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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그래서 올 여름이 유난히도 힘들었다. 추석을 앞둔 9월인데도 불구하고 여름은 아직 제 꼬리를 남겨둔 채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 무더운 날씨 탓인지 요즘 맘이 편치않다. 한 달 사이로 선생님 두 분이 일을 그만두시겠단다. 작년엔 11월이더니 올해는 9월이 모두가 그만두는 달이 될 것 같다. 이유야 많지만 역시 문제는 돈이고 전망이다.

전망 좋은 방, 전망 좋은 일자리. 비전있는 직업.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 앞에 이런 수식어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사회복지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사회복지를 잘 모른다. 시작 할 때도 아무것도 모른 상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은 '사회복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문구 앞에 전망이 있는가?라는 아주 상식적인 물음(?)도 종종 하곤 한다. 나는 그런 물음에 제대로 답변을 해준 적이 없다. 아니 해줄 수가 없다. 단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사회복지'라는 영역에 '전망'이라는 표현은 웬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평가때문에 수업을 안 할 수는 없잖아

인문학 수업 2차시. 하재근 문화 평론가가 유재석이 국민 MC인 이유와 이승기가 왜 한 프로그램에서 찌질이가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 찌질이가 되지 않기, 주인공 되기 인문학 수업 2차시. 하재근 문화 평론가가 유재석이 국민 MC인 이유와 이승기가 왜 한 프로그램에서 찌질이가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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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내내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전지협)가 주도한 평가제 거부는 전지협에 의해서 무력화 되었다. 이렇게 일찍 무너질 거였으면 시작도 하지 말 것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귀다툼을 했는지 모르겠다. 평가 거부로 결국 운영비가 중단될 경우, 돌아올 후폭풍을 지도부 입장에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마이뉴스>에 평가를 거부하겠다는 기사까지 낸 나로서는 완전 맥이 빠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천만은 끝까지 버티고 있다. 지금도 시설마다 평가제 후유증은 심각하다. 이미 평가를 받은 시설은 평가 내용이 작년보다 더 심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우리 센터에는 지난 14일 평가 실사단이 방문했다).

평가를 며칠 앞두고 지난 9일 저녁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준비한 <작은 논문> 발표회를 가졌다. 지난 1년 동안 <학벌없는 사회>와 함께 진행한 <청소년 인문학 수업> 후속작업이다. 발표회를 연다고 하니 평가제를 앞두고 힘들지 않겠냐는 걱정도 들렸다. 하지만 어쩌랴? 평가 일정이 나오기 전에 계획한 수업인 것을. 평가 이후로 연기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10월에도 일정이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평가를 위해서 정작 진행해야 할 수업을 연기한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학벌없는 사회>와 <경희대 인류사회 재건 연구원>이 주관한 청소년 인문학 수업에 참여한 기관은 모두 네 개였다. 디딤돌, 푸른학교, 모락산 아이들, 배움터길. 두 기관씩 나누어서 상반기, 하반기로 진행 될 예정이었다. 1, 2기는 이미 수업이 종료 되었다. 푸른학교는 2기로 4, 5월 두 달 동안 총 8차시로 진행되었다. 하반기엔 하남에서도 추가로 진행될 예정이란다.

"도대체 인문학 수업은 왜 하는 거예요?"
"인문학 수업 지루해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아이들은 인문학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나에게 혹은 강사 선생님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이런 식의 질문은 이제 익숙했다. 그것은 영어는 누가 만들었어요? 한문은 누가 만들었어요?와 같은 맥락의 물음이었다.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답을 해주면 질문을 한 아이는 머리를 감싸쥐고 고통스러워했다. 4, 5월 매주 목요일은 아주 특별한 시간들이었다.

"인문학 수업 왜 하는 거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논문' 숙제를 내다
학벌 없는 사회에서 진행한 청소년 인문학 수업 타이틀이다.
▲ 삶은 달걀? 학벌 없는 사회에서 진행한 청소년 인문학 수업 타이틀이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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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진호 강사, 나는 무엇때문에 분노하는가?
- 하재근 문화 평론가, 찌질이가 되지 않기, 주인공 되기
- 이명원 문학 평론가, 배울 수 있는 용기
- 정희라 교수, 살색은 무슨색?
- 송경재 교수, 또하나의 마을 인터넷
- 정세근 교수,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 할수 없는 이유?
- 하승우 교수, 살아남는 것과 살아가는 것
- 홍세화,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홍세화 선생님의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를 마지막으로 수업을 마무리 할때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다른 어느 수업을 진행할 때보다도 긴장감이 팽배한 시간들이었다. 청소년들에게 <인문학>이라는 거창한 물음은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무더운 여름날 저녁 두 시간을 지루함과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 인내의 시간을 아이스크림으로 달래면서 수업을 진행했다. 강사의 역량에 따라 수업 분위기는 천차 만별이었다. 그중 정세근 교수님의 강의<생각하는 사람이 생각 할 수 없는 이유?>와 이명원 선생님의<배울수 있는 용기>가 기억에 남는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지? 그냥 끝인가?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부터 모둠별로 논문을 한 편씩 쓸 거야."

아이들은 논문을 써야 한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논문이 뭐예요?"
"왜 있잖아,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쓰는 거."
"에이, 우리같은 중학생이 어떻게 논문을 써요."
"응! 너희들은 할 수 있어."
"어떻게요?"
"선생님들이 그렇게 만들테니깐."


