 무심한 듯 서있다. 그 때 어떤 여자가 아이젠을 하고 성큼성큼 스쳐 걸어간다. 그것도 혼자서.

11월 초에 지리산에서 예상치 않게 눈을 본 놀람보다 더 놀랐다. 준비성과 담대함에 절로 박수가 나왔다. 또 한 무리의 여자들이 반대편에서 올라온다. 그네들은 피아골에서 올라와 노고단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길이 상당히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이른다.

마음 한편에 걱정을 묻어두고 걸었지만, 봄에 왔었기에 지나는 길목들이 낯설지가 않았고 진달래 피었던 풍경과 설경의 풍경이 겹쳐지면서 보는 재미가 더했다. 삼도봉 못 미쳐 한 무덤가에 피어있던 얼레지는 흔적도 없건만 푸른 조릿대 잎은 흰 눈 속에서 더 파리해 보였다. 푸른 파도처럼 밀려오던 겹겹의 산들도 쏟아진 눈을 보듬어 안고는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12일 새벽. 천왕봉, 운무 속에서 일출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2일 새벽. 천왕봉, 운무 속에서 일출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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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청년이 혼자서 씩씩하게 올라온다. 인적 드문 산 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스치지 않고 서로 인사한다. 서울에서 왔단다. 앞에 남편이, 가운데 내가, 뒤에 청년이, 미끄러운 삼도봉 길을 나란히 걸어 내려간다. 청년에게 앞서가라니 자기는 원래 걸음이 빠르지 않다며 내 뒤에 선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내 앞을 비집고 들어서지 않는다. 마음이 고마웠지만, 그래도 길을 비켜주니 바람처럼 화개재를 넘어가 보이지 않는다.

해가 드는 곳은 눈이 녹아 있었지만, 해가 들지 않는 길은 사람들 발에 밟혀 반질거렸다. 토끼봉에서 연하천대피소까지의 길은 발끝에 닿는 미끄러운 돌들 때문에 어찌 넘었는지 정신이 없었다. 연하천 대피소 입구로 내려가는 길에는 아주 긴 계단이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휴, 계단"했을 텐데,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그 계단이 반가웠다. 노고단에서부터 연하천까지 약 5시간 걸렸다. 다행히 연하천에서 아이젠을 구했다.

한쪽에 도사리고 있던 걱정이 사라지면서 연하천의 밤하늘 풍경이 들어온다. 별이 쏟아지려고 한다. 눈 온 날씨와는 달리 밤공기가 봄 때보다 따뜻하다. 밥을 해서 먹고 있는데 아이젠을 차고 달려 나갔던 그녀가 도착했다. 우리보다 늦은 이유는 반야봉을 거쳐 왔기 때문이란다. 연하천 하늘의 별은 성성하게 빛나고 있는데 사람들이 달고 온 소식으로는 내일 비가 온단다.

일출이 눈 쌓인 능선들을 단풍들게 했다.
 일출이 눈 쌓인 능선들을 단풍들게 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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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뿌연 안개가 앞 산 정상머리로 스멀스멀 번지고 있었다. 오늘은 벽소령, 세석을 거쳐 장터목까지 13.3㎞를 걸어야 한다. 함께 밤을 지낸 길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하천을 떠난다. 오전 8시 20분쯤에 여장을 여미고 출발했다. 비록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았지만 미끄러운 길에서도 안정됐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용하면 되고, 필요 없게 되어도 든든한 마음 갖게 해준 것으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되겠기에.

남편은 빨리 걷지 못하는 나와 보조를 맞추느라 앞서가다 서고를 반복한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제일 뒤처졌다. 가끔 우리와 보조가 맞게 되는 어떤 두 남자는 "아주머니가 천천히 가서 마음이 편해요" 한다. 쏜살같이 걸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급한 마음이 드는데, 다행히 자신들보다 더 늦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이 된다는 소리다. 

용트림하던 순간들이 지나고 평온의 천왕봉을 내려오는 사람들.
 용트림하던 순간들이 지나고 평온의 천왕봉을 내려오는 사람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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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빠른 속도로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실루엣을 몰고 우리 앞을 스쳐갔다. 사진에 담으려고 노력해 보지만 비웃듯 사라진다. 산속은 점점 오리무중으로 변해갔다. 분명 비는 내리지 않는데 나무들은 젖었고, 젖은 나뭇가지에 맺힌 물방울들은 바람이 불면 후두둑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우리의 옷도 안갯속에서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어떤 구간은 꼭 밤처럼 어두워지기도 했고, 벽소령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잠깐 아이젠을 착용하기도 했다.

