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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럽여행을 그 동안 한 번도 하지 못 했었다. 직장도 퇴직하고 해서 유럽여행을 막연히 계획하고 있었는데 지방신문기자를 하는 제수씨가 프랑스의 생태마을 취재를 하러 프랑스를 간다는 것이다. 나도 함께 끼워 달라고 해서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10일간을 프랑스 여행을 하였다. 우리 일행은 나주에서 지방신문 기자를 하는 제수씨와 공무원을 하다가 그만두고 고향에서 정원을 가꾸며 그림을 그린다는 박재후 화백 부녀, 그리고 나주시 공무원 등으로 총 5명이었다.

 

나는 그 동안 해외여행을 5번 갔는데 전부 아시아 쪽이었다. 일본, 몽골, 중국 등이다. 그런데 아시아 여행은 별로 여행의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자연환경이나 길거리가 우리와는 조금 달라 여행의 기분을 느끼기는 했지만은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호텔의 종업원에서부터 우리와 피부색이 같은 사람들을 마주친다. 길거리에도 우리와 같은 피부색의 사람들이 오간다. 이와는 다른 완전한 낮선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우리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백인들의 숲속에 푹 빠져 보고 싶었다.

 

10월 2일 프랑스 시간이다. 프랑스 시간은 우리보다 7시간이 느렸다. 우리는 프랑스 현지에서 안내를 해주기로 했던 '고정희'라는 분을 만났다. 그 분은 프랑스 분과 결혼을 해서 25년간을 파리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 분이 안내를 해서 우리 일행은 파리의 상징인 개선문을 보기 위하여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샹젤리제거리는 우리나라로 말하면 서울의 종로거리, 광주의 금남로 거리쯤 될 듯싶다.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정말 내 소원대로 낯선 백인들의 숲속에 푹 빠져 버린 것이다. 파리의 건물들은 전부 회색빛의 5층쯤되는 건물들이다. 밑에는 상가며 위쪽은 아파트인 주상복합 건물이란다. 이런 건물들이 딱 하나로 놓여 있으면 볼거리일 텐데 전부 똑같은 건물들이니 아름답다기보다는 그냥 눈이 질리기만 했다.

 

프랑스에도 거지는 있었다. 피부색이 있어서 정통 프랑스인은 아닌 듯싶었다. 보자기로 머리를 맨 여인이 우리의 가이드 고 선생에게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고 선생에게 물었더니 정통 프랑스인은 아니고 루마니아의 난민들이란다. 한국에서 만나는 거지는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세계 예술의 서울, 파리에서 만나는 거지는 또한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는 다문화사회였다. 길거리에 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오가며 상점에도 판매원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많았다. 환경미화원도 아프리카 사람들이다. 3D 업종은 주로 이민자들이 맡고 있었다. 프랑스도 출산율이 낮아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는데 이슬람문화권의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으며 이들은 출산율도 높아서 유럽이 이슬람화되어가는 것이 유럽 전체의 문제라고 했다. 여행 후에 프랑스 의회에서 이슬람 여자들이 머리에 쓰고 다니는 히잡을 착용할 수 없다는 법안을 통과 시켰는데 이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파리의 에펠탑에 폭발물을 장치했다고 알려와 파리에서 소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가 옆 극장의 간판에서 'poetry'란 글을 보고 놀랐다. 간판에는 우리의 국민여배우 윤정희씨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poetry' 즉, <시>는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이자 우리의 국민여배우였던 윤정희씨가 주연한 영화이다.

 

그래서 나도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우연히 오늘 파리의 샹젤리제 길에서 간판을 본 것이다. 조금 걸어가니 또 간판에 우리 영화배우 이정재가 보인다. 간판의 글이 'house maid', 즉 <하녀>였다.  파리에서 우리나라 영화의 위상이 꽤 높나 보다. 파리에서 우리 영화배우들의 모습만 봐도 반갑다.

