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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저녁과 아침 사이, 춤이 있었다

 

초 가을의 무료한 햇살이 사선으로 쏟아지는 거리, 짙은 우기를 견뎌낸 포도 위를 걸어 예술의 전당으로 향합니다. 국립발레단의 <라이몬다>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저는 무용을 좋아합니다. 홍대 클럽에 가면 저를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짬을 내어 새벽이면 어김없이 달려갔던 발레연습실, 당시 키로프 발레단(지금의 마린스키발레단) 출신의 선생님에게 춤을 배웠던 기억은 제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세렌디피티(우연으로 주어진 만남)'이었습니다.

 

춤은 우리의 모든 일상을 지배합니다. 우리의 동작 하나하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출근길에 인사를 나누고, 치열한 경쟁 속으로 생을 가열차게 밀어넣지요. 모든 과정을 분절해보면 결국은 우리의 수많은 인연과 관계맺기, 세상을 향한 애정은 이 '몸의 움직임' 없이는 그릴 수 없는 한장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저녁과 아침사이, 아침에서 저녁까지 인간의 삶이 춤에서 떨어져 있지 않은 이유입니다.

 

 

S#2 발레도 댄스배틀을 한다?

 

<라이몬다>는 13세기 중세 십자군 시대의 헝가리 왕국이 배경입니다. 스토리는 단순하기 그지 없습니다. 많은 고전극과 발레가 그렇듯, 이 또한 사랑이야기일 뿐입니다. 십자군 전쟁에 출정한 기사 장 드 브리엔의 약혼녀 라이몬다가 사라센의 연주 압데라흐만의 유혹과 협박을 견뎌내고 결국 기사와 결혼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번 <라이몬다> 공연은 한국발레의 스타시스템의 시대를 연 김주원과 김지영의 대결, 여기에 볼쇼이 발레단 무용수 캐스팅과 국립발레단 무용수 투탑 캐스팅이 번갈아 관객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만큼 한국발레가 세계최고의 발레단과 어깨를 겨눈다는 뜻이고, 파트너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번 <라이몬다>의 연출을 맡은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모습입니다. 1957년 그의 첫 작품 석화(Stone Flower)는 안무가로서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린 작품임과 동시에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발레 레퍼토리로 자리잡으며 오늘날의 '볼쇼이 발레단'을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그는 오늘날의 고전 발레극 모두를 재해석하여 '클래식'이란 단어에 수식어처럼 붙어다니는 '캐캐묵은' 혹은 '고답적'이란 비평의 칼날을 무화시킨 안무가지요.

 

이번 공연을 보면서 대가의 연출에서 느낄 수 있는 균형감과 '튀지 않는 여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연극이나 오페라, 발레, 패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거장들을 만나왔습니다만, 제가 내린 결론은 '거장의 작품에는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상충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하고,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선별해 재배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죠. 튀는 것으로, 무조건 색다름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반열에 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번 작품은 12세기 십자군 원정을 소재로 한 덕에 원정을 통해 유럽에 알려진 동방의 다양한 춤들이 배합되어 등장합니다. 스페인 민속춤과 헝가리풍의 경쾌한 캐릭터 댄스가 섞입니다. 물론 이 작품이 처음 쓰여진 19세기 말은 서구의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의 회화작품이나 음악, 발레 모두 이국적 동방의 세계를 일종의 '정복가능한 환상'으로 만들어 포장해내곤 했죠. 그러나 이런 정치적 해석의 메스를 들이대며 공연의 장면 장면을 보기엔, 무용수들의 개인기와 아름다움, 그 깊이가 너무 컸습니다.

 

안무가의 과제는 충돌하는 요소가 '튀지 않도록' 조화의 미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 조화가 바로 우아함이지요. 그러나 이 우아함은 단순하게 조용하게 우리의 시각을 지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클래식이라 불리는 것들에는 이 우아함에 기초한 매력이 자리합니다.

 

무용수의 몸은 지상의 중력의 법칙에서 자유롭게 비상하고 부유하며, 떠다닙니다. 사뿐사뿐, 무대 위를 걷기 위해 발끝으로 지탱해야 하는 무용수의 무게는 천근입니다. 그러나 그 무게를 감내하고 자신의 신체를 마치 활처럼 포물선을 그리는 인간의 몸은 자유를 향한 외침입니다. 우리 몸 속에 내재된 충만한 생의 감각을 일깨워 일상의 비루함 속에 지치고 마모된 활기찬 세계를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S#3 사랑한다면, 춤을 춰라

 

춤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발레든 현대무용이든, 혹은 클럽에서의 춤도 다를 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춤이란 하나의 형식이자, 인간의 내면에 가득 차 있는 열망이란 점입니다. 

 

이것을 예술의 형태로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패턴을 부여할 수 있는 지혜와 질서감이지요. 오늘 하루도 춤을 추듯, 생을 노래하고 토해내며 살아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시대가 답답할수록, 희망없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수록 부지런히 몸의 감각을 되살려야 합니다.

 

언제든 제 삶의 주인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저는 춤에 홀릭되어 살 것 같습니다. 자, 한번 흔들어볼까요?

덧붙이는 글 | 국립 발레단의 <라이몬다>는 예술의 전당에서 25-30일 공연합니다.


태그:#국립발레단, #볼쇼이발레단, #라이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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