연하봉을 넘는 평원에서는 뭉텅이 운무들이 뭉게뭉게 눈앞에서 날아갔다. 꿈이런가. 바람에 밀리고 운무에 이끌리며 장터목에 도착하니 오후 4시 40분. 부지런히 걸었는데도 많이 지체되었다. 그 시간인데도 산 속은 깜깜한 밤처럼 되었다. 그리고 10분쯤 뒤에 천둥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조금만 늦었다면 고생할 뻔 했다. 나 때문에 마음 놓인다고 했던 두 남자는 벽소령에서 쉬다가 뒤처졌고, 그 비를 다 맞고 도착했다.

"내일 일출은 7시쯤에 뜰 예정이며 천왕봉까지는 1시간 20분쯤 걸립니다."
장터목에 머무르는 대부분 사람들은 천왕봉의 일출을 염원하기에 안내방송까지 한다.

장터목에서 바라본 산. 밀려오는 파도 같다.
 장터목에서 바라본 산. 밀려오는 파도 같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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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다행히 비가 더 오지 않았고, 새벽부터 사람들은 분주했다. 우리는 새벽 5시 20분쯤에 출발했다. 무거운 짐은 놔두고 헤드라이트와 아이젠, 뜨거운 물만 챙겼다. 이번에는 중산리가 아닌 백무동계곡으로 내려갈 예정이라 다시 장터목으로 내려와야 한다. 어두움 속에서 앞서가던 젊은이들이 헤맨다. 그래서 우리가 앞장서게 되고, 통천문 앞에서 우리는 아이젠 차느라 뒤처지니 젊은이들이 다시 앞서고, 그렇게 어둠과 바람 길을 뚫고 도착한 천왕봉은 야속하게도 안갯속에 파묻혀 있다.

날은 밝아오는데 해가 떴는지 말았는지 알 수가 없다. 포기하고 내려가는 사람도 생긴다. 바람은 어찌나 부는지, 쌓여있던 눈이 날린다. 바위 뒤에 사람들이 숨는다. 남편이 따뜻한 물을 옆 사람에게 건네니 그 쪽에서는 빵이 넘어온다. 시간이 흐르고, 순간 일출을 반기는 사람들의 탄성이 터진다.

강렬한 빛에 운무가 견디지 못하고 걷히면서 산이 용광로 속처럼 붉어졌다. 안갯속에서 일출은 이미 진행돼 있었다. 절반의 일출광경. 그래도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리고 새로운 추억 한 가지를 챙겨든 우리도 여유롭게 천왕봉을 내려왔다.

단풍 속 백무동계곡.
 단풍 속 백무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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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계곡의 깔딱 고개를 쉬엄쉬엄 내려가고 있는데 우리와 반대로 땀 흘리며 허위허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남편이 오이하나를 꺼내어 건넨다.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요? 에이, 그것을 종주라고 하면 안 되지. 화엄사에서부터 올라야 진정한 종주지, 차타고 성삼재까지 왔는데 무슨 종주요? 그냥 산행이지."

그 사람은 우리가 준 오이를 씹어 먹으며 성삼재부터 오르는 것은 진정한 종주가 아니란다. 그리고 천왕봉에서 자신이 맞이했던 일출의 감동을 얘기하며 '한마디로 평생의 충격'이라고 했다. 남편은 젊었을 때 화엄사부터 걸어 종주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성삼재부터 천왕봉까지 걷는 것도 종주라고 생각하는 마누라 앞에서 절대 통박주지 않고 열심히 동행해 주었다. 그런데 그이는 일거에 통박을 준다. 좀 미흡하더라도 2박3일 산속을 걸어온 사람을 앞에 두고 그렇게 야박하게 말할 필요가 무에 있는가 말이다.

백무동 계곡의 능선들은 단풍들어 잔칫집 같았다.
 백무동 계곡의 능선들은 단풍들어 잔칫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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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마음도 잠깐이고, 내림 길의 여유로 낙엽 쌓인 백무동의 긴 돌길도 지루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앞산의 불타는 단풍 또한 이번 여행의 말미에 얻어진 행운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정상을 향해 오르는 숨 가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관이었다. 장터목에서 백무동까지는 4시간 거리라는데, 5시간 20분 걸렸다.

지리산의 설경과 운무 속을 거닐다가 쑥 빠져 나오니 백무동의 단풍이 현재의 시간을 알려준다. 겨울에서 가을로 되돌아 왔고, 다시 현실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11월 10일 수요일 아침부터 12일 금요일까지, 2박 3일 동안의 기록입니다.



태그:#지리산 종주, #성삼재, #천왕봉 일출, #지리산 운무, #지리산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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