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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홋카이도(北海道) 노보리베쓰(登別). 하리다시(張出) 전망대에 오르니 지고쿠다니(地獄谷)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마치 지옥인 듯 황토색 속살을 드러낸 계곡에 뿌연 유황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와 나의 가족은 작은 봉우리를 넘어가는 산길을 따라 오유누마(大湯沼) 호수로 가기로 했다. 오유누마 호수는 화산이 만들어놓은 이국적인 온천호수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공기 맑은 산속의 숲길은 잘 닦여 있었다. 아늑한 산길 곳곳에는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걸리는 시간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표지판이 잘 설치되어 있어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어떤 표지판에는 이 산에 살고 있는 새, 곤충, 식물들이 그려져 있다.

노보리베쓰의 산 속에 살고 있는 새들은 부엉이, 솔개, 때까치, 굴뚝새, 동고비, 어치다. 나는 이들이 산길이 아닌 숲속에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새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갖고 산길을 걸었다. 나의 가족은 사람이 없는 산길을 호젓하게 걷는 즐거움을 누렸다.

 

계곡이 아닌 산길이지만 계곡에서 날아온 유황 수증기 때문인지 길 곳곳에는 진녹색의 이끼가 잔뜩 끼여 있다. 산책로에는 하얀 자작나무가 한가로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잘려나간 자작나무 기둥 위에서는 버섯들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숲 구경을 좋아하는 신영이가 카메라를 빼들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남기고 있다.

 

산길 가에 빨간 도깨비가 그려진 퀴즈 표지판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오유누마 호수에 관련된 퀴즈인데 그 정답은 다음번 퀴즈 표지판에 있다는 식이다. 한 표지판이 오유누마 호수 주변 길이를 묻고 다음 표지판에는 그 정답이 1km라고 적혀있다. 산길을 가다보니 도깨비 퀴즈판이 길목 곳곳에 있다. 나는 빨간 도깨비가 내는 퀴즈에 대한 정답을 찍어가며 다음 표지판에서 정답을 확인해 갔다. 단순한 표지판이 산길의 벗이 되고 있었다.

 

이 깊은 산 속 산책로 옆에는 작은 보살 석상이 있다. 이 작은 석상들은 일본에 깊게 퍼진 불교신앙의 한 단면이다. 이 보살은 바로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지옥세계의 구원자, 지장보살(地藏菩薩)이다. 이 보살의 턱에 어린 아이의 음식닦이 수건 같은 빨간색 헝겊이 있는 것은 이 지장보살이 특히 영유아의 영혼을 돌봐주기 때문이다. 많은 영혼들이 유황 연기 자욱하고 온천수가 용출하는 이 산의 신비스러움에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부글부글 끓으며 '지구의 소리' 뱉어내는 오쿠노유

 

언덕에 오르자, 아! 오유누마 전망대가 갑자기 눈 앞에 드러났다. 살아있는 화산, 지리 시간에 배웠던 활화산이 나타났다. 오유누마 위쪽의 히요리야마(日和山)에서는 화산의 증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대 장관 앞에서 세상사 잡념이 사라지고 있었다. 짧은 산길이었지만 올라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온천수가 부글거리는 호수를 향해 산길을 내려왔다. 오유누마(大湯沼) 호수 옆에는 오쿠노유(奥の湯) 호수가 있고 호수 바로 앞에 오쿠노유 전망대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 여행의 놀라움은 오쿠노유에 있었다. 오쿠노유는 오유누마에 비해 크기는 더 작지만 아주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화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늪과 같은 호수의 물이 끊임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고 살아 움직이는 지구의 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마치 회색의 죽이 호수에 퍼져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온천수가 부글거리는 소리는 마치 "여기가 지옥이다. 이리 가까이 와 봐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내 몸이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 유황의 호수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쉬지 않고 끓고 있었다.

 

그러다가 온천의 증기가 바람에 날려 갑자기 나를 덮쳤다. 나는 일말의 공포를 느끼며 뒷걸음질을 쳤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까마귀 소리가 지옥의 호수 주변을 울리고 있었다. 나는 괴기영화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오쿠노유와 오유누마 사이에는 오쿠노유 전망대가 있다. 나는 전망대 위에 서서 오유누마 뒤에 버티고 서 있는 히요리야마(日和山)를 올려다 보았다. 산 정상에서도 화산의 유황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뜨거운 화산의 수증기로 인하여 산 이곳저곳은 마치 머리가 벗겨진 듯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구름이 산의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산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화산활동이었다. 오쿠노유와 오유누마는 히요리야마가 폭발하면서 생긴 화산구의 자리에 온천수가 용출한 곳이었다. 화산이 폭발했던 백두산의 화구에 칼데라 호수인 천지가 고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국적인 일본의 활화산... 오묘한 흑회색 띠고 있는 온천수

 

오쿠노유와 오유누마가 신기한 것은 화구에 고여 있는 물이 펄펄 끓고 수증기가 분출되는 온천수라는 것이다. 이 온천호수에서 온천을 즐기면 좋겠지만 물의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도저히 몸을 담글 수는 없다. 호수의 바닥에서 용출하는 온천수의 온도가 약 130℃이고 호수 표면 온천수의 온도도 50℃에 이른다. 우리나라 목욕탕의 열탕 온도보다 10℃ 이상 뜨거운 것이다.

