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8월 19일, 경북 구미 KEC 임시 노조사무실(회사 밖 경비실) 앞 게시판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각종 선전물의 한가운데 예쁜 손글씨로 '오늘은 파업 64일차, 정문 51일차'라고 쓰인 종이였다. 분위기 또한 다르다. 젊은 여성들이 까르르 웃으며 오순도순 모여 있다. 조합원 7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이제 갓 인턴을 벗어던지고 정규직이 된 20세 여조합원부터 20~30년을 회사와 함께한 조합원까지. 파업한 지 2개월이 지난 이때까지도 450여 명이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회사 밖에서 천막을 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노조 삼성 마다하고 택한 일하기 좋은 회사가 직장폐쇄 상태로

 

KEC는 휴대폰에 들어가는 비메모리 칩을 만드는 회사다. 이 회사엔 비정규직이 없다. 3개월의 출산휴가를 보장하고 아이 둘을 낳고도 마음 편히 복직할 수 있는 곳이다. 출산휴가가 보장됐다 해도 상사나 동료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인사상 불이익이 있는 다수 사업장들에 비하면 KEC는 여성, 특히 엄마들에게 좋은 직장이다. 사내연애 후 결혼한 부부 직원도 불이익 없이 둘 다 그대로 일할 수 있다. 이런 복지는 22년이라는 시간 동안 노동조합이 일궈낸 결실이다.

 

KEC에 8년째 다니고 있는 이은정(29, 가명)씨는 "입사 전 1년쯤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사업장에 있었다. 거기선 휴일 근무에다가 잔업과 특근까지 해야 했는데 월급은 KEC랑 같았다. KEC는 일요일은 일하지 않는데 말이다"면서 이 또한 노조의 힘이라고 했다. 이런 노조의 힘을 믿기 때문에 월급을 좀 덜 받더라도 무노조인 삼성을 마다하고 KEC에 입사한 직원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KEC 노동자들은 편치 않은 상태다. KEC 노조는 6월 9일부터 5차례 파업을 거친 뒤, 6월 21일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1999년 4일간의 전면파업 이후 11년 만에 맞는 파업이다. 노조는 "4월부터 단체교섭을 진행했는데 사측이 경영악화를 이유로 교섭을 해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측은 6월 30일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이와 관련, 노조는 "그날 새벽 1시경 사측에서 여자기숙사에 용역업체 직원들을 투입해 여성 조합원들을 강제로 끌어냈으며, 이 과정에서 성추행도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직장폐쇄 이후 기숙사생조차 기숙사에 들어가기 어려워졌다. 법원의 가처분 이행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후문으로만 출입해야 했다. 심지어 샤워장 앞까지 여성 용역이 쫓아와 기다렸다고 한다.

 

사측은 정문 천막농성장에 물과 전기까지 끊었다. 조합원들은 더위와 어둠, 목마름과 싸워야 했다. 화장실 또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가까운 대형마트의 화장실을 이용하려 해도, 마트 측에서 조합원들을 못 들어오게 해 결국 1km 밖에 위치한 다른 마트에 가야 했다. 한 조합원은 "화장실 이용을 막은 한 대형마트, 사건을 접수했다며 문자통보만 하고는 몇 시간이 지나도 출동하지 않는 112, 물을 요청하자 처음엔 갖다주다가 이내 KEC로는 물을 줄 수 없다는 소방서 등을 보면서 몇 백 명의 구미시민이 이곳에 있는데 결국 자본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쓰라렸다"며 "KEC가 이토록 서민들을 짓누를 수 있는 배경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타임오프제를 빌미로 한 노조 탄압"

 

사측은 언론을 통해 "노조측이 타임오프제를 전면 부정하고 인사경영권을 요구하는 불법파업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조는 현재 6~7명인 상근자를 법에 맞게 조절하겠다는 것이 자신들의 입장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7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타임오프제(근로시간 면제 한도제)에 따르면, 조합원 500명 이상 999명 이하일 경우 노조전임자 3명을 둘 수 있다. 

 

노조는 또 조합원의 교육과정 및 시간에 대한 규정이 없기에 이를 교섭하고, 인사경영권과 관련해서는 조합원 고용, 근로조건에 대한 합의사항을 이행하라는 요구를 했다.

 

이와 함께 노조는 "사측이 5년 전 구미공장에 2000억원을 신규 투자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을 약속했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곽정소 회장은 KEC 태국 공장의 지분 50%를 한국전자홀딩스로 25억이란 헐값에 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노조는 "한국전자홀딩스는 곽 회장이 만든 회사로 KEC에서 만든 제품에 가격을 책정해서 영업을 하는 곳이며, 근무자는 7명인데 지난해 390억 원의 이익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성추행 주장 및 헐값 매각 논란에 대해 KEC 사측의 입장을 듣고자 16일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사측으로부터는 "담당자가 외근 중"이라는 이야기만을 들었다.

 

 

"내가 이겨야 내 딸이 비정규직 안 되지"

 

KEC 지회는 "결국 이번 사태의 본질은 타임오프제를 빌미로 한 노조 말살"이라고 주장했다. 조합원들은 무력 행사 없이 평화적·합법적으로 파업을 지속하고 있다. 사측에서는 지회장과 수석부지회장을 구속시키려 경찰 조사까지 벌였지만, 불법의 여지가 없어 조사에만 그친 바 있다.

 

투쟁이 지속될수록 조합원들은 견고해지고 있다. 생계가 어려워진 조합원들을 위해 '동지계좌'를 개설하여 생활비를 함께 해결하려 노력하고, 휴가도 못 가고 천막을 지키는 조합원들을 위해 번갈아가며 계곡에 가 단합대회를 열기도 한다. 문화제 또한 조합원들을 북돋는데 한몫하고 있다. KEC 문화제에는 흥과 신명이 있다. 창의적이고 기발한 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한다. 노래방 기계를 갖고 와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막춤도 추고, 술 빨리 먹기 대회도 연다.

 

그 가운데 누구보다 열심히 앞장서서 흥을 돋우는 사람이 있다. 정운형(가명)씨다. 그에게는 열심히 투쟁하고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내가 여기서 싸워 이겨야 내 딸이 비정규직이 안 되지." 그렇다. 정씨는 딸과 함께 파업에 참여하고 있다. 사실 정씨뿐 아니라 조합원들은 누구보다 KEC의 본질을 잘 알고 있다. 노조 가입과 꾸준한 교육, 그리고 몸소 겪은 일들을 통해 노조에 대한, 그리고 동료 상호 간 신뢰가 크다.

 

취재를 마무리할 즈음 이은정씨가 조용히 다가왔다. "조합원들을 보면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노조활동에 열성적인 조합원, 사측에 가까운 조합원, 그리고 중간에 있는 조합원. 사실 나는 사측에 가까운 조합원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용역과 전경을 부르면서 서민의 삶이 이토록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입장이 달라졌다." 이어 그는 "'언제'가 아니라, 반드시 이겨서 회사로 다시 들어가겠다. 그리고 이처럼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싶다."고 말을 마쳤다.

덧붙이는 글 | 노동세상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KEC, #현장, #노동세상
댓글

노동자의 눈으로 본 세상, 그 속엔 새로운 미래가 담깁니다. 월간 <노동세상>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