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시한폭탄의 초침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국사가 학생들로부터 공부하기 힘든 과목, 다른 과목에 비해 노력 대비 점수가 너무 안 나오는 기피 대상, 서울대에 갈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을 위한 엘리트 과목으로 시나브로 낙인찍힌 채 위기를 맞고 있다. 학생들의 선택을 받아야만 살아남는다는 새로운 교육과정 아래 고등학교에서 국사교육이 퇴출될 날도 그닥 멀지 않은 듯싶다.

 

그나마 국사 과목은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지지 덕에 나름 '행복한' 편이다. 현재대로라면 국영수를 제외하고 고등학교에서 생존이 보장된 과목은 사실상 없다. 컴퓨터 교과 등 수능에 출제되지 않는 과목은 이미 사라졌고, 기술·가정이나 음악, 미술 교과 등은 그저 주요 교과의 틈바구니에서 들러리로 교육과정에 얹혀 있을 뿐이다.

 

퇴출을 면한다 해도 수업 자체가 제대로 진행될 수 없는 과목으로, 수업과 자습 시간을 오가며 간신히 연명할 게 불 보듯 뻔하다. 이른바 '전인 교육'은 옛말이 된 지 오래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영수 외 대부분의 과목은 이름만 남은 채 빠른 속도로 형해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능 한 방으로 인생의 '일류'와 '삼류'가 결정되는 현실에서, 아이들더러 한가롭게 점수도 따기 힘든 국사를, 하물며 시험에도 출제되지 않는 '기타 과목'을 공부하라고 채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음악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고, 미술 시간에 수학 공부를 하는 아이들의 '선택'을 모른 채 물끄러미 지켜봐야만 하는 교사들은 괴롭다. 나아가 지금껏 가르쳐온 과목이 사라져 이른바 상치 교사로서 생뚱맞은 교과서를 들고 고개 푹 숙인 채 아이들 앞에 다시 서야 하는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름 행복한 '국사'의 미래도, 어둡기만 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국사 과목이라고 다를 바 없다. 얼마 안 가 그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지도 모른다. '국사는 우리의 혼이며 정신'이라고 아무리 읊어봐야 소용없다. 당장 입시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는 과목일 뿐인데,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 다음에야 기꺼이 공부하는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반드시 국사 교육은 행해져야 한다고 믿지만, 이런 현실을 무시하면 수능을 준비하는 아이들과 대화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줄곧 되뇌어 왔지만 언제부턴가 '국사를 배우는 건 당위'라는 말은 요즘 들어 하지 않는다. 그게 잘못된 표현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말로는 아이들을 도저히 설득해낼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신 요즘 수업에 들어가면 아이들에게 이런 비유를 부쩍 자주 한다. 정작 교과서 내용보다 더 강조하곤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말하자면 기성세대로서의 공부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지만, 퇴출을 앞둔 과목 교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이들 앞에서 애걸복걸 통사정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 고사를 인용하여 공부다운 공부가 되려면 쉬운 길로만 가려 해서는 안 된다고 재차 강조한다. 어린 아이가 어른이 돼서까지 만화책만 볼 수 없듯이, 지루하고 어려운 책도 반복해 읽어내는 끈기가 필요하며, 그를 통해 크나큰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 에둘러 말한다.

 

국사 과목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이른바 아이들의 '지적 지구력'이 부족해서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이어서 어쩐지 궁색하고 생뚱맞지만, '국사 공부는 당위'라며 을러대는 것보다 어쨌든 조금은 더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교사가 봐도, 어렵고 분량 많은 과목 '국사'

 

가르치는 교사의 눈으로 보더라도 고등학교에서 국사는 공부하기에 너무 분량이 많고, 내용이 어렵고 지루한 과목임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국사를 수능의 선택 교과로 돌린 정부의 방침과 서울대 지원자들에게만 필수로 묶어 사실상 다른 아이들은 선택하려야 할 수 없게 만든 구조가 큰 문제라는 것과는 별개로, 이참에 아이들이 국사를 기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우선,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챙겨서 암기하지 않으면 도저히 풀 수 없는 국사 시험 문제 탓이 크다. 어느 과목이 안 그럴까마는 아이들은 암기과목 하면 유독 국사를 먼저 떠올린다. 단순히 연도나 사건의 내용을 묻는 건 거의 없지만, 그 어떤 추론의 문제가 나와도 다루는 시대가 워낙 넓다보니 제시된 사료만 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게 태반이다. 교과서고 문제집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작정 욀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은 그래서 나오는 거다.

