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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서울 시장의 취임과 동시 공약에 따라 수도권 정비 차원에서 벼가 심어있던 자리에 세운상가(현대상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벼를 심어놓은 모습
▲ 현재의 세운상가 모습 오세훈 서울 시장의 취임과 동시 공약에 따라 수도권 정비 차원에서 벼가 심어있던 자리에 세운상가(현대상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벼를 심어놓은 모습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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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종로 세운상가를 찾게 된 이유는 1974년 내가 농촌생활을 청산하고 처음으로 도회지 생활에 정착한 곳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는 남의 집 점원으로 시작하여 열심히 성실하게 근무 하다 보니 1980년도 우리나라 속담에 "거지 평생소원이 깡통에 금도금 올리는 것"이란 우스갯소리처럼 점원생활 7년 만에 비로소 내 가게(점포)를 운영하게 됐다.

그때 그 시절 세운상가 상인 중 기계분야 판매 종사들로부터 '무서운 아이들'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심히 사업을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남의 집 전세 생활도 청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즈음이었다. 우리나라 국민 수준이 높아지면서 강남 개발이 시작되고 도심 정비가 시작되면서 내 사업장이 있는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하자는 발표를 보면서 나는 세운상가를 떠났다.

세운상가를 철거한 자리에 벼를 심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우수한 벼 품종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동인도"산 벼를 심었을까?
▲ 벼 (원산지 : 동인도) 세운상가를 철거한 자리에 벼를 심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우수한 벼 품종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동인도"산 벼를 심었을까?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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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은 허수아비인데 자세히 보면 어른이 아니라 아마 허수 아들인듯한 아이의 모습이다. 그리고 들고있는 표식에는 (지원, 범준, 엄마 만듬 2010.8.20 금요일)이라 쓰여있다.
▲ 허수 아들 모습은 허수아비인데 자세히 보면 어른이 아니라 아마 허수 아들인듯한 아이의 모습이다. 그리고 들고있는 표식에는 (지원, 범준, 엄마 만듬 2010.8.20 금요일)이라 쓰여있다.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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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어려서 논에 새를 쫒기 위하여 세운 사람의 모형은 모두 "허수아비"였다. 그런데 이날 내가 본 세운상가 허수는 허수네 가족으로 이 사진은 아마 "허수 어미"인듯 하다. 팔에는 최가영이라 쓰여있다.
▲ 허수 어미 우리들 어려서 논에 새를 쫒기 위하여 세운 사람의 모형은 모두 "허수아비"였다. 그런데 이날 내가 본 세운상가 허수는 허수네 가족으로 이 사진은 아마 "허수 어미"인듯 하다. 팔에는 최가영이라 쓰여있다.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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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세운상가를 떠난 지 벌써 22년이 지났다. 그런데 며칠 전 세운상가에서 아직 사업을 하고있는 태양 열기 대표(정규용)로 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 언제 얼굴 한번 뵙자고….'

그러나 늘 바쁜 업무로 자리를 뜨지 못하니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다행히 추석 연휴를 맞이한 두 아들에게 사업장을 맡기고 모처럼 서울구경에 나섰다. "시골영감 서울구경" 기분으로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부평에서 전철을 타고 종로 3가 역에 내려 세운상가를 찾았다.

세상에 한때 내가 15년간이나 사업을 하던 세운상가(현대상가) 부분은 완전히 잘려 철거되고 그 자리에 '내 머리 상식으로는 상상이 안 되는 웬 '벼와 수수, 조'가 익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논 가운데에는 허수아비가 현대적 감각에 어울리는 패션을 하고 서 있었다. 원두막도 세웠는가 하면 논둑에 해당하는 곳에는 피리부는 아이 모형이 있었다.

황소타고 뒤에 달구지에는 나무를 가득싫고 피리를 부는 소년이 어디론가 나무를 팔러 가는것 같은 모형의 조형물이 이목을 집중 시킨다.
▲ 황소타고 피리부는 소년 황소타고 뒤에 달구지에는 나무를 가득싫고 피리를 부는 소년이 어디론가 나무를 팔러 가는것 같은 모형의 조형물이 이목을 집중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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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를 철거한 자리에 벼를 심고 그 자리에 원두막도 지어 놓았다. 그런데 원두막은 일체 출입금지가 되어있어 그림에 떡을 보는것 같다. 기왕지사 설치를 하였으면 세종로 처럼 시민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했으면 더 좋았을것을...
▲ 원두막 세운상가를 철거한 자리에 벼를 심고 그 자리에 원두막도 지어 놓았다. 그런데 원두막은 일체 출입금지가 되어있어 그림에 떡을 보는것 같다. 기왕지사 설치를 하였으면 세종로 처럼 시민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했으면 더 좋았을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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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허수도 아이도 아니고 여인인걸로 보아서 아마도 허수의 작은 엄마인듯 하다. 모두 허수네 가족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허수아비 모습은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 또 다른 허수 어미 이 허수도 아이도 아니고 여인인걸로 보아서 아마도 허수의 작은 엄마인듯 하다. 모두 허수네 가족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허수아비 모습은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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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그 옛날 수백 개도 넘는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장사하던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런가 하면 금싸라기 땅이라 불리던 종로통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가을 수확의 결과가 미지수인 벼와 수수 같은 나락을 심어 "정서적으로 피폐한 수도권 시민"들의 향수를 달래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 반갑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마치 "꽁지 빠진 수탉"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느티나무 같은 수종을 심어 그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자연스럽게 수도권 시민이 쉬어 갈 수 있는 장소였으면 더  더 좋았을걸….  반쪽이 잘려 나간체 덩그러니 육중한 시멘트 덩어리로 남아있는 세운상가 건물 모습도 흉물스럽러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몇 컷의 사진을 찍고 있는데 나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아무래도 윤형 같아 마중 나왔다는 세운상가 15년 지기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 긴 시간 나누고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귀가하는 마음이 마치 고향 마을에 쓰러져가는 고향집을 두고 오는 것 같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한 시절에는 우리나라 전자 문명산업의 메카임을 자부하며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였던 '세운상가'였는데….

