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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역 건물. 러시아인들이 건설한 건물로, 일제강점기에는 봉천역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심양역 건물. 러시아인들이 건설한 건물로, 일제강점기에는 봉천역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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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달리는 열차에서 먹을 과일과 음료수 등을 사서 심양(선양)역에 도착하니까 오후 5시1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인구가 우리의 30배인 중국은 워낙 복잡해서 기차도 출발 한 시간 전에는 역에 나가야 한다는 인솔자 설명이 흥미를 끌었다.

일본의 동경역과 비슷하게 지어졌다는 역사(驛舍)는 어디선가 본 듯한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하지만, 한때 일제가 점령했던 도시임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1930년대 초까지 청년기를 만주에서 보낸 아버지는 이 역을 몇 번이나 이용했는지도 궁금했다. 

무덥고 어둠침침한 대합실을 가득 메운 승객들은 명절 때마다 귀향전쟁이 벌어지던 60-70년대 서울역을 연상시켰다. 인구가 워낙 많은 나라인지라 큰 역들은 평소에도 우리의 명절 전처럼 여행객들로 붐빈단다. 

처음 타 본 장거리 '침대열차'

6인실 침대칸 2층, 바닥은 조금 딱딱하지만, 이부자리는 깨끗하게 세탁되어 잠자는데 불편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6인실 침대칸 2층, 바닥은 조금 딱딱하지만, 이부자리는 깨끗하게 세탁되어 잠자는데 불편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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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의 백미로 통하는 장거리 '침대열차'. 우주선보다 더 타 보고 싶었던 침대열차는 92년 여름 어느날 경남 진주역을 출발, 서울로 가는 밤열차를 타고 가다가 이리(익산)역에서 내렸을 때 타본 게 전부다. 그래서인지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슴이 설렜다.

심양-연길(약 840km) 열차는 시속 60km 정도로 달리는 것 같았는데, 14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6박7일 걸린다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블라디보스토크-모스코바)에 비하면 이웃집 드나들기지만, 한국에 비하면 서울-목포(427.3km) 왕복과 맞먹는 거리여서 엄청나다.

조금 있으니까 연길행 열차가 도착했다. 기차가 역 구내로 들어서자 자기가 타고 갈 객차를 찾아가느라 밀치고 달리고 무척 소란스러웠다. 중국에는 두 종류의 침대칸이 있는데 6인실 침대칸은 '잉워'라 하고, 4인실은 '루완워'라고 한단다.

피곤하고 불편하고 따질 것 없이 마냥 즐거워하는 학생들. 들르는 곳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가이드 설명을 듣는 자세가 보기 좋았습니다.
 피곤하고 불편하고 따질 것 없이 마냥 즐거워하는 학생들. 들르는 곳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가이드 설명을 듣는 자세가 보기 좋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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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따라온 학생들(다인, 한민, 나영, 지수, 은찬)은 처음 만남인데도 금방 친구가 되어 침대칸에 마주앉아 놀이를 시작했다. 7박8일 동안 어디를 둘러볼 계획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자료집을 읽고 왔다면서 하얼빈과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와 나는 부부동반으로 참석한 네 분과 함께 16호 차 18번 6인실에 들었는데, 1,2,3층 요금이 달랐다. 1층은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2층은 고개를 겨우 쳐들 수 있을 정도이고, 3층은 앉아 있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요금이 차이 날 수밖에. 

아내는 1층, 나는 3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좁은 공간에서 초저녁부터 잠을 청하면 오히려 더 피곤할 것 같았다. 해서 통로에 있는 의자를 펼쳐놓고 아름다운 타악기 연주처럼 느껴지는 기차 바퀴의 마찰음과 광활한 만주벌판의 야경을 감상하였다.

객차 안 진풍경들

자리가 안정되어가니까 작은 앨범만한 노트를 들고 다니는 승무원이 오더니 기차표를 회수하고 파란색 플라스틱 카드를 내주었다. 그러고는 목적지 도착 한 시간쯤 남겨놓고 카드와 기차표를 교환해주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목적지를 지나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객차에서 윗도리를 벗고 활보하는 중국인.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들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지금도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객차에서 윗도리를 벗고 활보하는 중국인.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들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지금도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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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먹고, 적당히 씻고, 뒹굴기 좋다는 만주, 사람들은 진수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컵라면과 해바라기 씨 등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왕성한 식욕을 어떻게 탓하겠는가. 문제는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편의주의였다. 그 중 돼지만한 체구의 남자가 윗도리를 홀딱 벗고 활보하는 모습은 역겨워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여성 가이드가 중국에서는 기차에서 옷을 벗고 다니는 사람들을 '붉은 돼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시장에서도, 거리에서도, 관광지에서도, 서비스가 생명인 주유소에서도 '붉은 돼지'를 만났는데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대합실 객차 입구에서 표를 검사하던 남녀 승무원은 기차가 출발하니까 청소부로 변했다. 수시로 열차 바닥을 청소하고 다녔는데, 쓰레기를 쓸어내면서도 바닥에 버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옷을 벗고 활보하는 승객에게도 주의를 주지 않고. 