 

다섯 개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문제는 애초 국사라는 과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유형이다. 무슨 알파벳 노래하듯 왕조 계보표를 외우고, 사건의 이름 앞글자만 따로 정리해서 동요 곡에 실어 중얼거리는 것이 어찌 국사 공부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수능을 대비하기 위한 요령일 뿐, 그런 식으로 교육의 목적이랄 수 있는 투철한 역사의식이 길러질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교과서의 엄청난 분량도 중요한 기피 요인이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말미의 연표와 색인 부분을 빼도 374쪽이나 된다. 학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주당 두 시간 수업만으로 이 분량을 마쳐야 한다. 참고로 다른 인접 과목과 비교해보자면, 검인정 교과서인 사회와 경제는 각각 323쪽 분량을 주당 세 시간에, 263쪽 분량을 주당 두 시간에 끝내도록 돼 있다.

 

그러다 보니 수업시간만으로는 진도를 맞추기 어려워 교과서 내용을 온전히 다 다뤄주지도 못한 채 학년을 마치는 경우가 많고, 일부 학교에서는 고육지책이자 편법으로 교과서 대신 문제집을 수업 교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하소설 단숨에 읽은 아이도 졸게 만드는 국사책

 

한편, 어려운 한자로 이루어진 생소한 용어에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나열식 서술도 문제다. 적지 않은 고등학생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전혀 한자를 배우지 않은 채 진학했다. 물론 고등학교에서도 선택 과목이다 보니 아예 가르치지 않은 학교도 많다. 부모 등쌀에 어릴 적 '스펙'을 위해 무슨 사설 한자능력시험을 준비하지 않은 경우라면 자기 이름 석 자를 한자로 쓸 줄 아는 게 실력의 전부인 아이도 있다.

 

그런 아이들이 '과하마'와 '반어피'가 뭔지 어찌 알 것이며, '정계'와 '계백료서'라는 의미를 어찌 파악할 수 있을까. 수업 시간 '공음전'이 토지가 아니라 동전 이름이며, '방군수포'가 총포의 일종이라고 말하는 아이를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보다 영어 단어 외우는 게 차라리 더 쉽다고 하고, 한자로 된 용어들을 모조리 외우지 않으면 내용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한자의 뜻은커녕 형태조차 쓰지 못하고 그림 그리듯 하는 아이들에게 국사 교과서는 한자 교과서보다 더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매 문장 들어있는 어려운 용어 탓일까. 아이들은 한 단원은커녕 한 단락, 한 문장 제대로 이해하며 읽기도 버거워한다. 문장이 길지 않고 중간 중간 쉼표로 나뉘어져 있어 읽는 데 힘이 들지는 않지만, 역사적 사실을 건조하게 기록한 나열식 서술이어서 아이들은 채 몇 쪽 넘기지 못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만다.

 

교과서를 역사 소설책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지만, 열 권짜리 대하소설을 단숨에 읽어낸 아이조차 국사 교과서만 보면 졸음이 쏟아진다고 하소연할 지경이다. 모름지기 전국에 한 권뿐인 교과서일진대 우리나라의 내로라는 전문가들이 저술한 교재임에 틀림없지만, 그들이 만약 학생 입장이라면 '아니 졸지는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렇다고 흥미를 끌 만한 것을 수업 때 교과서 대신 교재로 쓸 수도 없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진도와 상관없이 내용을 건너뛸 수도 없다. 수능은 물론, 1년에 두 번씩 치러지는 전국 단위 일제고사 등의 시험을 모른 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사가 퇴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네요"

 

이러한 상황에서 국사를 수능 선택 과목으로 돌린 정부의 방침은 과목 퇴출의 '결정타'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 심지어 초등학교의 교육과정조차 수능이 좌지우지하는 현실에서, 수능에서 버림받은 과목은 더 이상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필수로 묶어놔도 빈틈을 찾으려는 게 수험생의 생리인데 그렇잖아도 어렵다고 기피하는 국사 같은 과목임에랴.

 

글을 마무리하려니 곁에 있던 아내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툭 던진다.

 

"다른 과목도 아닌 국사가 고등학교에서 퇴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요."


태그:#수능개편안, #국사 선택과목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