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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포해수욕장. 고운 모래, 넓은 백사장.
 연포해수욕장. 고운 모래, 넓은 백사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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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8일(화)

게으름이 극치를 달리고 있다. 연 이틀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곯아떨어졌다.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어 편하긴 한데 영 찝찝하다. 그래도 그저께 밤엔 빨래라도 해 놓고 잤는데, 어젯밤엔 빨래조차 하지 않았다. 뭐 이렇게 살아보니 빨래 같은 건 하루 이틀 대충 건너뛰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터득한 거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 나중엔 물을 절약해서 좋지 않느냐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부랴부랴 샤워부터 한다. 여행 다니면서 참, 아침저녁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몸을 씻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날의 여행 코스를 숙지하는 일이다. 가능하면 지명이나 갈림길, 주요 방문지 같은 것들은 반드시 외우려고 하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명사를 암기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극단적으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지도를 들여다본다. 그런데도 지도를 접어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면, 방금 기억하려고 했던 게 뭔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그렇게 해서 주요 이정표를 지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다. 지도가 복잡한 탓이려니, 남 탓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영 마음이 편치가 않다. 이러다 집에 돌아가는 길조차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을 해놓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은 수시로 잊어버리고,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점점 더 바보가 돼 가고 있는 느낌이다.

나 홀로 길 위에 서 있는 날이 점점 더 많아지다 보니, 내가 누군지 되돌아볼 때가 많다. 집에서나 회사에서 평소 어떻게 지냈는지 되돌아볼 때도 있다. 단순히 씻고 안 씻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평소 해야 할 일을 잊고 산 게 너무 많았던 게 아닌가 하는 자각이다. 매일 밤 빨래를 해야 하듯이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들, 길 위의 이정표를 기억해야 하듯이 했어야 하는데 새카맣게 잊고 산 게 무엇인지 되짚어보고 있다.

밤새 비가 내렸다. 혹시 아침까지 비가 내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창문을 열어보니 비는 내리지 않는다. 대신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 풀들이 몸을 누이는 정도로 봐서 강풍임이 틀림없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평상시에도 바람이 몹시 거칠다. 이런 날씨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살짝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이제 드디어 여름이 가고, 겨울이 한 발 더 바짝 다가온 느낌이다. 지난여름에 사람 몸살 나게 더웠던 것에 비하면 추위가 지나치게 일찍 찾아온 셈이다. 서서히 추위에 대비해야 할 때다.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자전거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바퀴가 저절로 굴러간다. 지금은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나중에 옆이나 앞에서 불어올 때는 자전거 타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바람이 부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바람의 세기인데, 오늘 부는 바람은 무시할 만한 수준을 벗어났다.

걷기 열풍의 흔적을 만나다

신진도를 다시 되돌아 나와 황골항을 향해 달린다. 황골항은 태안읍에서 서남쪽으로 튀어나온 작은 반도 남쪽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항구다. 황골항에서는 주민들이 그물 손질에 여념이 없다. 마을길이며 부둣가가 온통 꽃게 그물이다.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불어 바닷물에 전 그물을 널어 말리고 손질하는 데 좋은 날씨다.

황골포. 꽃게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들. 이 작은 어촌에도 노동은 끝이 없다.
 황골포. 꽃게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들. 이 작은 어촌에도 노동은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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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골항 가는 길가에 걷기 코스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표지판 안에 '총 왕복 길이', '남녀 열량 소비량' 같은 것들이 적혀 있다. 대단한 일이다. 걷기 열풍의 흔적을 이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이정표들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도 꽤 유용하다. 이런 곳에서 이처럼 자세한 길 안내를 받을 수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마운 일이다. 이 산책로가 연포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시골길을 한참 달린다. 이런 길 끝에 나타나는 해수욕장이라면 별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멀리 다채로운 빛깔을 띤 방갈로들이 보인다. 꽤 규모가 크다. 무슨 리조트처럼 보인다. 처음엔 뭐하는 곳인가 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이 연포해수욕장이다.

의외로 규모가 크고 번화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철 지난 해수욕장 같지 않게 여전히 활기가 남아 있다. 이 해수욕장에는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온다. 우럭, 학꽁치, 망둥어 등 잡히지 않는 게 없다고 한다. 그래서 피서철이 아닌 때에도 관광객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연포해수욕장. <바보선언> 촬영 기념 표지석.
 연포해수욕장. <바보선언> 촬영 기념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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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수욕장에서 뜻하지 않은 물건과 마주쳤다. 백사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영화 <바보선언> 촬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지금은 영화 줄거리 같은 건 그냥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영화다. 하지만 그 영화 속 남녀 주인공들이 뛰어다니던 백사장만은 비교적 생생하다.
그때는 그곳이 막연히 동해안의 어느 유명한 해수욕장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백사장이 연포해수욕장이었다니, 갑자기 젊은 날의 향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도 한때는 그들처럼, '바보' 같이 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 번쯤 꼭 찾아가 보고 싶었던 해변이었다. 그런데 나이 50이 다 돼서 찾아오다니, 진짜 바보가 따로 없다. 이곳까지 오는데 그동안 참 길고도 먼 여행이었다.