화장실도 수세식이 아니었고, 그나마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기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기 5분 전쯤 승무원들이 문을 모두 잠갔다가 출발하면 다시 와서 열어주었다. 기차가 조금 연착하면 30분도 넘게 잠가놓고 있었다. 용무가 급한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그래도 새벽이 되니까, 침대칸 탁자에 비치된 보온병에 모닝커피와 컵라면에 부어 먹을 뜨거운 생수가 나왔다. 생각하지도 않은 서비스였다.  

새벽녘에 기차에서 보는 만주

밤 9시가 넘으니까 기차도 지치는지 마찰음 소리가 작아졌고, 10시에는 일제히 전기가 나가면서 객실이 암흑천지로 변했다.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지 모든 게 명령조였지만, 캄캄하다고 불만을 터뜨리거나 누굴 탓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등되어 깜깜한데도 야경을 감상하다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눈을 뜨니까 새벽 5시였다. 세수하고 간식으로 옥수수를 하나 먹었다. 아직 아침이슬이 굴러다닐 옥수수나무 이파리를 밟고 들어오는 만주의 아침 햇살은 눈 부셨고 기분은 상쾌했다.

도시 근교 농촌의 가옥. 맨땅에 울타리가 판자로 되어 있어 우리의 60년대 가옥을 떠오르게 하는데요. 지붕 중간쯤에 솟은 굴뚝 두 개가 시선을 끕니다.
 도시 근교 농촌의 가옥. 맨땅에 울타리가 판자로 되어 있어 우리의 60년대 가옥을 떠오르게 하는데요. 지붕 중간쯤에 솟은 굴뚝 두 개가 시선을 끕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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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지류로 추측되는 계곡과 바위산. 폭우가 쏟아진 뒤여서 물이 황토색이었습니다.
 두만강 지류로 추측되는 계곡과 바위산. 폭우가 쏟아진 뒤여서 물이 황토색이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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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벽돌로 지은 허술한 집들이 동영상처럼 창밖으로 지나갔다. 옛날 고향동네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도 눈에 들어왔다. 북방식 가옥이니까 그렇겠지만, 굴뚝이 지붕 가운데에 서 있었고, 아침밥을 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도 종종 보였다. 

돈화(敦化), 안도(安圖)를 지나니까 터널도 나타나고, 텐바오산(1,066m) 줄기로 보이는 바위산과 깎아지른 암벽 밑을 흐르는 계곡도 보였다. 건널목에서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를 환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차에서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

아침 9시쯤 말이 통하는 아주머니(장영란 50세) 한 분을 만났다. 고향 이웃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그는 조선족 3세라며 부모 모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고향은 '흑룡강성'이고, 어머니 고향은 '물고기'(생선)가 많이 잡히는 경상도 부산이라고 했다.  

열차에서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 언론에 공개되어도 괜찮으냐고 물으니까 웃으면서 일없다고 하더군요. 무척 시원시원하고 당차게 보였습니다.
 열차에서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 언론에 공개되어도 괜찮으냐고 물으니까 웃으면서 일없다고 하더군요. 무척 시원시원하고 당차게 보였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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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훈춘 4층집에 삽네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다 보충설명을 듣고서야 연변조선족 자치주인 길림성 훈춘에 있는 아파트 4층에 살고, 만주에서는 아파트를 '층집'으로 부른다는 사실도 알았다. 옷차림이나 말투가 중류층 이상의 주부로 보였다.

중국에서 먹고 살만하냐니까, 고기, 과일, 양식 등 물건이 풍부하고 싸서 좋다면서 남편은 '공상관리국'(시장 상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에 근무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들 둘을 두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필자가 가위눌릴 정도로 당당한 그의 언변은 북한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원 활동에 남녀차별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고향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셨느냐고 묻자, 시장에 다녀올 때마다 고향이 해변이어서 해물을 많이 드셨다는 말을 했다면서 물고기(생선)가 귀하니까 고향 얘기를 자주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기회가 되면 어머니 고향인 부산을 방문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혹시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중국 사람들 '번역'(가이드)으로 '성진'(김책시)에 다녀왔다고 했다.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살던가요?"라고 물었더니 "좀 구차하죠!"라고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당시 성진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서 가난에 굶주리는 동포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9시45분, 기차가 역내로 진입하자 아주머니는 연길에는 냉면, 개 탕(보신탕), 쇠고기 구이(로스구이)가 대단히 맛있으니까 많이들 먹어보시라며, "개 탕 많이 드시고, 재밌게 놀다 가시라요!"라는 인사말을 빼놓지 않았다.


태그:#만주 침대열차, #조선족, #심양, #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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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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