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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가 지정한 23권의 <불온서적> 中 일부
 국방부가 지정한 23권의 <불온서적> 中 일부
ⓒ 김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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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군대 내에서 국방부가 지정한 불온서적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군인복무규율 조항은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왔다. 이로써 2008년 당시 위 조항의 위헌성을 따지기 위해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국방부로부터 파면조치를 당했던 지영준, 박지웅 법무관 등은 구제받지 못하게 되었고, 우리 헌법재판소는 또 다시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사건'에 이어 그 정치적 색깔을 완전히 벗어버리는데 실패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문제가 된 군인복무규율 제16조의 2의 [불온표현물 소지·전파 금지] 조항은 "군인은 불온유인물, 도서, 도화, 기타 표현물을 제작·복사·소지·운반·전파 또는 취득해서는 안 되며, 이를 취득한 때는 즉시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방부는 2008년 8월, 이 조항을 근거로 영국 캠브리지대학 경제학부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미국 MIT 명예교수이자 세계 언어학의 석학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교수 등의 저서, <삼성공화국의 게릴라들>, <우리들의 하느님>, <대한민국史>, <지상에 숟가락 하나>등을 포함한 23개의 서적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하고 군대 내의 반입 및 소지 등을 금지하였다.

사법시험 합격과 사법연수원 수료 후, 군대 내에서도 헌법과 법률이 올바로 지켜지는지 보기 위해 군대에 군법무관으로 복무하게 된 지영준, 박지웅 법무관 등은 이 조치로 인해 군인들의 헌법상 보장된 알권리 및 사상의자유 등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있는지에 대한 위헌성 여부를 가리기 위해 2008년 8월 즉시 내부토의를 거쳐 합법적으로 이를 시정할 방법으로 '헌법소원' 제도를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병사들이나 일반 장교들은 신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변호사 신분이 보장된 군법무관들이 용기를 갖고 이 문제를 바로잡자는 데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그러나 박지웅 변호사의 민주화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터뷰에 따르면 국방부는 공안사건의 상 수괴, 모집책, 행동책의 개념 등을 동원하며 위 두 법무관에게 파면결정을 내렸고, 결국 이번 헌법재판소 판결로 인해 두 법무관은 향후 5년간 변호사 자격정지의 파면결정으로부터 구제받기 어렵게 되었다. 또 군 복무기록에도 불명예제대 기록이 남게 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이번 판결에서 "군의 정신전력이 국가안전보장을 확보하는 군사력의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점이 분명한 이상, 정신전력을 보전하기 위해 불온서적의 소지·전파 등을 금지하는 규율조항은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면서 청구인들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경향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헌법소원을 냈던 지영준씨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 "군대 내에서는 기본권이 대부분 제한받고 있고 투표권 정도만 남아있는데, 책 읽는 기본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고 밝혔다. 박지웅씨도 "지난 5월 프랭크 라 뤼 UN 표현의자유 특별보고관이 방한했을 때 '불온서적 지정은 국가로서의 수치'라고 했다"면서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이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지나치게 군인들의 알 권리와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23권의 책들은 대부분 주요 대학에서 인문사회 대표 교양서적으로 추천되고 있으며, 각종 대학 동아리에서 의식적으로 독서토론 대상으로 선정되는 서적들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9년 10월 19일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 형성의 자유(제19조)와 정보 수령 및 정보 수집의 자유(제21조)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의견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했으며, 2009년 4월, 군법무관 출신 법조인 50명은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에 헌법소원을 제기한 군법무관을 징계한 것은 부당하다"며 국방부에 탄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

심지어 장하준 교수는 2009년 6월, 한나라당 주최 강연 연단에 서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강연을 하였고, 현 대통령실장으로 있는 당시 임태희 정책위원장과 김성조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소장 역시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책 내용에 "근본적인 내용에 대해 고민하게 해주어 감사해서 초청하게 되었다"고 인터뷰 한 바 있다.

정두언 의원은 당시 장하준 교수의 강연을 듣고 "YS정부 시절 OECD에 가입한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마치 세계적 대세이고 만고의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 지금까지 왔다"며 "그 과정에서 10년 전 IMF 외환위기를 겪었고, 지금은 세계적 경제위기인데 이 정도면 국가 전략으로 채택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을 되돌아볼 때가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300여 명의 청중이 몰린 이날 강연에는, 한나라당 현역 의원 중 김성식, 이주영, 남경필, 안효대 의원 등이 강연을 끝까지 경청했고, 강성천, 강용석, 박보환 의원. 이정선 의원, 조문환 의원, 조전혁, 정진섭, 정태근, 이인기, 장광근 의원 등도 참석했다.

결국 보수와 진보할 것 없이 국방부가 지정한 '불온서적'이란, 우리 헌법이 천명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서적들이 아니라, 오히려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게 하는 대한민국 헌법전문의 이해를 돕는 서적들이라는 데 동의한 것이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지난 미디어법 권한쟁의 사건에서 "국회의원의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는 모두 인정하여 위법하나,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하여 무효는 아니다"라는 지나치게 코믹한 정치적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번 판결로 헌법재판소는 또다시 스스로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걷어찼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태그:#불온서적, #국방부, #헌법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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