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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석문화마을에 들어서면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망초꽃 같은 메밀꽃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효석문화마을에 들어서면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망초꽃 같은 메밀꽃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 효석문화제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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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와 폭염이 걷히면, 강원도 봉평은 발자국 찍히지 않은 첫눈마냥 눈부신 순백의 옷으로 갈아 입는다. 눈 돌리는 곳마다 피어나 손 흔드는 그 꽃, 메밀꽃. 오는 9월 3일부터 열흘 간 열리는 제12회 평창효석문화제 즈음해 '성서방네 처녀'와 '허생원'이 사랑 나누던 메밀꽃의 고장 봉평에 다녀 왔다.

가던 날은 장날이었다. 흩뿌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비를 피해 장터 사람들이 수명 다해가는 형광등 불빛처럼 희미하게 흐른다. 봉평 장날에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은 역시 메밀 음식을 파는 난전이다. 메밀전병이나 메밀부침을 안주 삼아 메밀막걸리 한잔 마시면 장날 수확은 그런 대로 괜찮은 것이다.

봉평에서 나고 자란 고화자(59)씨는 한 장에 1천 원씩 하는 메밀전병을 잰 손놀림으로 익숙하게 부쳐댄다. 소댕을 뒤집어 기름 두른 뒤 메밀반죽을 한 국자 빙 두르면 금세 지글거리며 부침 한 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위에 아삭한 묵은지와 당면을 잘게 썰어 만든 소를 살짝 얹고 둥그런 부침을 돌돌 말면 전병 하나가 먹음직스럽게 완성되는 것이다. 메밀 음식을 파는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한 점포 건너 하나씩에선 봉평의 이 아리따운 특산 음식을 팔고 있다. 그 옛날 '허생원'도 이곳에서 탁주 한잔 들이켰을까.

"제가 이효석 선생님 난 창동4리 사람인데, 지금 요기서 이렇게 살고 있어요. 내일은 진부장으로 가야지요."

장날은 역시 부산스럽고 왁자지껄해야 제맛이다. 기자의 물음에도 얼굴 돌릴 새 없어 고화자씨는 빠르게 답하면서 하던 일을 그냥 한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널다리

장마 기간엔 물에 떠내려 갈까 걷어놓았다가 축제기간에 맞춰 다시 걸어놓은 전통 다리, 섶다리.
 장마 기간엔 물에 떠내려 갈까 걷어놓았다가 축제기간에 맞춰 다시 걸어놓은 전통 다리, 섶다리.
ⓒ 효석문화제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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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새옷 입은 누이 얼굴같이 환한 메밀꽃.
 어릴 적 새옷 입은 누이 얼굴같이 환한 메밀꽃.
ⓒ 효석문화제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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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메밀꽃 필 무렵> 부분)

봉평 읍내에서 흐드러진 메밀꽃을 보려면 읍내를 감싸고 도는 흥정천을 건너야 한다. 다리는 두 개다. 하나는 시멘트로 반듯하게 지어 만든 '인공의 다리'고, 다른 하나는 나무 등속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놓은 사람 냄새 나는 널다리다. 우리가 찾던 때도 장마의 한중간이라서 널다리는 걸려 있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오면 떠내려 갈 우려가 있어 그런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메밀밭이 넓게 펼쳐진다. 사방 어디로 고개를 돌리든 메밀꽃이 하얗다. 환장할 만큼 희다. 군데 군데 포토존이 있고 원두막이 밭 중간 중간에 그럴듯하게 서 있어 찾는 관광객들 누구나 망초꽃만큼 하얀 메밀꽃을 맘껏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메밀은 하얀 꽃보다 향기 진한 붉은 대궁이 더 볼 만하다. 농사를 좀 아는 사람이나 초록을 자신의 베란다에서 조금이라도 키워본 사람이라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게 줄기라는 걸 단박에 느끼는 법이다. 군데군데 '메밀꽃'을 '파는' 상점이나 주막들도 있어 찾아 온 이들은 부적 지닌 엿장수마냥 희희낙락이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메밀꽃 필 무렵> 부분)

