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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전 대통령 네스토르 키르츠네르가 27일 오전 고향인 남부 산타크루즈주 칼레파테시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세계 시민들은 60세의 짧은 나이에 영면한 능력 있는 지도자의 명복을 비는 데 동참했다.
 

27부터 3일간 시신이 안치된 아르헨티나 정부 청사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행렬에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 등 평소에 그와 함께 중남미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동참했다.

 

키르츠네르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자기 부인에게 정권을 인계한 세계 민주국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2001년 디폴드의 격랑 속에서 10여일 만에 네 번이나 대통령을 교체해야 했던 아르헨티나호를 맡은 키르츠네르는 2003년부터 5년 집권동안 총체적 경제위기에서 아르헨티나를 구출한 장본인이다.

 

외채지불정지 상태에서 국가채무 구조조정을 완료하고 5년 동안 8% 이상의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고용이 확대되고, 실업이 감소하였으며, 연금 수혜자가 늘어나는 등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의 안정을 이끌었다. 2008년 이후에 계속된 부인의 임기 말인 2011년 대선에서 본인이 다시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고, 약체 야당과 대안 부족인 여당의 상황속에서 그의 당선은 예선됐다.

 

1983년에 집권한 라울 알폰신 대통령이 민주화의 아버지라면 키르츠네르는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파탄에서 구출한 대통령으로 각인되었다. 그는 친 인권, 중도 좌파 성향의 정치인으로 군·경찰과 대법원의 개혁을 단행하여 독립시켰다. 알폰신과 메넴 정부에서 시행한 독재자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사면·복권을 원점으로 돌리는 인권을 위한 역사청산 작업도 실행했다.

 

물론 그의 통치스타일로 대립정치를 고집하다 2008년 농민파업을 초래했다. 여기에서 그가 함께 했던 부통령이 농민 편에 섬으로써 판정패를 당했고, 정치적 어려움을 당했다. 언론 문제, 국립계청의 물가지수를 조작한다는 의심을 사 신뢰를 잃는 등의 실수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외관계에서 그는 메넴의 친미 노선을 수정하여 미국과는 시종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으나 중남미 지역 내 국가인 브라질, 베네수엘라, 쿠바 등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남미국가연합 (UNASUR)의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하여 중남미 협력에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르헨티나 국민과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한 전직 대통령을 잃은 것이 아니고, 여당인 페론당과 정부의 모든 부분에서 영향을 미쳤던 권력 실체를 잃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망은 아르헨티나의 정치,경제, 사회에 동요와 불안정을 가져올 것으로 예견된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의 도전

 

남편을 가족묘에 안장 시키고 브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도착한 크리스티나는 이제 아르헨티나 호를 이끌 업무에 복귀하게 된다. 남편의 죽음으로 크리스티나 페르난도 대통령의 앞길에 많은 도전이 예상된다.

 

남편인 전 대통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노조와의 긴장, 페론당의 운용, 인플레이션, 빈곤 등 크리스티나 대통령이 혼자서 짊어질 짐이 적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2011년의 대선에 그의 남편의 도전이 확실시 되었으나, 그의 사망으로 대통령 자신이 2011년의 10월의 대선에서 헌법에 허용된 재선의 길에 도전할 것인가가 제일 큰 문제로 등장한다.

 

물론 평생 동지인 막강한 후원자 남편의 죽음을 잘 이겨내고 원만한 정부 운영이 전재된다면 그의 재선 도전이 가능할 것이다. 이번 장례식 조문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정부의 전언을 받은 전 대통령 에드와르도 두알데나, 정부와 불편한 관계인 라디칼당 현직 부통령 훌리오 코보 등이 여당과 야당에서 각각 크리스티나의 라이벌로 등장 할 것이다. 야당에서도 마끄리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과 라바냐 전 경제장관 그리고 엘리사 카리오 등이 포진해 있으나 현재까지는 페론당 크리스티나의 지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저력으로

 

그러나 8년 전 겨우 22%의 지지로 우여곡절 끝에 당선된 키르츠네르의 성공에 비추어 볼 때, 예기치 못한 그의 사망으로 생긴 커다란 권력의 공백을 누가 어떻게 메우고 리더십을 발휘할 지가 관심의 대상이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1983년 민주정부 이후에도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슬기롭게 잘 헤쳐 나온 경험이 있다. 1989년의 알폰신 대통령의 조기 퇴임에서 생긴 공백을 메넴대통령을 통해서 극복했고, 2001년 극심한 경제난과 대통령의 도주와 그에 이어진 디폴트 상황의 정국 혼돈에서도 페론당의 에드와르도 두알데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 노조지도자 그리고 인권 관련 지도자들이 협력하여 위기를 벗어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인들은 키르츠네르를 잃은 아르헨티나 국민과 크리스티나 대통령이 큰 상처를 조속히 치유하고 당면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마침 브라질의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딜마 호세프가 56%의 지지로 44%에 그친 야당 후보 호세 세하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딜마 호세프는 브라질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국제관계에서도 이제까지 키르츠네르와 델라 루아 대통령의 주도하에 중남미 역사를 이끌어왔는데, 두 여성 대통령이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여 주인공으로 중남미를 이끌 게 되었다.

 

국민의 저력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의 용기와 지혜를 갖고 어려운 나관을 극복하길 세계인들이 기대한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11월 11일부터 있을 G20정상회의에 참석이 예정되었던 크리스티나가 늠름한 모습으로 한국을 찾아 세계와 아르헨티나를 위한 일에 동참하길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박채순 박사는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이며  한국-아르헨티나 협회 부회장입니다.


태그:#키르츠네르 사망,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대통령 사망, #한국 아르헨티나 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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