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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이 1970년대 <중앙일보> 문학기자를 할 때 문인들을 직접 만나 그들과 여러 문학행사, 술좌석 등지에서 어울리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회고한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이가서)을 펴냈다
▲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 정규웅 정규웅이 1970년대 <중앙일보> 문학기자를 할 때 문인들을 직접 만나 그들과 여러 문학행사, 술좌석 등지에서 어울리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회고한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이가서)을 펴냈다
ⓒ 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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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화두로 삼아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문인들이 사는 문학동네에는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기가 막힌 일들과 이야기들이 많다. 코미디나 드라마, 영화 속에 나오는, 아무리 배꼽을 쥐게 하는 우습고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해도 문학동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포복절도'할 일들에는 감히 얼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문인들이 좋은 작품 하나를 빚기 위해 파고드는 깊고 넓은 상상력과 그 상상력 속에서 실제체험 혹은 간접체험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독자적이고도 독특한 이야기를 흉내 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창작이란 흉내 내기 혹은 엇비슷한 이야기를 적당히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 버금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도 10대 때부터 문인이 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원고지를 마음껏 희롱하면서 학대했다. 하지만 문학동네에서 벌어지는 '박장대소'할 일들과 '요절복통'할 이야기들은 그때까지 잘 몰랐다. 여러 선배 문인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어렴풋이 그런 이야기를 듣곤 했던 때는 1980년대 내가 문학동네에 은근슬쩍 끼어들면서부터였다.

해방 앞뒤 문단이야기와 1960년대 문단이야기는 요즘 들어 시인 강민(79) 선생님으로부터 종종 듣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 문단이야기는 아직까지 어렴풋이 알고 있어 조금 답답해하고 있었다. 근데, 그 1970년대 문단이야기를 꼼꼼히 엮은 책이 불쑥 나왔다. 그것도 그때 언론사 문학담당기자를 하며 문인들과 술좌석에서 직접 겪었던 일을 쓴 것이다. 정규웅(언론인, 문학평론가)이 쓴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이 그것이다.                

'문학하려다 안 돼 문학기자가 되어' 함께 어우러진 문학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970년대 그때, 그 행복했던 시절 문학과 문인 그리고 문단의 주변을 맴돌면서 체험하고 느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쓴 것이다.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야 쓸모없는 잡담에 불과할는지도 모르나 내 생애에 있어서 문학이 어떤 의미로 존재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전달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 프롤로그, '문학의 길, 문학기자의 길' 몇 토막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 정규웅이 1970년대 <중앙일보> 문학기자를 할 때 문인들을 직접 만나 그들과 여러 문학행사, 술좌석 등지에서 어울리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회고한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이가서)을 펴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이란 덧글이 붙어 있는 이 책에는 '문학을 하려다 안 돼 문학기자가 된' 그가 기자로 활동하면서 문인들과 직접 나눈 시간과 여러 가지 사연들이 그리움 혹은 추억으로 일렁거리고 있다.

제1부 '사람이 있는 풍경', 제2부 '책이 있는 풍경', 제3부 '이야기가 있는 풍경', 제4부 '시절이 있는 풍경' 속에 빼곡히 담겨 있는 64꼭지에 이르는 '눈물 절로 나게 웃기고 울리는' 글이 그것.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우리나라 문학을 일선에서 이끈 '기라성 같은' 문인들도 밤하늘을 반짝반짝 빛내는 별처럼 수없이 박혀 있다.

이문구, 박용래, 김현, 천상병, 황석영, 이외수, 김광섭, 이헌구, 이제하, 김훈, 김관식, 이봉구, 고은, 김현승, 유주현, 안수길, 최정희, 김동환, 최인호, 박두진, 김승옥, 조세희, 윤흥길, 박범신, 조해일, 김성동, 현기영, 양성우, 이병주, 김광섭, 신석정, 한하운, 김주영, 조선작, 오영수, 구자운, 이한직, 김광균, 조병화, 이문열, 정호승, 김명인, 박남수, 임옥인, 김춘수, 이영도, 모윤숙, 박목월, 서기원,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신석초, 정지용, 김기림, 김남주 등이 그들.

이뿐이 아니다. 이 글에는 이 문인들 이름 외에도 수없이 많은 문인들 이름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으며, 춤꾼도 있고, 화가도 있고, 가수도 있고, 술집 주모도 있고, 서슬 퍼런 정치  권력을 한손에 틀어쥔 사람들과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도 나온다. 이 책 제목 그대로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이란 그 말이다.   