 

온천호수에는 하얀 수증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다. 그래서 호수의 표면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온천호수라고 하지만 온천호수의 표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늪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살아있는 화산의 화산재를 포함한 온천수가 오묘한 흑회색을 띠고 있고 호수의 주변에는 명약으로 사용되는 진흙 침전물이 쌓여 있다.

 

활화산과 곳곳에 자리 잡은 온천은 이국적인 일본의 모습을 맘껏 보여준다. 나는 활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유황연기의 냄새를 맡으며 작은 벤치에 앉았다. 노보리베츠 마을에서도 한참 산을 올라온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나의 가족을 둘러싼 신기한 절경은 지구 상에서도 흔치 않은 신비한 대자연의 절경이다.

 

화산호수 오유누마는 주위 길이가 1km인 꽤 큰 호수로서 노보리베츠에서 가장 큰 온천호수다. 모양은 마치 표주박이 엎어져 있는 것 같이 생겼다. 화구에 생긴 호수들은 대부분 수심이 깊은데 이 오유누마도 수심이 무려 22m나 된다. 그리고 높은 산 위의 호수 주변을 일본의 천연기념물로 등록된 원시림이 둘러싸고 있다. 끊임없이 분출하는 유황연기 속에서도 키 작은 나무들이 잘 자라나서 진녹색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놀랍기만 하다.

 

호수 안내판엔 '호수에 들어가면 묻혀 죽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유누마 호수를 설명하는 목재 안내판이다. 호수 안에 들어가면 '埋ります', 즉 '묻혀 죽는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호수의 물이 뜨거우니 호수 안에 들어가지 마십시오'라고 되어 있을 텐데, 이 안내판은 호수에 들어가면 뜨거운 호수물에 쪄 죽어서 호수 안에 묻힐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유황찜이 되어 죽으니 호수 안에 들어갈 생각은 말라는 뜻이다. 터미네이터가 용광로 안에 빠져 죽듯이 이곳에 빠지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져서 죽는다는 협박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아빠! 저 한자가 무슨 뜻이지?"

 

"호수에 들어가면 묻혀 죽는다고 되어 있어. 뜨거운 온천물에 몸이 삶아진 후 바닥에 가라앉고 그 위에 화산진흙이 쌓이면 묻혀서 죽는다는 뜻인 것 같아."

 

"으악! 사람이 쪄서 죽는다고? 완전 살벌한 말이네. 그렇게 살벌한 말이 표지판에 적혀 있어?"

 

"실제 저 호수물의 끓어오르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물 속에 들어가지는 않을 거야. 자살하려는 사람도 이 더운 날 뜨거운 온천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거야. 관광지의 안내표지판 표현으로는 너무 위협적이고 웃기는데?"

 

오유누마의 놀라운 온천수는 흘러서 넘치고 있었다. 이 뜨거운 온천수는 조금씩 식어가면서 아래로 내려가는데 이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오유누마가와(大湯沼川)'를 만들고 있었다. 오유누마에 고여 있는 온천수가 수증기를 모락거리면서 개울을 만들며 내려가고 있었다. 그 뜨거운 온천수는 계란 썩는 듯한 유황냄새를 맘껏 풍기고 있었다. 온천수의 온도는 땅을 따라 흐르면서 온도가 조금씩 떨어질 것이다. 온천수가 흐르는 개울! 참으로 지구의 신비와 맞닿아 있는 곳이다.

 

'다이쇼지고쿠(大正地獄)' 전망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온천수가 분출하면서 온천 진흙이 전망대를 뒤덮었던 곳이다. 주의문은 한국어로도 표기되어 있는데 열탕의 온도가 갑자기 올라서 분출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화산분출에 대비하는 자세한 설명문을 보면 화산지형 속에서 힘들게 살아온 일본인들의 철저한 안전의식이 느껴진다. 나는 위험한 화산의 온천수가 언제 터져 올라서 나를 덮칠지 모른다는 묘한 긴장감이 즐거웠다.

 

나의 가족은 온천수를 따라 산을 계속 조금씩 내려왔다. 우리가 걷는 길은 '유람보도'라고 되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일본 홋카이도의 화산 아래에서 우리는 올레길을 트레킹 하듯이 천천히 걸었다. 참으로 지구는 신비하며 지구에는 걸어서 다다를만한 곳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가족과 함께 천천히 계속 걸었다. 빠른 걸음이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나는 천천히 걸었다. 유황 냄새를 약간 머금은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9년 7월말~8월초의 일본 여행 기록입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모든 세계 여행기가 담겨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오쿠노유, #홋카이도, #노보리베쓰, #오유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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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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