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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사무실에 들른 후배, 춥다면서도 얇은 가을옷차림이었다. "추우면 겨울 외투를 입어야지, 나는 그저께부터 입었는데"라고 했더니 "지금부터 입으면 겨울이란 걸 인정하는 게 되잖아. 아직은 겨울이란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래. 가을이라고 우기고 싶어서"란 대답이 돌아왔다.

 

추워진 것은 날씨만이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아래 국가인권위)에는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지난 1일 국가인권위원회 유남영·문경란 상임위원이 사퇴했다. MB 정권의 하수인, 현병철 위원장 체제하에서 죽어가는 국가인권위의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다. 그들은 눈물로 떠났고, 떠나보내는 이들의 사진을 보며 내 마음속 겨울이 깊어갔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가 주최하는 교육에 강연을 요청받았지만 거절했다. 현 국가인권위에 가서 뭔가 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국가인권위를 인정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아서였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인권 침해를 고발하고 싶고 인권향상을 위해 뭔가 도모하고 싶은 사람들이 국가인권위에 대해 내키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심정이 된 지 오래다.

 

인권의 견제와 감시를 받아야 할 힘센 기관들이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휴짓조각 취급한 지 오래다. 현 위원장이 국가인권위를 제 의사봉 휘두르는 꼭두각시 공연장으로 운영한 지 오래다. 국가인권위는 분명 '겨울'을 맞고 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국가인권위에 대한 글을 또 쓰게 되는 건, 그 '겨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다. 국가인권위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다. 그건 국가인권위가 국민의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된다. 떠나야 할 것은 현 위원장과 국가인권위에 대한 현 정부의 장난질이지, 국가인권위가 가진 역할과 의무가 아니다.

 

'겨울공화국'서 벗어나기 위해 탄생한 인권위

 

원래 국가인권위란 것 자체도 태평하게 사무실 의자에서 한가한 협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국가인권위는 겨울의 한복판 아스팔트 위에서 태어났다. 긴 세월 인권을 억압당한 '겨울 공화국'을 벗어나고자, 인권이라면 거북해하는 권력기구들의 텃세와 횡포속에서 힘들게 태어났다. MB 정권 들어 그런 횡포와 방해가 더 심하고 노골적인 건 분명하지만, 국가인권위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국가인권위를 만드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아직도 몇몇 인권활동가들의 몸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일이 있다. 겨울마다 찾아오는 얼굴동상과 발가락 동상으로 말이다.

 

2000년 말이었다. 3년여를 끌어온 국가인권위 설치법안이 법무부와 검찰의 조직이기주의와 정치권의 무소신으로 흐지부지될 위기상황이었다. 이대로 또 해를 넘길 수는 없다는 절박함에 인권활동가들은 한겨울 노숙단식농성이라는 강수를 선택했다.

 

연말연시라 누가 쳐다보지도 않았고 20년 만의 폭설과 혹한이 찾아왔지만 단식농성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13일간 이어졌다. 단식자들은 하루 종일 길바닥에서 눈을 맞았고, 밤이면 그 자리에서 침낭위에 비닐을 덮어 쓰고 잤다. 비닐 속에서 내쉰 숨이 그대로 얼어서 비닐에 달라붙었다. 그 얼음조각을 털어내고 비닐을 말리는 일이 농성장의 아침풍경이었다. 탈진해서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도 생겼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달력에서 지워가자 조용하던 세상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많은 시민들이 농성장을 찾아 촛불을 들었고 같이 아스팔트 위에서 잠을 청했다. 국회를 찾아가도 상대를 안 해 주던 의원들이 직접 농성장을 찾아 사죄를 했고 닫혔던 언론의 입도 열렸다. 유엔인권최고대표를 비롯해 국제사회의 관심이 한국의 국가인권위 설립을 주목했고 정부의 '장식용' 기구가 아니라 투쟁 속에 설립되는 국가인권위의 모범사례로 지적했다.

 

단식농성의 마지막은 국회의사당 분수대를 배경으로 한 기습시위였다. 하얀 눈밭인 국회를 배경으로 농성단의 "오라! 국가인권위"란 노란 조끼가 빛났다. 13일간 굶은 사람들이 눈밭에서 아이들처럼 뒹굴었다. 그건 그저 그런 법 마련을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어떤 권력보다도 인권의 가치와 원칙을 더 두려워하고 어떤 법보다도 인권을 더 지키려는 세상에 대한 꿈이었다.   

 

2001년 11월 26일 첫 문을 연 국가인권위

 

그리고 2001년 4월 30일, 국가인권위법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권력기관들의 술수로 여기저기 구멍이 많은 상태였기에 인권단체들은 마음껏 환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인권위원들이 밀실 인선됐다. 왜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인권위원으로 정하는지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법무부, 국방부, 보건복지부 등은 해당 보호시설을 국가인권위의 조사대상에서 제외하고 조사를 하려면 사전에 통지하라고 요구했다. 행자부는 국가인권위의 인원규모를 축소하려 했다. 이 같은 권력기관들의 훼방으로 사무처도 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인권위는 문을 열었다. 2001년 11월 26일이었다(국가인권위원회법 발효일은 2001년 11월 25일).

 

'국가' 기관이라지만 초라했다. 10평 남짓한 사무실에 간이 칸막이를 세워 임시상담실 4곳을 만들고 인권침해 진정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심은 초라하지 않았다. 장애를 이유로 승진차별을 당했다는 진정접수 1호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국가인권위를 적대시하는 관료집단의 저항과 국가인권위 운영의 비민주성이 맞물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출발이었지만, 살아있는 기운을 불어넣어 준 것은 바로 사람들이었다.

 

지난 10여년의 역사 속에서 국가인권위가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같이 매를 맞겠다'는 맷집을 갖고 버티고 대들 때였다. 그런 때를 살펴보면 시민들의 국가인권위에 대한 지지와 관심이 높았고, 그럴 때 나온 국가인권위 권고에 대해서는 권력기관들 뿐 아니라 기업체들도 순순히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곤 했다. 지금 국가인권위는 자신이 태어난 위치와 생존의 유일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야?", "그런데 뭐, 국가가 인권기구를 만든다고? 인권을 침해하지나 말라고 해" 이런 비웃음은 과거에도 현실이었고 지금도 현실이다. 국가인권위가 있다고 해서 한국 사회의 인권 수준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하고 냉대 받는 사람들에게도 아쉬울 때 찾을 수 있고 뭔가 말할 수 있는 국가기구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를 찾아다니는 일을 전담하는 국가기구가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나? 이런 최소 희망 사항을 담고 태어난 게 국가인권위이다. 그런데 그런 최소 기구에게조차 권력기관의 눈치를 보라하고, 정권의 입맛대로 일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소 희망사항도 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위원회, 옴부즈퍼슨 제도 등을 분야별로 촘촘히 엮어 나가도 모자랄 판에 최소 중의 최소 수준인 국가인권위를 짓밟겠다고 하니,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이 요구하고 더 받아내야겠다.

 

앞서 말한 단식농성단이 농성을 끝내며 발표했던 성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오늘 개혁의 임무를 방기하는 자에게 내일 하늘이 그 기회를 다시 주지는 않는다. (당신들이) 처박고 있는 거짓과 태만과 배반은 내장 속에서 썩어가 결국 국민들의 수술집도를 받게 될 것이다."

 

지금 상황에 더 들어맞는 성명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 류은숙 기자는 현재 인권연구소 '창'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국가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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