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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화)

문내면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삼각뿔 모양의 주탑이 우뚝 서 있는 진도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보기에도 꽤 웅장한 모습이다. 진도대교는 아름다운 야경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는 그 아래를 지나가는 좁은 해협인 울돌목 때문에 더 유명하다,

진도대교 위에 서 본 사람이라면, 그 아래를 지나가는 조류의 급한 물살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바닷가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빠르고 거칠게 흘러가는 물살은 본 적이 없다. 정상이 아니다 싶을 정도다. 흰 거품을 물고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물살이 한눈에 보기에도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울돌목에서 오히려 잔잔하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물살을 보게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떠올리다

정유재란 당시 이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격퇴함으로써 다 쓰러져가는 전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되돌아오기 전까지, 원균의 지휘하에 있던 조선군은 거듭되는 패배로 지리멸렬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후에 역사가들이 이 전투를 명량대첩이라 명명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단 13척의 전함으로 133척을 몰고 온 왜군의 대함대를 무찔렀다. 해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였다. 물론 울돌목이라는 지형지물을 지혜롭게 이용한 결과다. 이곳에서 매년 10월, 명량대첩을 재현하고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갯벌 너머로 보이는 진도대교
 갯벌 너머로 보이는 진도대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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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 진도대교 아래를 빠르게 흘러가는 물살
 울돌목, 진도대교 아래를 빠르게 흘러가는 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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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을 내려다보며 진도대교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울돌목을 위엄 있게 내려다보고 있는 충무공 승정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에서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간명하게 정리해 놓은 글을 읽는다. 온갖 차별과 모함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꿋꿋이 걸어간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려 놓았다.

참 모질고 험한 길을 가셨다. 그런데도 전혀 굴함이 없었다. 그처럼 강한 의지와 정신이 있었기에 불멸의 역사를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울돌목의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남다르다. 나도 내가 가야 할 길을 꿋꿋이 가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정말 쉽지 않다.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끝없이 흔들린다. 한없이 회의한다. 두 길을 놓고 어느 길이 좀 더 편하고 짧은 길인지를 견주느라 한참 머리를 굴린다. 우스운 일이다. 나름 옳은 판단을 했다고 생각해 놓고도, 나중에는 버려진 다른 길을 가지 않은 걸 후회하기 일쑤니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을 내려다보고 있기 망정이지, 만약에 내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면 감히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한눈팔고 있을 때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승정공원을 나오자마자 바로 오른쪽 해안 길로 접어든다. 처음부터 너무 겁먹게 만들지 않으려는 심산인지 해안길이 비교적 부드럽게 넘어간다. 해안길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메밀꽃축제 현장이 나타난다. 축제 기간은 지났지만, 메밀꽃은 여전히 만개한 상태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들판을 하얗게 덮고 있다.

충무공 승정공원 이순신 장군 동상. 명량대첩 축제가 끝난 지 얼마 안 돼 하늘에 애드벌룬이 떠 있다.
 충무공 승정공원 이순신 장군 동상. 명량대첩 축제가 끝난 지 얼마 안 돼 하늘에 애드벌룬이 떠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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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축제 현장
 메밀꽃 축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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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진도 땅에 들어선 낯선 방문객을 맞이하는 환영인사로 이보다 더 화사하고 아름다울 수 없다. 하지만 환영인사는 여기까지가 끝이다. 이후 끝없이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군내지구방조제 위로 잠시 곧고 평탄한 길을 달리다, 청룡마을 안길을 지나 쉬미항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면서 다시 고행이 시작된다.

단순히 비포장 길인 줄만 알았는데, 자갈길에 바닷가 산허리를 타고 넘는 산길이다. 신월리의 연대산을 바닷가 쪽으로 돌아가는 절벽길이다. 처음에는 경사가 낮아 조금만 참고 올라가면 바로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산허리를 하나 돌아 넘어갈 때마다 또 다른 산줄기 중턱으로 살짝 꼬리를 감추고 사라지는 길이 보인다.

나중에는 약이 바짝 오른다. 자전거 아래에서는 타이어에 밟힌 자갈이 탕탕 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러다 타이어가 찢어지는 건 아닌지 또 걱정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비 타이어라도 가져올 걸 후회하지만 소용이 없다. 극히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는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가려니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도무지 길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얼마나 더 가야 정점에 도달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계속 자갈이 튀는 길을 가는 게 너무 불안하다.