정규웅은 며칠 앞 전화통화에서 '그때 왜 문학을 포기하고 문학기자가 되었나'라는 물음에 "어떤 소설가가 몇몇 비평가가 자신의 작품을 호되게 비판하자 '나도 소설을 쓰다 쓰다 안 되면 평론을 하겠다'고 일갈했듯이, 나도 '문학을 하려다 안 돼 문학기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며 잔잔하게 웃는다. 

그는 "성장기에 책을 좋아하시는 어머니 덕분에 문학도를 꿈꿔 습작도 하고 습작에 대한 좋은 평가도 받아봤지만, 본격적으로 문학을 향한 꿈의 실체를 드러낼 즈음, 근본적인 고민에 빠졌다"고 말한다. 그는 "'함께 문학을 했던 그 친구들을 뛰어넘는, 최소한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글을 쓰지 못할 바에야 함께 문학활동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문학을 즐길 수는 있으되 나 자신이 문학을 행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귀띔했다.

‘진짜 고은’은 구속된 ‘가짜 고은’이 “고은이 부러워서, 고은처럼 되고 싶어서 고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하소연을 듣고 고발장을 찢는다
▲ '진짜' 고은 시인 ‘진짜 고은’은 구속된 ‘가짜 고은’이 “고은이 부러워서, 고은처럼 되고 싶어서 고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하소연을 듣고 고발장을 찢는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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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행세를 하자 사람들이 한결같이 속아 넘어갔다"

"고은이 문명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지에 '가짜 고은'이 출몰했다. 고은은 서울에 있는데 영남, 호남, 강원 등 전국 대여섯 군데서 동시에 고은이 나타나 여성을 농락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다. 그래서 '가짜 고은은 홍길동'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60년대 막바지에 드디어 가짜 고은이 서울에도 나타났다." - "'진짜 고은', '가짜 고은'을 용서하다" 몇 토막

정규웅은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 5년이 지난 1970년 들머리께부터 문학기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때부터 김승옥과 김현 등 대학동기들과 자주 어울리며 문학 혹은 문단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이때 <동아일보> 문학기자였던 김병익은 "우리나라에 문학평론은 있으나 문학저널리즘은 없다"며 함께 문학저널리즘이란 땅을 다지자고 격려하기도 한다.

그는 이때 문인이 된 대학동기들로부터 시인 고은, 작가 박태순, 이문구, 김주연 등을 소개받아 자주 만난다. 이 가운데 김주연은 그에게 "문학기자는 신문기사만 쓰면 안 된다"라며 그를 부추겨 마침내 <문학과지성>에 글을 발표시켜 문인으로 이끈다. 그렇게 문학기자이자 문인이 된 그는 1975년 이른 봄부터 문인을 사칭하는 '가짜문인'들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재미난 이야기가 '가짜 고은'이다. 전국 곳곳을 돌며 '진짜 고은' 노릇을 하던 '가짜 고은'은 마침내 '진짜 고은'이 있는 서울까지 와서 여성들을 희롱하기 시작한다. 고은은 한 여성에게 이 사실을 듣고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가짜 고은'을 신고한 뒤 그 여성과 사복형사를 데리고 종로 '백궁다방'에 있던 '가짜 고은'을 붙잡는다.

하지만 '진짜 고은'은 구속된 '가짜 고은'으로부터 "고은이 부러워서, 고은처럼 되고 싶어서 고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하소연을 듣고 고발장을 찢는다. "고은의 이름으로 대학 영문과 졸업반이던 여성과 관계를 가진 것이 결혼으로 이어져 이제 자기가 감옥살이를 하게 되면 어머니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 '가짜 고은' 아내도 '남편을 새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눈물로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쓰레기통에서 건진 신춘문예 당선작 박범신 '여름의 잔해'

"예심이 끝나는 날 한밤중, 다른 기자들이 모두 퇴근 한 후 기자는 습관적으로 예심탈락 작품들이 쌓여있는 쓰레기통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정리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혹 눈에 띄는 버리기 아까운 작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정리가 거의 끝날 무렵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작품 하나가 마치 계시처럼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통에서 살려낸 '여름의 잔해'" 몇 토막

작가 박범신이 문학청년 때 처음으로 쓴 단편소설 '여름의 잔해'는 1973년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참으로 '기이한 운명'을 타고 태어난다. 이 소설을 쓸 때 박범신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라디오조차 들을 수 없었던" 전북 무주 덕유산 깊은 산골에 있는 산골마을 초등학교 선생이었다.
   
박범신은 그곳에서 꼬박 2년에 걸쳐 "밤마다 찾아드는 적막과 고독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시를 끼적였으나 짧은 글로는 밤을 지새우기가 어려워"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마무리한 소설이 80매 짜리 '이 음산한 빛의 잔해'였다. 그는 그 뒤 신춘문예철만 되면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소설을 써서 투고를 하지만 '미역국'만 잇따라 먹는다.