지난번 몇 번의 태풍 폭우에도 굿굿하게 살아서 알알이 익어가는 가을을 보여주는 도심속 벼 익는 풍경 건너편 보이는 나무숲은 종묘 일대이다.
▲ 만추의 가을 지난번 몇 번의 태풍 폭우에도 굿굿하게 살아서 알알이 익어가는 가을을 보여주는 도심속 벼 익는 풍경 건너편 보이는 나무숲은 종묘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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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의 발자취

일제의 강점기 공중전 무기의 발달로 폭격기 소이탄 투하가 염려되었던 일본은 소이탄 투하 시  2,000℃의 고열로 주변을 모두 태울 수 있는 것을 염려하여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물이 많았던 종묘 앞에서 현 세운상가 지대를 소개를 시작하였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소개 작업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방치되었던 소개 하지는 전쟁으로 집을 잃은 이재민과 월남한 이주민들이 판잣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고 사창가가 들어섰다. 이 사창가를 속칭 종삼(鍾三)또는 서 종삼이라 불리던 곳을 1966년 4월 4일 블도져 시장으로 소문났던 김현옥 씨가 서울특별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이 세운상가 일대 지역이 방치로 말미암아 심각한 수준임을 인식했다.

김 시장은 1966년 종로 구청장에게 무허가 건물 철거를 지시하고 청계천에 인접했던 현재의 아세아전자상가 위치에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을 담아 이 지역에 세운(世雲)상가를 기공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정부도 이 지역을 재개발지구로 고시하여 이 지역의 개발이 활성화됐다.

북쪽부터 차례대로 현대상가(현 종로 세운상가), 아세아상가, 청계 상가, 대림상가, 삼풍상사,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 상가란 이름을 붙여 건설하였다. 건설 과정에 처음 설계도와 많이 변형되어 (도시 미관, 보행자로 확보, 상가 내 공공시설, 인공정원)을 두겠다는 계획이 무산된 체 건설되게 되어 서울 시내에서 투박하고 위압감을 주는 건물로 변해 버리게 되었다.

세운상가 중에 현대상가가 1967년 7월 26일 최초로 준공되었다. 이때 서울시는 점포 2천 개, 호텔 915개를 수용하는 매머드 상가아파트를 건설하여 서울의 중심 상가 지로 (종로, 명동, 소공동, 무교동)의 상권을 이곳으로 옮겨올 것을 구상했었다. 또한, 상가 상층부에는 아파트를 건설하여 당시 사회 저명인사들이 다투어 입주하여 1971년 한강맨션이 건설되기까지 세인들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면서 세운상가는 서울의 유일무이한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 발전하여 특히 8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 발전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어 '한국의 8비트와 16비트 컴퓨터, 소프트웨어' 상가로 명성을 날럈다. 한때 소프트웨어를 카피하는 커피점이 성행하여 그 시절 세운상가 사람들이 모이면 미사일,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2003년 청계천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 일대 상권은 더욱 쇠락하게 된다. 또한, 청계천 복원 과정에 종로 세운상가와 청계 상가를 잇던 공중 보행 도로가 철거되고 뒤이어 을지로를 지나던 보행 도로도 철거되면서 3층의 보행통로는 네 조각이 났다.

그리고 2006년 서울 시장에 취임한 오세훈 시장은 세운상가의 철거와 일대의 공원화를 공약으로 발표하였다. 그 당시 세운상가에 입주한 상인들의 반대에도 2008년 12월 17일 북쪽에 있던 종로 세운상가부터 철거가 시작되었고 일대는 '세운 초록 띠 공원'이라는 이름의 공원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2010년 청계천 남쪽의 청계 상가 철거에 들어가, 2012년까지 퇴계로까지 이어지는 모든 상가를 철거할 계획이라 한다. <백과사전 참조>

반대편 방향에서 본 도심속 들판은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떤 농촌의 모습과 흡사하다.
▲ 종로에는 벼농사를 짖자 반대편 방향에서 본 도심속 들판은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떤 농촌의 모습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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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운상가 , #현대상가 , #아시아상가 , #대림상가, #태양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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