문화제를 찾은 수많은 '동이'들이 메밀꽃밭에서 즐겁게 뛰놀고 있다.
 문화제를 찾은 수많은 '동이'들이 메밀꽃밭에서 즐겁게 뛰놀고 있다.
ⓒ 효석문화제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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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사람들이 실제로 메밀을 많이 심기 시작한 건 1960~70년대였다. 배수가 좋은 모래흙에서 잘 자라는 메밀의 특성상 비탈진 산간지역인 봉평이 안성맞춤이었던 데다가 생육기간이 3개월 정도로 짧아 이모작으로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주춤하던 메밀 농사가 다시 활성화된 건 1999년 효석문화제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올해로 열두 번째를 맞는 효석문화제는 이미 전국에서 으뜸가는 지역축제로 자리 잡았는데, 이를 위해 그동안 봉평면민들은 합심하여 메밀을 계속 가꿔온 것이다. 현재 조성된 이 지역의 메밀밭은 줄잡아 35만 평 정도. 이 드넓은 밭에 은하수처럼 피어난 메밀꽃을 보러 해마다 9월이면 70만여 명이 이곳을 다녀간다.

"지난해 신종플루로 기획되었던 전국의 지역 축제들이 모두 취소됐지만 유일하게 저희 문화제만 예정대로 열렸어요. 그만큼 이 지역 사람들의 축제에 대한 자부감은 대단합니다. 지역 축제라면 으레 있는 유명인 초청 프로그램 대신 저희는 모든 공연을 100% 지역 주민들로 소화해 내고 있지요."
이병열 축제 운영위원장의 어투에 강한 자신감이 묻어난다.

메밀꽃 내음에 실려 오는 문학의 향

문화제 기간 동안 내·외국인 구별 없이 봉평읍내 난전에서 재미있게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문화제 기간 동안 내·외국인 구별 없이 봉평읍내 난전에서 재미있게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 효석문화제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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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의 기운과 풍광은 다리 건너기 전 '충주집' 언저리에 널려 있는 여느 음식점에서 이미 입으로 먼저 느꼈을 테지만, 꽃과 먹는 것만으로 만족하기 어렵다면 이젠 그를 만나러 갈 차례다.

가산 이효석.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와 <들> <산> <돈(豚)> 등 자연과의 교감을 시적인 문체로 유려하게 묘사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편소설가로 이름을 떨쳤던 그다. 특히, '허생원'과 '동이', '조선달', '당나귀' 등을 등장시켜 자신의 고향인 봉평의 산야와 장똘뱅이들의 고단한 삶을 아름다운 서정문학으로 승화시킨 <메밀꽃 필 무렵>은 우리나라 단편문학의 백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효석문학관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역시 메밀꽃 지천이다. 선생의 시비 앞에는 연보랏빛 벌개미취가 한창이다. 문학관에서 선생의 삶의 궤적을 흠뻑 맛본 다음 건물을 나오면 불어 오는 가을바람을 한번 눈 감고 맡아 볼 일이다. 메밀꽃 내음 실려 산정으로 부는 바람엔 꽃 내음보다 훨씬 진한 문학의 향기가 배어 있을 터이니. 아래를 내려다 보면 봉평 읍내와 유유히 흐르는 흥정천 그리고 바람의 방향 따라 파도 치는 하얀 메밀꽃밭의 장관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다.

최근 새롭게 문을 연 이효석 문학의 숲 내부. 장을 마친 장똘뱅이들이 충주집으로 탁주 한잔 걸치러 들어간다.
 최근 새롭게 문을 연 이효석 문학의 숲 내부. 장을 마친 장똘뱅이들이 충주집으로 탁주 한잔 걸치러 들어간다.
ⓒ 정동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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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그의 냄새를 맡고 싶다면 올 8월에 새로 문을 연 '이효석 문학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는 것도 좋다. 약 15만 평의 산 중턱에 <메밀꽃 필 무렵>의 공간적인 배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 공원은 태기산 자락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져 찾는 이들을 가슴 설레게 한다. 특히 천국, 물봉선, 우산나물, 용담 같은 100여 종의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 이제는 유명해진 인근의 '허브나라'를 굳이 찾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다.

