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도 망설이고 오래도 망설였다. 김치냉장고가 우리 집에 들어오기까지. 사실 김치냉장고, 우리 집에서 보기엔 고가의 물건이다. 요즘 김치냉장고 200L 전후의 크기를 새것으로 사려면 최하가 60만원 이상이란다. 까짓 거 두 눈 딱 감고 60만원을 할부로 끊으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몇 년을 살까 말까 벼르기만 했다. 집에 일반냉장고가 없고, 김치냉장고를 사야 했다면 어쨌든 들어왔으리라. 아니 어쩌면 일반냉장고라도 있기에 김치냉장고가 이때까지 우리 집에 들어오지 못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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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202L나 되는 냉장고이지만, 아내와 나는 번쩍 들었다. 특히 아내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엔돌핀이 돌면 장사가 되나보다. ㅋㅋㅋㅋㅋ |
ⓒ 송상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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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월 8일)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막내 동생 제수씨다.
"아주버님, 우리 시골집에서 엄마가 배추 가져가시래요."참 고맙다. 작년에도 우리 집에다가 김장하도록 배추를 주셨다. 사돈 어르신이 자신의 집 앞 텃밭에서 배추를 키워 자녀들을 주면서 우리 집도 잊지 않으시니 말이다. 이런 걸 봐도 동생이 장가 하나는 참 잘 갔다 싶다. 더아모 리무진(15인승)을 이끌고 배추를 가지러 가는 중에 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김치냉장고 중고가게인데요. 인터넷에서 시키신 냉장고를 배달하기가 힘들어서 못 갑니다. 안성이면 기름 값이 많이 나와서요." 며칠 전 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주문한 중고 김치냉장고 가게에서 온 전화다. 아내와 내가 큰 맘 먹고 주문한 김치 냉장고다. 가격대가 20만원 가까이 하지만, 평소 거래하던 믿을 만한 곳이라 주문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같은 경기도이면서 배달이 안 되다니. 가까운 곳에만 배달해주려면 인터넷 사이트엔 왜 올렸을까. 전화 준 사람에게 조금 따지다가 그래봐야 어차피 안 올 거니 포기했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그래서 실망할 아내의 얼굴이 얼핏 스쳐지나간다.
사돈댁에 들르니 미리 배추를 뽑아 놓으셨다. 사돈 어르신은 배추뿐만 아니라 대파와 무도 주신다. 양념만 사면 김장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신다. 배추 밭에서 이미 사돈댁 다른 형제들이 배추를 가져갔나 보다. 한 집 줄 것만 남겨두었다. 우리 집이 배추를 가져가는 순서로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가 보다. 사돈 어르신이 그냥 보내기 아쉬워 한사코 거실로 들어오라신다. 군고구마, 감, 사과를 내놓는다. 안 그래도 출출한 터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아참, 제수씨. 중고 김치냉장고를 어디 싸게 파는 데 잘 알아요?""글쎄요. 저도 잘 몰라서. 그냥 중고가전 매장에 직접 전화해보심이."이렇게 해서 사돈댁에서 중고 가전매장으로 한참 전화를 돌렸다. 여기저기 중고 가전매장으로 김치냉장고의 가격, 브랜드, 크기 등을 문의했다. 그러다가 한 곳으로 낙점되었다. 부리나케 인사를 하고 사돈댁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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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낑낑 아무리 엔돌핀의 힘을 빌린다지만, 무게는 만만찮았다. 아내와 내가 낑낑대며 시골 집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모든 사진을 우리 집 막둥이가 찍었다. |
ⓒ 송상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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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할 아내에게 실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나의 굳은 의지가 발동했다. "얼른 가서 미션을 수행해야죠"라 했더니 제수씨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고 빙그레 웃는다.
중고매장에 도착했다. 어떤 것을 살까. 몇 대가 있었다. 나는 그 중 제일 크고 제일 최신형에 눈이 갔다. 크다고 해봐야 200L 정도. 가격대는 40만원.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내와 같이 왔으면 더 싼 걸로 골랐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동안의 미안한 마음을 만회하려는 나의 마음은 그것을 낙점하고 있었다.
카드를 긁었다. 8개월 할부로. 그것도 카드라 부가가치세가 붙어서 43만 원 정도의 가격으로 긁었다. 까짓 거 8개월 동안 그 정도 가격이라면 끄떡없다.
중고라 김치 통은 따로 구입해야 한단다. 김치냉장고 대리점 가서 사면 비싸니까 그릇 가게에 가서 사라는 조언을 해줬다. 조언대로 당장 그릇 가게를 들렀다. 한 통에 9천 원 씩. 모두 8통. 통 값만 해도 72000원. 거의 50만원 돈이 들은 셈이다.
더아모 리무진 트렁크엔 사돈댁에서 주신 김장거리와 좌석시트 위엔 김치냉장고와 김치 통을 실고 집으로 향했다. 마치 큰 전쟁을 이긴 개선장군처럼. 마치 만선한 어부처럼. 중간에 퇴근하는 아내를 태웠다.
조수석에 아내가 타자마자 나는 엄지손가락을 뒤로 가리키며
"자 보라고. 뒤에 뭐가 실려 있는지.""어머, 김치냉장고네. 이거 당신이 왜 직접 가져 왔수.""그게 아니고 인터넷에서 시킨 건 취소 됐다네. 그래서 중고매장서 직접 사왔소"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장 아내가 되묻는다.
"얼마주고?"순간 뜨끔했다. 너무 비싸게 주고 샀다고 야단맞으려나. 같이 가서 사지 않고 혼자 샀다고 뭐라 하려나.
"이거 그 집에서 제일 용량이 크고, 최신형이래네.""아, 그러니까 얼마냐구.""40~~만~~원"아내가 반응이 좋다. 어차피 사기로 했고, 용량도 괜찮고, 브랜드도 괜찮고, 디자인도 괜찮고, 최신형이라는 것도 괜찮았나보다. 아내의 반응보고 당장 김치 통 값도 72000원 더 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카드로 긁어서 4만 원정도 더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차마 못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배추부터 내렸다. 다음은 김치냉장고. 차에 실을 때도 건장한 가게 아저씨와 겨우 실었는데, 아내와 나 단둘이서 그걸 내려야 했다. 신기하다. 그렇게 힘겹게 실었던 것인데, 아내와 나는, 특히 아내는 번쩍번쩍 그것을 든다. 살짝 낑낑대긴 했지만, 거실 한 곳에 김치냉장고가 자리 잡았다. 집에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내가 산 냉장고의 용량이 202L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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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이질 막둘이가 셔터를 누르려 하자, 아내는 '브이질', 나는 '혓바닥질'을 하고 있다. 아내의 '브이질'이 아내의 맘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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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잡고 나니 그제야 아내는 얼굴에 미소가 확 번진다. 막둥이가 사진을 찍으려 하니 '브이'를 하고 난리다. 아내가 정말 좋은가 보다. 이토록 좋은 걸 이제야 샀으니 아쉬울 법도 하지만, 어쩌면 돈이 많아 진즉 새 것을 산 것보다 이렇게 망설이다 산 것이라 더욱 행복하고 좋을 수도 있겠다.
이런 걸 겹경사라 했던가. 결혼하면 얼마 동안, 차를 사면 얼마 동안, 집을 사면 얼마 동안 그 기쁨이 간다는데, 아내의 이 기쁨은 얼마 동안 갈까. 어쨌든 사돈댁에서 얻어온 배추로 김치를 담아 이 냉장고에 넣을 걸 생각하니 그저 흐뭇하다. 올 겨울 동안 아삭아삭한 김치덕분에 우리 집이 행복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