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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1970년대를 농촌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것도 서부 경남이 고향인 사람들이라면 대번에 알아들을 단어일 게다. 왜냐면 다른 지역에선 또 다른 말로 불려졌을 가능성이 있기에.

 

그 시절, 단층짜리 고만고만한 건물이 닥지닥지 모여 있을 뿐인 농촌마을에 간간이 머리를 쑥 내민 키 큰 건물이 있었으니, 그것이 곧 담뱃굴이다. 담뱃굴은 '담뱃잎을 말리는 곳'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요즘 유식한 척 쓰는 말로는 담배건조시설쯤 되겠다.

 

담뱃잎 한 움큼씩을 굴비 엮듯 엮어 담뱃굴 안쪽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그 열기에 푸르던 담뱃잎이 노랗게 말랐다. 한때 전매청이란 곳에서 수매를 함으로써 대표적 환금작물로 각광을 받았던 담배. 그리고 그 담배농사에 꼭 필요했던 것이 이 담뱃굴이었다.

 

그러나 수입개방 등에 따라 담배농사가 한물간 지는 오래다. 그러니 담뱃굴도 제 역할을 잃은 셈. 창고나 외양간으로 쓰인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그저 시멘트블록을 쌓아 올렸을 뿐인 이 담뱃굴이 30~40년 나이를 먹다 보니 꽤 위험한 존재로 변해간다는 점이다. 거센 바람에 지붕이 뜯겨 날아가 또 다른 피해를 줄 수도 있고, 건물 자체에 금이 가거나 기우는 등 위험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이 담뱃굴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그런데 이렇듯 위험천만해 보이는 담뱃굴에 마땅히 손을 쓸 수가 없어 애태우는 사람도 더러 있다. 자식들은 도시로 떠나고 노부부 또는 홀몸으로 어렵게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는 경우다.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는 사천시 사남면 화전마을의 배계자(57)씨 집에 일요일이던 지난 12일 한 무리의 건장한 남성들이 찾아 왔다. 이들은 "시각장애1급 장애를 지녔고, 지난해까지 기초생활수급자였을 만큼 형편이 어려운 배씨가 낡은 담뱃굴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다"는 이야기를 '사천네트워크'로부터 듣고 달려온 봉사단체 '청심회' 회원들이었다.

 

배씨의 집은 아주 작은 승용차가 들어가기에도 힘들 정도로 골목이 좁아서 중장비의 힘을 빌리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청심회 회원들은 그저 큰 망치와 밧줄 그리고 사다리를 도구 삼아 건물을 철거하기로 했다.

 

먼저 지붕을 뜯어낸 회원들은 이어 건물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건물이 높은데도 안전장치 하나 없이 일하는 모습이 다소 불안해 보였다. 그러나 청심회 회원들의 손놀림은 무척 빠르고 정확했다. 힘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일처리 솜씨가 보기에도 개운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심회에는 전기와 수도설비 등 건축분야 자영업을 하는 회원들이 여럿 가입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일반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도 알음알음 가입해 있단다.

 

이들은 일 시작 두 시간 남짓 만에 오로지 다섯 명 회원의 육체노동만으로 2층 높이의 담뱃굴 하나를 완전히 주저앉혔다. 집주인인 배 씨뿐 아니라 구경 나온 마을주민들은 칭찬과 격려에 입이 말랐다. 하지만 정작 청심회 회원들은 부끄러운 듯 손사래를 쳤다.

 

"뭐 그리 큰 일 했다꼬…."

 

청심회는 사천과 진주에 살면서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좋은 일 해보자'는 뜻으로 만든 봉사단체다. 회원들은 스물 명 안팎. 활동한 지는 꽤 됐지만 그에 비해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회원들이 이름 알리기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날도 청심회 홍현보 회장은 무너뜨린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이나 찍자는 기자의 제안에 "오늘 이 자리에 없는 회원들이 섭섭해 할 것"이라는 말로 에두르며 배씨 집을 총총히 떠났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다"는 기쁨에 찬 배씨의 목소리가 두 번 세 번 이어졌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사천(www.news4000.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뉴스사천, #담뱃굴, #청심회, #봉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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