효석문화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는 '평창무이예술관'은 1999년에 폐교된 무이초등학교를 개축해 만든 예술 테마 파크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 놀았을 운동장엔 초록 잔디로 융단을 깔아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을 감각적으로 배치했고, 내부엔 판화실, 조각실, 도방, 서예실 등 다양한 예술 공간들을 마련해놓았다.

특히 메밀꽃화실에선 그 아름다움에 반해 십수 년간 메밀꽃만을 그려온 '메밀꽃 화가' 정연서 선생이 직접 작품활동을 하고 있어 찾는 이들에게 남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꽃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하려면 시간이 곱절 들지만 그 찬란한 색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늘 갈구하던 제 그림의 소재를 우연히 여기 와서 찾은 다음 그냥 눌러앉아 버렸죠."

운동장으로 나와 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또 그 꽃들이다. 찹쌀처럼 하얀 순백의 메밀꽃. 그 꽃 위로 다시 가을비가 처연히 내린다. 비 오는 봉평의 오후, 메밀밭 사잇길로 '허생원'과 '동이'가 손을 맞잡고 무장무장 과거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하룻밤의 시린 인연을 맺었던 물레방앗간. 마주 앉은 연인의 모습이 그윽하다.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하룻밤의 시린 인연을 맺었던 물레방앗간. 마주 앉은 연인의 모습이 그윽하다.
ⓒ 정동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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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강원도 봉평으로 가는 길
* 가는 길 : 봉평으로 가는 길은 간단하다. 영동고속국도 장평IC에서 내려 6번 국도를 타고 약 8킬로미터 정도 들어가면 된다. 드라이빙의 맛을 살짝 느끼고 싶다면 장평IC 전인 면온IC에서 내려 태기산 정상을 넘는 6번 국도를 타 보아도 괜찮을 듯.

* 먹을거리 : 꼭 맛봐야 할 것은 메밀 음식들이다. 메밀 국수도 좋고, 메밀묵에 육수를 부은 다음 밥을 말아 먹는 메밀묵사발도 맛있다. 순메밀전병을 먹으면 입안에 화색이 돈다. 다리 건너기 전 읍내에 위치한 초가집옛골(033-336-3360) 음식 맛이 깔끔하다. 근사한 초가집도 눈요깃감.

* 머물 장소 : '허브나라'가 있는 흥정계곡 쪽으로 방향을 틀면 계곡 양안에 펜션들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빼곡하다. 계곡물을 즐기면서 깔끔하게 묵고 싶다면 이 중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평창무이예술관에서 그림 그리는 '메밀꽃 화가' 정연서 선생이 운영하는 집(033-335-6700, 무이예술관으로 연락)은 시골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다. 하룻밤 묵으면서 그의 기타 반주에 맞춰 탁주 한잔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 즐길 거리 : 걷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주도의 올레길, 지리산의 둘레길처럼 이번에 새로 난 평창의 고랭길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고랭길은 표고 700m 이상에 위치한 평창의 깨끗한 고랭지에 있는 길을 말한다. 효석문화마을에서 휘닉스파크까지 이어지는 1코스와 휘닉스파크에서 시작해 양떼목장을 거치는 2코스로 나뉘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한은행 VIP 매거진 LUV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효석문화제, #가산 이효석, #메밀꽃, #봉평,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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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도 되지 않는 자본의 권력가를 위해 99%의 희망 없는 삶으로 지내왔던 지난 날을 통렬히 후회하며, 조금더 나은 삶을 찾아 보고자 지리산과 섬진강 도도한 전남 구례로 이사 왔습니다. 농사도 짓고, 여행도 하면서 사는 일상이 흥미롭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결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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