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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수백년 넘게 이어져 오면서, DNA에 기록은 남기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뭔가 즐겁고 의미 있는 날이란 인식을 심어 놓은 게 분명하다. 해마다 이 시즌에 수백만명의 사람이 귀향길에 오르고, 선물더미를 사고, 음식을 장만하며 이날을 준비하고 기린다. 그리고 결국 온 가족이 모여 맛있는 음식과 이야기를 나눈다. 추석에 대한 설렘과 애정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경험된 즐겁고 따듯한 기억에 비례할 것이다.

반대로 추석에 대한 애증과 애환이 있다면 그건 귀향길의 거리와 비례할 가능성이 크다.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 십수년 동안 만들어진 명절에 대한 기억은 귀향의 고생으로 시작해 귀경의 고생으로 마무리됐다. 도로사정이 좋아지고 KTX가 들어서면서 여섯시간 걸리던 귀향길은 다섯시간으로, 세시간으로 줄어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어느 폭설내리던 해 전날 출발해 다음날에 고향에 도착했던 강렬한 기억, 고속도로에 줄지어 끝이 안 보이는 차량들의 이미지 덕분에 귀향길은 고생길이라는 인식이 박혀버렸다.

자신이 한 일과 관계없이 외치는 '명절불평등'

명절 스트레스 일러스트.
 명절 스트레스 일러스트.
ⓒ 한림대 의료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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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 귀향길에 아내가 합류했다. 귀향길에 대처하는 아내의 전략은 귀향길의 고생을 줄이기 위해 귀향 전에 고생을 미리 하는 것이다. 추석 귀향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새벽부터 고생을 시작한다. 가려고 하면 방법은 수십 가지라는 오랜 귀향길에서 얻은 경험과, 기왕 할 고생이면 몰아서 한다는 나의 지론과는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비판의 자격은 항상 미리 준비하는 사람에게 있다. 올해도 '내가 귀한 추석표를 구해냈다'는 자신감에 근거한 '넌 뭐했느냐'는 공격에 시달린다.

하긴 아내가 추석에 합류한 이후 추석에서의 내 위치도 많이 변했다. 결혼 전에는 부모님과 함께 명절을 보내기 위해 먼길을 고생하며 내려온 막내 아들의 위치에 서 있었다. 장한 일까진 아니어도 고생했다는 애정어린 칭찬도 들었고, 고생해 내려왔으니 휴식을 즐기라는 작은 보답도 돌아왔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정겨운 친구의 위치도 내 몫이었다.

결혼 후 아내가 생기고 나서부터 추석에 나는 온갖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혼한 지 이제 3년을 채운 아내는 많은 시어른과 자식을 둔 집에서 수십년간 명절노동에 시달린 사람처럼 맹렬하게 '평등명절'을 부르짖는다.

부모님과 형, 우리 부부에 아들 이렇게 6명이 단촐하게 명절을 보내는 데다가 도무지 일에서 손을 안 때시는 어머니는 우리 부부가 도착하기도 전에 명절준비를 끝내놓으신다. 그래도 직접 자신이 하는 일의 양과 상관없이, 혹은 수백년동안 여성들한테 이어지며 DNA에 뭔가 새겨져 있는게 아닌가 의심되는,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명절불평등론'이 아내에게서 폭발한다.

아내가 집의 재정권을 휘두르고 있어 혼자 결정한 추석 선물 고르기를 돕지 않았다고 한소리를 듣는다. 결혼 전 명절은 친구와 함께 보내는 기간이었지만 이제는 '그래도 얼굴 한번은 봐야한다'며 하루 저녁 나오는 것도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평소 설거지량과 다를바 없는 설거지도 '명절 설거지'니 함께하지 않으면 불평등이 되어 버린다. 가끔 아내가 명절에 스트레스를 받는지, 명절이 불평등하다는 인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지, 의심이 생기기도 한다.

나도 이제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 볼까

추석을 누군가 고되고 불평등한 날로 만들 수는 없다. 사진은 명절 음식 준비를 함께 하는 가족.
 추석을 누군가 고되고 불평등한 날로 만들 수는 없다. 사진은 명절 음식 준비를 함께 하는 가족.
ⓒ 조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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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명절은 평소에 불평등하게 지내는 부부들한테나 중요한 거 아니냐며 항변도 해본다. 어머니가 일을 더 많이 하시는데, 왜 아내가 남편에게 평등명절 타령이냐며 태클도 걸어본다.

하지만 이런 핑계들은 그저 수십년을 그렇게 살아오신 부모님과 그 밑에서 자라온 나의 관습을 바꾸는 노력을 안 하려는 변명일 뿐이다. 게다가 아내의 평등명절론이 추석때 하는 일의 양을 맞추려는 노력이 아니라, 아직 진짜 가족으로 진화중인 '며느리'로서 남편을 동원해 함께 일하고 함께 즐기는 가족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도 안다. 어떻게든 당해낼 재간이 없다.

무더위가 이어져 미처 다가온 줄 몰랐던 추석이 코앞이다. 이제 아들 녀석이 추석이 뭔지, 왜 사람들이 추석만 되면 고향으로 고향으로 가는지 궁금해 하고 경험하고, 그래서 추석을 기대하게 될 테다. 아들녀석이 보고 배우는 추석을 누군가 고되고 불평등한 날로 만들 수는 없다. 추석을 온 가족이 함께 즐겁고 서로 평등한 날로 만드는 게 부모에게 맡겨진 소임이라면, 나도 이제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 볼까. 추석 후 찾아올 폭풍같은 아내의 추석 후 스트레스도 미리 예방할 겸 말이다.


태그:#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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