백사장 한가운데 서 있는데 분위기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옛날에 꼭 한 번 와본 적이 있었던 곳 같다. 기시감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그곳에서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배회했다. 그러다 근처 한 슈퍼 앞에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일단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아저씨의 큰 소리 외침, 힘이 됐다

용신리 앞 바닷가. 무너진 제방 안쪽으로 망둥어 잡이를 가는 사람들.
 용신리 앞 바닷가. 무너진 제방 안쪽으로 망둥어 잡이를 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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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포해수욕장. 왠지 예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듯, 기시감이 드는 곳.
 연포해수욕장. 왠지 예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듯, 기시감이 드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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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가 고향이라는 슈퍼 주인이 내가 강화도를 거쳐 왔다는 사실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또 줄줄이 설명을 드렸다. 언제 어디를 출발해서 지금 며칠째 여행 중인데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갈 건지 말씀을 드렸더니, '하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혀를 내두른다. 눈이 큰 두 명의 청년은 말없이 내 자전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마도 꽤 탐이 나는 물건이었을 거다.

슈퍼 아주머니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아저씨 말이 아주머니 역시 열심히 자전거를 타던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단다. 아주머니의 미소가 뭘 말하는지 감이 잡힌다. 이래저래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그들과 헤어져 돌아서는데, 아저씨가 뒤에서 꼭 완주를 하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그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진심이 어려 있다. 그분의 응원에 몸이 조금은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 가는 길에 채석포해수욕장을 마저 들렀다. 채석포 역시 매우 아름답고 넓은 해수욕장이다.

반도를 벗어나서는 다시 태안읍까지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77번 국도로 올라섰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중간에 바닷가로 내려갈 수 있는 이정표를 놓쳤다. 먼 길을 돌기는 했지만 덕분에 도로 위를 마음껏 달렸다. 도로 위를 달리다 옆에서 부는 강한 바람에 자전거가 몇 차례 휘청였다. 중심을 잡는 게 쉽지 않다. 77번 국도를 달리다 중간에 다시 진산리 바닷가로 내려갔다.

진산리 바닷가에 꽤 많은 펜션들이 밀집해 있다. 한국의 해안 어디든 펜션이 들어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사실 새로울 것이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땀 흘려 달려온 길에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펜션 마을이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산 아래 바닷가, 평화로운 마을이다.

진산리의 한 바닷가 펜션마을.
 진산리의 한 바닷가 펜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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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바닷가 길을 따라 몽산포항을 향해 가는 길에 거대한 공사 현장 앞을 지나간다. 대규모 리조트 건설 현장이다. 자본가들의 생각은 어딘가 모르게 비상식적인 데가 있다. 어떻게 이렇게 후미진 곳에 이렇게까지 거대한 건물을 지어 올릴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그들의 그런 생각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조만간 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해안이 자동차들이 실어 나르는 사람들로 불야성을 이룰 게 틀림없다.

몽산포항 가는 길, 바닷가 리조트 건설 현장.
 몽산포항 가는 길, 바닷가 리조트 건설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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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물스러운 드라마 <장길산> 세트장

공사장 옆에 다 허물어져 가는 드라마 세트장이 있다. 반파가 다 된 모습이다. 드라마 <장길산> 촬영장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세트장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과 기와집들이 흉물스럽다. 한때는 세트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줄을 이었다는데, 지금은 그게 다 거짓말 같다. 세트장 뒤에 서 있는 거대한 시멘트 건물이 위압적이다. 한창 잘나가던 때의 영화가 채 6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다.

다 무너져 가는 드라마 <장길산> 세트장.
 다 무너져 가는 드라마 <장길산> 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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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포해수욕장은 꽤 넓고 쾌적하다. 백사장 넓이가 동양 최대를 자랑한단다. 하지만 피서철이 지난 지금은 여타의 다른 해수욕장과 다를 것 없이 썰렁한 분위기다. 근처에 거대한 서양식 리조트가 들어서고 있으니, 나중엔 영 몰라보게 달라질 수도 있다. 몽산포에서는 해송 관찰로를 달려 볼 만하다. 송림 사이로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길이 열려 있다. 솔향이 진하다. 가슴이 상쾌하다.

몽산포해수욕장
 몽산포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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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대해수욕장을 지나, 드르니항까지 속도를 높인다. 태안비행장 앞을 지나서는 풀이 우거진 제방을 건넌다.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긴 한데, 자전거도 지나갈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달리 돌아갈 길이 없어 그대로 진입한다. 제방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해가 질 무렵이라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드르니항에서는 안면도가 지척이다. 마음 같아선 바로 건너뛰면 좋겠다. 안면도로 들어서려면 할 수 없이 한참 북쪽에 있는 연륙교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야 한다.

제방 위 풀이 우거진 길.
 제방 위 풀이 우거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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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니항. 뒤쪽으로 안면도 백사장항이 보인다.
 드르니항. 뒤쪽으로 안면도 백사장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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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면도 백사장항에서 예산에 사는 이 선생과 만나기로 되어 있다. 며칠 전 내가 쓰고 있는 기사를 본 이 선생이 '내 나와바리에 들어왔는데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안면도 근처에 다다르면 꼭 연락을 하라고 말했다. 연락을 안 하면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후환이 두려워 안면도 들어서기 전부터 일찌감치 전화를 드렸다. 덕분에 저녁 한 끼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내 지친 육신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숙박 장소까지 알아봐 주셨다. 이 선생 덕에 큰 힘을 얻었다.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다. 오늘 달린 거리는 81km, 총 누적거리는 980km이다.

안면도 백사장항. 대하축제 현장.
 안면도 백사장항. 대하축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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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연포해수욕장, #바보선언, #몽산포, #장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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