1972년 12월에는 갓 결혼한 아내가 '이 음산한 빛의 잔해'라는 원고를 들고 그에게 이 소설을 조금 손질해서 응모하라고 떠민다. 이미 신춘문예에 응모할 소설 몇 편을 썼던 그는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쳐 있었으나 자신을 알아주는 아내 뜻이 너무 고마워 제목을 '여름의 잔해'로 바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한다.

그때 예심은 3~4년 차 문학기자 대여섯 명이 "수천 편의 응모작을 '대충' 훑어보고 10퍼센트 이내의 예심통과 작품을 가려"냈다. 정규웅은 이때부터 언론사 신춘문예 예심과정에 볼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쓰레기통에서 그 해 신춘문예 당선작 '여름의 잔해'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책에는 고은과 박범신에 얽힌 웃지못할 이야기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안쓰러운 이야기들이 훨씬 더 많이 들어 있다. 술만 마시면 우는 '눈물의 시인' 박용래를 비롯해 '진실 같은 구라, 구라 같은 진실'을 푸는 황구라(황석영), 병상에 누워 입으로 소설을 쓴 유주현, 소설보다 더 극적인 최정희와 김동환이 나눈 사랑, 어두운 시대가 낳은 비극 김남주 등 숱한 문단이야기들이 지금도 우리시대 슬픈 자화상 혹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수런거리고 있다.  

1970년대 문학사이자 21세기 문인들 자화상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 정규웅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태어나 <중앙일보>에서 문화부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 등을 맡았다
▲ 정규웅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 정규웅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태어나 <중앙일보>에서 문화부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 등을 맡았다
ⓒ 정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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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초에 문학기자 일을 시작했다가 79년 2월 초 문화부 데스크를 맡으면서 그 일에서 물러났다. 햇수로는 10년이었지만 9년을 겨우 넘겼고, 나는 아직 30대였다... 10년 동안 그때의 다짐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것은 없지만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의욕적이었고 그래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음은 분명하다." - 에필로그,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몇 토막

시인 이근배는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은 글쓰기는 무엇이며 글 짓는 이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속 시원히 들려주는 저 70년대 전후의 문단사이며 장편서사시"라며 "매몰되어가는 폐광의 막장에 들어가서 보석 같은 글감을 캐내어 앞서 간 사람들의 뒷모습과 뒤에 올 사람들의 길을 일러준다"고 평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나는 나의 <한국문단사>가 씌어진 1970년대 초 이후에 더욱 활발해지고 착잡해진 문단 이야기를 누군가가 써주기를 바라왔는데, 그것이 나와 문학담당 기자 시절을 함께하며 같이 문단을 취재한 정규웅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이 무척 반갑다"며 "이 책은 어쩌면, 그래서 더욱 아쉬워질, 우리 문단에 대한 마지막 사사로운 증언이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이야기들은 귀하고, 귀를 풍성하게 할 덕담"이라고 추켜세웠다.

정규웅이 펴낸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은 지금도 1970년대 문학동네를 이끈 사람들이 겪었던 오래 묵은 장맛 같은 문학이야기와 잊지 못할 문인들 추억으로 가득하다. 마치 흑백필름을 다시 보는 것 같은 이 책 한 권을 읽으면 1970년대 우리 문학이 어떻게 흘러왔으며, 그 물꼬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까지 어떻게 흘러왔는지 한눈에 보인다. 이 책 한 권이 1970년대 문학사이자 21세기 문인들 자화상이라는 그 말이다.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 정규웅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태어나 <중앙일보>에서 문화부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 등을 맡았다. 그는 <중앙일보>에서 1970년대 10년 동안 문화부 문학기자로 일했고, 1980년대 초에는 약 2년에 걸쳐 계간문예지 <문예중앙> 편집책임을 맡았다. 1984년에서 1985년 사이에는 MBC-TV <독서토론> 사회를 맡았으며,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심의위원 등을 맡았다.

펴낸 책으로는 <휴게실의 문학> <오늘의 문학현장> <글동네 사람들> <글동네에서 생긴 일> <추리소설의 세계> <나혜석 평전>이 있다. 번역서로는 <애너벨 리>(에드거 앨런 포 시선집) <지하철 정거장에서>(에즈라 파운드 시선집) <케네디가의 여인들>(펄 벅 지음) 등이 있고, 추리소설 <그림자놀이> <피의 연대기> 등을 펴냈다.

덧붙이는 글 | <북포스>에도 보냅니다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정규웅 지음, 이가서(2010)


태그:#정규웅,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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