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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오후 소렌토로 가는 차 안에서 현지 안내인은 '산타루치아'에 이어 '돌아오라 소렌토'에 얽힌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절벽 위에 지중해를 향해 자리 잡은 작은 도시는 아름다웠지만 뒷산비탈에 일군 올리브만으로 생활은 어려웠기만 했다. 그래서 고향에서 살기 어려운 나폴리와 소렌토 사람들은 19세기부터 희망을 찾아 미국 땅으로 떠났다.

 

그러나 가진 것 없는 이민자들에게 미국 생활인들 편했을 것인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고향의 추억과 노래였다. 원래 '산타루치아'나 '돌아오라 소렌토'는 나폴리 지방의 민요였다. 가난한 이민자들은 타고난 노래꾼들이었다. 그들은 모이면 고향이야기를 했고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악보도 없는 고향의 노래를 부르면 따라서 합창을 하곤 했다.

바다 멀리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풀었던 것이다.

 

그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망향가에 주목한 사람들은 미국인들이었다. 괜찮은 노래라고 여겨 배우겠다고 악보를 달라고 했더니 이민자들에게 악보가 있었을 것인가! 고향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노래에 악보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모이면 시끄럽게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노래는 비로소 미국인들에 의해 악보를 갖게 되고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산타루치아'나 '돌아오라 소렌토'와 같은 노래였다."

 

대강 이런 이야기였는데 우리나라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졌으나 안내인이 말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노래마다 작곡자가 정해져 있었다.

 

당시 소렌토는 우체국도 없고 육로로는 갈 수 없는 험한 곳이었단다. 그러니 외부에 나가 있는 사람들과 소식을 주고받는 방법은 인편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편인들 자주 있었을 것인가?

20세기 초 큰 가뭄이 들어 우연히 이탈리아 수상이 소렌토에 들렸을 때 소렌토의 시장이 수상에게 우체국을 세워달라고 건의했다는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시장은 외지에 나가 있는 소렌토 사람들과 손쉽게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 우체국을 건의했던 것이다.    

 

"우체국이 생기면서 소렌토에 살던 사람들은 이민자들과 더 빈번하게 소식을 주고받게 되었고 그러면서 나폴리와 소렌토의 노래는 영원한 망향가(望鄕歌)로 자리 잡았으며 나아가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명성과 함께 세계적인 가곡를 배출한 곳이 되었다."

 

안내인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느 부분을 지어낸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인터넷보다 육성으로 들은 안내인의 이야기가 훨씬 사실적이었기 때문에 흥미를 끌었다.

 

여행 중에 만나는 안내인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는데 이탈리아에서 만난 안내인은 원래 성악 전공을 위해 이탈리아에 왔다가 눌러 앉은 사람이었다. 성은 조씨로 고향이 경북 청송이라던가. 여행 중 버스 안에서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또 두어 곡 불러 흥을 돋우기도 했는데 음악을 모르는 내가 들어봐도 잘 부르는 노래였다.

 

성악가가 되겠다고 청운의 꿈을 꾸고 머나먼 나라까지 건너 왔으나 고국에서 오는 관광객을 상대로 관광지를 안내하는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설령 그가 얼마나 만족한 삶을 사는지 몰라도 대학까지 나온 인재들이 빛을 못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아무튼 내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산타루치아', '돌아오라 소렌토', '오! 솔레미오' 같은 노래가 음악 교과서에 실려 우리는 노래의 유래도 모른 채 부르기도 했다. 아마 나폴리가 세계의 3대 미항이라는 소문도 그때 들었을 것이다.

 

 

노래의 역사를 들으며 찾아간 곳 소렌토

 

소렌토는 자연 요새처럼 절벽에 걸린 제비집 형국의 도시였다. 절벽 위에 위태롭게 걸린 집, 비탈진 올리브 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집도 하얀색이 많았다. 집의 형태가 달라서 그렇지 남해 가천의 다랭이 마을이나 울릉도에서도 본 바닷가 마을보다 정감을 주는 도시는 아니었다.

 

 

세계 3대 미항이라고 알려진 나폴리의 풍경은 더 실망스러웠다. 노래로 유명해진 도시.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나폴리. 그렇게 품은 환상과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젊은 날의 명성에 기대어 남루한 모습으로 늙어가는 여인의 모습처럼 비쳐진 도시였을 뿐이다.

 

아름다운 도시라는 소문과 달리 치안 상태가 나빠 시내 구경이 어렵다는 말도 감점 요인이었다. 옛 성이 남아 있는 바닷가에서 사진 몇 점을 담는 것으로 일정을 끝내고 말았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항구는 많다. 통영이 그렇고 여수 또한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도시다.  버스 차창에 스치는 풍경으로 한 지역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국수주의적인 사고라고 비난을 받을지라도 개인적으로는 나폴리가 우리나라 통영이나 여수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다시 로마로 향하는 버스에서 나는 졸고 있었다. 아직 해가 남아 있음에도.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소렌토, #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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