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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기행 다섯째 날(8월 16일)은 연길(옌지) 수상시장 새벽 장보기를 시작으로 시인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 15만 엔 탈취 기념비, 3·13 희생자 묘역, 두만강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문(투먼)시와 연길감옥 기념비에 들렀다가 야간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이동했다.

도문공원에 있는 정몽호 시인의 <접어둔 날>이 새겨진 시비. 뒷면에는 도문시 문련과 작가협회에서 소개한 정몽호의 약력이 새겨 있었습니다.
 도문공원에 있는 정몽호 시인의 <접어둔 날>이 새겨진 시비. 뒷면에는 도문시 문련과 작가협회에서 소개한 정몽호의 약력이 새겨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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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저명한 시인 정몽호(1935-2005)의 시비가 있는 도문시 두만강 공원에서 수박을 잘라 먹으며 쉬다가 연길을 향해 출발한 시간은 오후 5시 35분, 북녘 땅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던 마음이 남아서인지 버스에서도 인적이 드문 남양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버스가 달리는 방향에 따라 마을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콩밭과 옥수수밭이 초원처럼 펼쳐지더니 어둠이 찾아들기 시작하자 구릉인지 산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능선이 그림처럼 이어지면서 진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도문에서 연길로 향하는 버스에서 바라본 저녁노을. 만주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도문에서 연길로 향하는 버스에서 바라본 저녁노을. 만주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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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붉게 물드는 하늘을 달리는 버스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차창으로 보이는 불타는 듯한 노을은 환상적이었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가슴에 담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까 12시간 가까운 하루 일정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중간에 4차선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통행료 수납은 직원이 직접 받고 있었다. 70년대 우리나라 지방의 작은 톨게이트 모습을 보는 듯했다. 오후 6시 45분 연길에 도착해서 유명한 단고기 국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았으며 담백하고 개운했다.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에서

연길 기차역 근처에 있는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 처음 듣는 감옥에서의 항일투쟁사는 일행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연길 기차역 근처에 있는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 처음 듣는 감옥에서의 항일투쟁사는 일행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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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잠시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에 들렀다. 독립투사들이 고문당하고 피살되었던 감옥이 지금은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박영희 시인은 항일 독립지사들의 연길감옥 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24년 일본이 지은 연길감옥은 1935년 동북아에서 처음으로 파옥됩니다. 독립투사들의 손에 의해서였지요. 당시 감옥에 갇혔던 독립투사 17명이 결사대를 조직해서 수백 명의 항일투사를 해방시켰는데, 항일전쟁 시기 만주의 많은 감옥투쟁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한 투쟁이었습니다. 2차 탈옥에 실패한 '리진'이 사형장으로 가면서 부른 노래가 감옥 안에서 읊조리고, 읊조리고 한 것이 퍼지면서 '연길 감옥가'가 되었지요. 가사를 읊어보겠습니다."

바람 세찬 남북 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 기에 폭탄 차고 싸우던 몸이/ 연길감옥 갇힌 뒤에 몸은 여위어도/ 혁명으로 끓는 피야 어찌 식으랴.

노래 가사가 짧으면서도 힘이 넘쳤다. 연길감옥 투쟁은 1935년 6월 8일, 감옥에 갇혀 있던 항일독립투사들이 대부분 간수가 단오절운동회구경을 간 틈을 타서 일본지도관 히가시 마코도와 감옥장 하승림, 간수 몇 명을 죽인 뒤 총을 탈취해 감옥 문을 부수고 동지들과 함께 탈옥했던 사건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연길을 떠나다

우리의 명절 때처럼 붐비는 연길역.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중국의 일반승객들은 출발시각 한 시간 전까지 역에 나가서 기다려야 한답니다.
 우리의 명절 때처럼 붐비는 연길역.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중국의 일반승객들은 출발시각 한 시간 전까지 역에 나가서 기다려야 한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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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투먼)-하얼빈행 기차. 같은 코스를 하루에 많아야 2회 아니면 1회씩 오가기 때문에 항상 붐빈다고 합니다.
 도문(투먼)-하얼빈행 기차. 같은 코스를 하루에 많아야 2회 아니면 1회씩 오가기 때문에 항상 붐빈다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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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행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연길 기차역으로 향했다. 좌석은 첫날처럼 6인실 침대칸(잉워)이었는데, 기차를 타는 과정이 심양(옌지)역만큼이나 복잡했다. 개찰구를 그냥 통과하는 우리와 달리 투시기로 일일이 짐 검사를 하기 때문에 더욱 붐비는 것 같았다.

한여름이고 사람이 많아서인지 대기실은 퀴퀴한 땀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도 3박 4일 동안 숙식처였던 연길을 떠나려니까 아쉬웠다. 그동안 친절하게 안내해준 가이드와 헤어지려니까 서운했는데, 또 만나자며 역까지 배웅을 나와 주어 고마웠다.

도문에서 하얼빈 가는 기차였는데 연길에서 오후 8시 50분에 출발했다. 개찰을 마치고 차에 올라서도 복잡하더니 30분쯤 지나니까 안정이 되었다. 학생인 은찬이, 다인이, 한민이, 나영이, 지수는 진즉 자리를 차지하고 게임을 즐겼다.