 

그때야 나는 우리의 국민여배우였던 윤정희씨가 파리에 사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를 안내하시는 고 선생님께 윤정희씨의 근황을 물었다. 안내자 고 선생님이 교민회에서 몇 번 보셨다고 했다. 유명인이라서 괜히 입소문 날까봐 튀는 행동은 안하시고 조용하게 계셔서 인사만 드렸다는 것이다.

 

그동안 프랑스 음식에 질렸다. 빵조가리, 우리나라에서 먹어본 비프스테이크 같은 요리들을 몇 번 먹어 보니 우리의 된장국, 김치찌개 생각이 간절했다. 외국에 나가면 가장 어려운 게 음식이다. 우리와 다르지만은 아시아 쪽은 그래도 밥은 먹을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 와서 밥은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내자인 고 선생에게 저녁은 한국식당에 한 번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파리에서 제일 음식 맛이 좋다는 '다정'이라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오니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가슴 깊숙이 스며왔다. 그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된장국 냄새는 바로 우리 고향의 맛이며 어머니의 손맛이다.

 

우리 일행은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을 시켜 오랜만에 김치 맛, 된장국 맛을 보니 살겠다는 것이다. 그 동안 술도 맛도 모르는 와인만 마셨는데 모처럼 우리의 참이슬을 시켜서 한 잔씩 나눠 마시면서 우리 일행은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때 안내자인 고 선생께서 내 뒤 좌석에 윤정희씨가 남편인 백건우씨와 식사를 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놀라서 뒤를 돌아보려 했더니 고 선생께서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 분은 남들의 시선을 싫어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어나 화장실 가는 척하며 그 쪽을 보았더니 정말 윤정희씨와 백건우씨가 어느 부부 같이 식사를 하시면서 재밌게 말씀을 나누시고 계셨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는데 이러다 그 분이 일어나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초초한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 우리의 어린 시절의 국민 누나였던 윤정희 선생님을 뵈었는데 하다못해 인사라도 하고 가야 평생 후회가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만 일어나서 식당 밖으로 나갔다. 식당 밖 거리에는 마로니에 나뭇잎이 떨어지며 가을의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 거기서 윤정희 선생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시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윤정희씨가 식사를 마치고 백건우씨와 또 다른 부부와 나오시고 계셨다. 나오셔서 다른 부부와 즐겁게 작별인사를 하시고 헤어지려고 하셨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윤정희씨께 인사를 드렸다. 혹시라도 인사를 안 받아주시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쑥스럽지만 체면을 무릅쓰고 고개를 숙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윤정희씨께서 웃으시면서 인사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닌가. 마음속으로 '아이구, 백골이 난망이로소이다'를 외쳤다. 얼른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무슨 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일전에 쟈니윤쇼에서 뵈었습니다."

"아 그래요."

 

윤정희씨가 악수를 해 주셨다. 백건우 선생님은 그런 나를 빙그레 웃으시면서 바라보고 계셨다. 악수를 해 주시고 뒤돌아서 부부는 마로니에 가로수의 낙엽 떨어진 길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셨다.

 

마음속으로 '야호'를 외쳤다. 파리에 와서 한국의 국민배우 윤정희씨와 악수까지 한 것이다.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윤정희씨와 악수를 했다고 일행들에게 자랑을 했더니 모두들 나더러 대단하다고 앞으로 손을 씻지 말라고 농담까지 했다.

 

사실 나는 파리에 와서 윤정희씨와 처음 만난 것이 너무 기뻤다. 가난했던 어린 중고생 시절, 윤정희씨는 시골에서 상경해 도시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우리의 누나들을 대변하기도 했고 어쩔 때는 가을날 코스모스 같은 청순한  여선생님을 대변하는 등 우리 어린 시절의 우상이었다.

 

윤정희씨가 항상 우리 어린 시절의 그 모습으로 계실 것만 같았는데 그 분도 많이 세월의 흔적이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가는 세월을 어쩌랴. 나는 10일 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윤정희 선생님의 <시>를 선택하여 보았다. 60대, 외로이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할머니 윤정희씨의 연기가 우리 외로운 서민 할머니들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었다. 역시 윤정희씨는 우리시대 여성의 다양한 삶을 대변했던 국민여배우였다.


태그:#파리, #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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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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