자전거로 산을 타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다. 그 정도면 '양반'이라고 너털웃음을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산에 올라가 본 적도 없고, 산에 올라갈 일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로선 정말이지 적응하기 힘든 길이다. 증도에서도 이와 똑같은 길을 올라갔다 내려온 적이 있다. 그때도 산을 내려올 때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길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이 모두 내가 처음부터 해안선 여행을 너무 만만하게 본 탓이다. 이순신 장군이 갔던 '모진 길'에 비하면 이건 진짜 '점잖은 길'이다. '양반'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 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발 아래에 깔린 자갈에 신경을 쓰느라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진도의 바닷가 마을 풍경
 진도의 바닷가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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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내려오면 바로 쉬미항이다. 그렇게 해안가 절벽길을 내려오고 나서 비로소 진도 전체가 산과 산으로 이어진 길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다. 진도에는 유독 산이 많다. 그 산들이 주로 해안에 몰려 있다. 당연히 해안길을 가려면 그 산들을 수시로 오르내려야 한다.

진도를 일주하려면 미리 그 점을 각오하는 게 좋다. 참고로 <우리나라 해안여행>을 저술한 사람들은 이 길의 난이도를 '하'라고 평가했다. 어떤 기준에서 그런 평가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평가라는 게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덧붙인다.

기이한 섬들이 여기 다 몰려 있네

가는 길이 힘들다고 다 피해 갈 수는 없다. 진도에서 꼭 들러 가야 할 길 중에 하나가 '세방낙조로'이다. 진도 서쪽의 세방마을을 지나가는 길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이 된 바 있다. 앞서 지나온 영광군의 백수해안도로처럼 이 길 역시 산허리 절벽 위를 타고 넘는다. 이 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위의 섬들이 진풍경이다.

섬 한가운데 터널이라도 뚫어 놓은 것 같은 혈도, 섬 정상에 비석이라도 꽂아 놓은 것 같은 주지도, 섬 위로 곧추선 바위들이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발가락섬이라는 별칭을 달고 있는 양덕도, 사자 한 마리가 바다 위에 엎드리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광대도 등,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섬들이 진도 서쪽 바다에 몰려 있다.

세방낙조로. 절벽길.
 세방낙조로. 절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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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주지도.
 오른쪽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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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바다 위에 안개가 덮여 섬들의 윤곽이 그냥 희미해 보일 뿐이다. 아쉽다. 맑은 날이었으면, 보기 드문 장관을 드러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와중에도 주지도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신기함을 넘어서 신비한 느낌을 주는 섬이다. 무언가 웅장한 전설을 간직했을 법하다. 없으면 하나 만들어 보고 싶다. 그 섬들 너머로 지는 해가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세방낙조로에서 내려오는 길에 급치산해양경관공원 푯말을 보게 된다. 그 앞에서 또 갈등한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이 아주 가파른 오르막길이기 때문이다. 해안선 여행에서 해양경관공원을 그냥 지나치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싶어 모진 마음을 먹고 언덕을 오른다. 자전거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올라간다.

그냥 걸어 오르는 데도 땀이 흐른다. 해발 221미터, 결코 높은 산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산길을 자전거를 끌고 900m가량 올라가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전망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데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다. 얼마나 호젓한 길인지 도로 위에서 까치들이 떼로 앉아 장난질을 치고 있다. 전망대에는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전망대 끝까지 올라간다. 전망대 안에 뭘 하던 물건들인지 알 수 없는 초등학생용 책상과 나무 평상이 널려 있다. 참 묘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물건들이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이곳까지 와야 하는지 회의가 들게 만든다.

전망대 위로 바람이 몹시 세게 분다. 바람에 날아갈까 난간에 기대서서는 급하게 사진 몇 장을 찍고 내려온다. 그 고생 끝에 촬영을 마쳤는데 제대로 찍힌 사진이 하나도 없다. 급치산해양경관공원, 사람들에게 잊혀 가는 관광지가 보여주는 쓸쓸하고 삭막한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게 해주는 곳이다.

서망항. 배에서 자동차로 옮겨 싣고 있는 장어.
 서망항. 배에서 자동차로 옮겨 싣고 있는 장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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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치산 전망대
 급치산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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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치산을 내려와 해가 질 무렵, 남도석성에 도착한다. 남도석성은 삼별초가 쌓은 성으로 몽골군과 전쟁을 치른 곳이다. 이곳에서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원형이 비교적 잘 보전이 되어 있어 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재밌는 게 성 안에 일반 주택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는 거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데 몰려 살게 되면, 언젠가 성을 허물고 나오기 마련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곳 사람들이 그동안 삼별초를 잊힌 과거로 덮어두지 않고 오랜 세월 경외심을 품고 살아온 것을 알 수 있다.

진도에 삼별초와 관련한 유적지가 여러 군데 있다. 모두 진도 사람들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오늘 일정은 이곳에서 마무리한다. 오늘 달린 거리는 79km, 총 누적거리는 1984km다.

남도석성
 남도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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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울돌목, #이순신, #명량대첩, #진도대교, #세방낙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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