기차도 힘이 드는지 한참 동안을 느리게 달렸다. 창문이 올라가지 않아 승무원에게 얘기했더니 인상을 푹 쓰면서 뭐라고 하는데 자기는 모르겠다는 투였다. 차량을 너무 많이 달았는지, 무슨 물체가 가로막고 있는지 기차가 자꾸 경적을 울려댔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들녘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규칙적인 '덜커덩' 소리는 가슴에 담긴 아련한 추억의 앨범을 뒤적이게 했다. 박영희 시인이 이름 모르는 과일을 나누어주었다. 성게처럼 뾰쪽뾰쪽하고 크기는 살구만 했는데, 물이 많아서 시원했다.

만주에서 두 번째 타는 장거리 기차인데 피곤하기는커녕 초등학생 때 수학여행 가는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일행들이 소주 한잔하게 오라고 해서 자리를 함께했는데 오후 10시가 되니까 어김없이 불이 나가버려 암흑세계가 되었다. 그래도 캄캄한 열차에서 술을 권하며 대화를 나누려니까 색다른 감흥이 일었다.   

자꾸 울려대는 경적소리는 시끄럽기보다 술자리 분위기를 더욱 진하게 해주었고, 사랑하는 애인의 목소리처럼 정겹게 다가왔다. 무드에 취해 술을 너무 마시면 무리일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달린 간이 의자에 앉아 어두운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가끔 불빛이 반짝이는 시골 농가가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농가에 들어가 누가 사는지, 무엇을 해먹고 사는지, 가능하다면 밥도 한 끼 얻어먹으면서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넓디넓은 대지를 지겹도록 걷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중국 심야 열차 화장실. 깨끗하게 치우고 촬영한 사진입니다. 가이드 안내에 의하면 만주에는 호텔과 아파트 외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답니다.
 중국 심야 열차 화장실. 깨끗하게 치우고 촬영한 사진입니다. 가이드 안내에 의하면 만주에는 호텔과 아파트 외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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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판매원. 사회주의 국가여서 그런지 서비스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표정에서도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음료수 판매원. 사회주의 국가여서 그런지 서비스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표정에서도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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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행 열차도 역에 도착하기 5분 전쯤 승무원이 화장실 문을 잠갔다가 기차가 출발하면 열어놓기를 반복했다. 급행열차에게 길을 비켜주느라 연착하면 30분 넘게 닫혀 있을 때도 있었는데, 기차 화장실 관리 하나에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자와 간단한 음료수를 파는 장수들이 좁은 통로를 오가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이나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당연히 오가는 길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니까 판매원들이 얄밉게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더니 70년대 장항선 완행열차 변기와 쌍둥이처럼 닮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겨우내 모아놓은 인분과 소똥을 이듬해 거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채소와 곡식을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을 것 같았다.

날이 밝기 시작하니까 차창 밖으로 간혹 산등성이가 보이기도 하고, 멀리 지평선이 그어지는 벌판에는 어김없이 옥수수밭이 펼쳐졌다. 어쩌다 안개 자욱한 백양나무 숲도 보였다. 시골집 굴뚝들이 대부분 지붕 가운데에 세워져 있어, 한국에서는 못 보던 이색적인 농촌풍경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고 있었다.

하얼빈역 플랫폼 역사의 현장에서

하얼빈 역에는 이튿날(8월 17일) 오전 7시 45분에 도착했다. 11시간 정도 소요되었고, 연길에서 약 700km 거리라니까 시속 60km 정도로 달렸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도 사람들에게서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필자 역시 몸이 가벼웠고, 오히려 기차여행을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아쉬움이 남았다.

하얼빈역 플랫폼 역사의 현장.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순간을 상상하니까 가슴이 짜릿했습니다. 지금까지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는 일본을 다시 생각하게 하더군요.
 하얼빈역 플랫폼 역사의 현장.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순간을 상상하니까 가슴이 짜릿했습니다. 지금까지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는 일본을 다시 생각하게 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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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지나가는데 박영희 시인이 안중근 의사가 권총으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하얼빈 총영사 카와카미, 궁내 대신 모리 등 일제 첨병들에게 중상을 입혔던 역사적인 현장을 알려주었다.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쏘았던 자리와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던 자리는 삼각형 무늬 대리석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일행 한 사람을 세워놓고 발로 거리를 재보니까 보통걸음으로 아홉 걸음쯤 되었다. 일행은 역사의 현장에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1909년 10월 9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군대 사열을 받으려고 기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순간 안중근 의사가 세 발의 총탄을 저격하고 러시아어로 세 번 외쳤다는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소리가 플랫폼 천정을 맴도는 듯했다.

'안중근'이 주장하는 '이토'의 죄목 15가지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곧바로 러시아 공안들에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함께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검찰관이나 재판관들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 15가지를 당당히 밝혔다.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살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 조약과 7 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 간이 멀어지므로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스럽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중국 관련 내용은 현지 가이드와 박영희 시인의 설명, ‘2010만주기행’ 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태그:#안중근, #연길감옥, #하얼빈,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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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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