우선은 모둠별 논문 주제를 정하게 했다. 모둠장, 발표자, 자료 수집 및 정리 그리고 PPT등 각자 역할을 하나씩 맡도록 했다. 모둠별로 지도 교사가 필요했다. 두 모둠은 내가 맡고 한 모둠씩 선생님들이 맡았다. 주제와 목차를 정한 다음 오전에는 방학 내내 근처 도서관을 전전했다. 모둠별 논문 주제와 맞는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자료를 찾는 과정을 힘들어했다. 자료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선생님들도 말은 안 하지만 인문학 수업을 무사히 마쳤으면 됐지 꼭 해야 하나? 하는 표정이다. 그래도 준비를 시켰다. 그리고 이번엔 더 나아가서 아이들이 직접 주도하는 수업을 하고 싶었다. 자기주도적 학습. 말은 그럴듯 하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수업방식이다. 그렇지만 이번 여름방학때 함깨여는 청소년 학교에서 진행한 '어린이 수학캠프'를 통해서 가능성을 보았다. 논문 발표회 기획단을 꾸리고 사회자도 뽑았다.

초청 대상도 직접 아이들이 선정해서 섭외를 하도록했다. 물론 아이들은 이 모든 과정을 혼란스러워했다. 기획단이 무엇인지 사회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콘티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어설프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를 보여주려는 모습들은 예뻤다. 마무리가 될 때쯤엔 나름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사회를 맡은 M양과 J군은 열심히 대본을 썼고 발표를 맡은 아이들은 PPT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원고에 밑줄을 그었다.

막막한 논문 발표, 박수가 터져나오다 


아이들 부모님과 손님들을 모시고 그동안 진행했던 청소년 인문학 수업 '작은 논문' 발표회를 열었다.
▲ 작은 논문 발표회 아이들 부모님과 손님들을 모시고 그동안 진행했던 청소년 인문학 수업 '작은 논문' 발표회를 열었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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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발표회를 하던 날은 비가 많이 왔다. 오후 5시쯤 주문한 현수막이 왔다. 현수막을 달고 보니 제법 논문 발표회 장소 분위기가 났다. 오후 6시부터 리허설을 시작했다. 그동안 아이들이 열심히 작성한 논문(PPT)들이 영상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리허설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맡은 M과 J는 떨리는지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특히 J는 엄마가 보고 있어선지 점점 더 목소리가 작아졌다.

"못하겠어요."
"너희들은 지금 과정을 배우는 거야."
"떨려 죽을 것만 같아요."
"틀려도 좋으니 자신있게 해."


내 목소리가 커질수록 M의 목소리는 줄어들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발표회를 보러 온 손님들은 많이 오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들은 평가제 준비로 못오셨다. 그렇지만 바쁜 와중에도 달려와 주신분들이 계셨다.

발표회를 시작하기전 사전무대로 오케스트라 '아름다운 것들'을 연주하고 '비둘기집'으로 합창을 했다. 급조한 곰팡이 밴드와 함께 '비둘기집'을 기타로 칠 때는 따라 부르시는 분들이 없어서 조금 민망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년의 청소년 인문학 수업 준비과정과 그 결과물을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다. 오늘 아이들이 발표 할 논문은 모두 네 편이었다. 모둠별 주제는 저마다 달랐다.

딸기-살아남는 것과 살아가는것
토마토-살색은 무슨색?
삶은 달걀-또 하나의 마을 인터넷
그리고 사과 모둠-나는 무엇때문에 분노하는가?


아이들과 작은 논문 쓰기? 선례가 없으니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나도 다른 선생님들 만큼이나 막막했다. 함께 수업에 참여했던 기관 한곳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중간에 포기하기도 했다. 월드컵 <아르헨티나전>과 겹칠 때는 응원하러 가야한다는 아이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결국 30분 일찍 마무리 하고 공설운동장으로 향했다.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서 빌려준 내 노트북은 하마터면 PPT를 작성하던 K양에게 야구 방망이 세례를 받을 뻔했다. 조금만 열을 받으면 전원이 나가버리는 내 노트북은 그녀의 논문을 네 번이나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1가지가 있다면… 저희가 노트북으로 작업을 했었는데…. 자꾸 노트북이 꺼지는 바람에 저장도 못한 채로 날라가 버려서 처음부터 다시 했습니다… 아… 진짜 노트북이 3년 되서 낡은 거라 그리고 먼지도 수두룩 한 거보니 청소도 안 했나 봅니다… 진짜 결론 쓰기 전에 한번 더 꺼져서 날라갔으면…. 야구 방망이로 화면 부실 뻔 했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저희가 꼭! 해드리고 싶은 말은요^^  인터넷의 단점을 기억해두고 장점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거 같네요. 지금까지 삶은 달걀 모둠의 또, 하나의 마을 인터넷에 관한 작은 논문 발표였습니다." <삶은 달걀 모둠-또 하나의 마을 인터넷  결론에서>

어떻게 논문을 쓰냐고 했던 아이들이 직접 PPT로 작성한 논문을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부모님과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를 했다. 연습을 많이 했지만 발표를 맡은 아이들은 중간 중간 실수를 했다. 예상치 못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발표가 끝날 때마다 힘찬 박수가 나왔다. 아니 기대 이상으로 아주 멋진 논문이 되었다. 수업을 준비했던 나도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재미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긴 호흡으로 달려왔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홀가분하다. 학벌없는 사회 선생님의 전화다.

"선생님 내년에도 같이 하실 거죠?"

덧붙이는 글 | 전태일 기념 사업회 소식지 <사람세상>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태그:#논문, #청소년,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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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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