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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 5일 페스티벌을 뛰어다닌 원정단과 일본 활동가들. 이들을 통해 노동자 없인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 후지록페스티벌이 끝나고 도쿄로 돌아오기 전 모두 모여 4박 5일 페스티벌을 뛰어다닌 원정단과 일본 활동가들. 이들을 통해 노동자 없인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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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록페스티벌에서 원정단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유명 뮤지션들이 '노(NO) 콜트'를 외치게 하는 일이었다. 그건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지난 미국원정투쟁에서 그랬듯,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다행히 뮤지션들이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아픔에 공감해 주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행사에 노동자들이 초대 받을 수 있었던 건 독일, 일본, 미국으로 죽을 힘을 다해 쫓아다닌 원정투쟁과 국제연대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미국원정투쟁 때 유명한 뮤지션인 '잭 드 라 로차(Zack de la Rocha)', 그룹 '오조매틀리(Ozomatli)', '탐 모렐로(Thomas Baptist Morello)' 등이 콜트·콜텍의 사연을 듣고 함께 싸워줬다. 탐 모렐로는 "기타는 착취의 수단이 아닌 자유와 해방의 도구여야 한다"는 말로 자신의 연대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 후지록페스티벌(7월30일~8월1일)에는 그 때 연대를 표해준 잭 드 라 로차와 그룹 오조매틀리가 초청됐다. 이들은 후지록에서 연대할 것을 이미 약속해온 터였다.

이들이 록페스티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해 요코하마 악기박람회에서 연대투쟁을 함께 하며 인연을 쌓은 일본의 활동가들이 나섰다.

이들은 후지록페스티벌 주최측, NGO빌리지 운영진, 뮤지션들의 미국 현지 회사, 매니저, 일본 현지 매니저 등 한국, 미국, 일본 세 나라의 네트워크를 동원해 이 초대를 성사시켜 주었다. 10년 넘은 역사를 가진 후지록페스티벌에 처음으로 한국의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이 초청된 것이다. 그것도 정상적으로 기타를 만들고 있는 상태가 아닌 해고노동자들의 원정투쟁을 지원하는 무대를.

작지만 절절한 진심들이 모여 태산을 움직인 것이다. 그럼, 4년 내내 그토록 절절하게 원하고 있는 복직의 꿈, 일터로 돌아가고 싶은 이들의 바람은 왜 이리 더디기만 한 걸까? 진심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처음 만난 일본 청년들에게서 힘을 얻다

프리랜서 그래픽디자이너인 이들은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콜트ㆍ콜텍 노동자들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말했다.
▲ 후지록페스티벌에서 만난 오나즈까(왼쪽)와 이와 씨 프리랜서 그래픽디자이너인 이들은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콜트ㆍ콜텍 노동자들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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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둘째날인 7월 31일, 이날은 저녁 시간에 화이트 스테이지에서 그룹 '원 데이 에즈 어 라이언(One day as a Lion)'의 공연이 있는 날이다. 보컬인 잭 드 라 로차를 만나 그의 공연무대에 원정단이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침 일찍 텐트에서 나와 NGO빌리지로 향했다. 입장이 9시부터 가능해 따가운 햇볕 아래서 40분쯤 기다렸다.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본 젊은이 2명과 잠시 짬을 내 인터뷰를 했다.

36살 동갑내기 친구인 오나즈까와 이와씨는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들이다. 후지록에는 3년 전부터 오기 시작해 이번이 3번째란다. 이렇게 큰 돈을 들여 오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느냐 물었더니, 생활에 큰 타격은 없지만 요즘은 경기가 안 좋아 자신들 일도 약간 어렵다고 한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주며 이 페스티벌의 입장료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과 거의 비슷하다고 말해주었더니 깜짝 놀랐다. 이들은 마침 이날 저녁에 '원 데이 에즈 어 라이언'의 공연을 볼 계획이라고 했다. 그 무대에 우리가 설 거라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뮤지션들 이야기를 하니 역시나 더 관심을 보였다. 유명 뮤지션들의 연대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이들은 나중에 우리 부스에도 찾아와 서명과 사진, 동영상 인터뷰까지 응해주었다.

헤어지면서 노동자들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부탁했더니,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창작자로서 공감대가 느껴진다, 열심히 싸워달라"며 주먹을 살짝 쥐어 보인다. 선하게 생긴 일본 젊은이들에게 울컥 고마움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공감대를 느낀다는 그 말이 인상 깊었다.

세상엔 행복하지 않은 노동만 가득

세상은 무언가를 쓰는 사람만 기억하지, 그걸 만드는 사람은 기억하지 않는다. 세상에 있으면서 없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들.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면서, 그 모든 것에서 소외된 사람들. 모닝 자동차를 만드는 동희오토 노동자들이 모터쇼에 가서 선지를 뿌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화려한 모터쇼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자동차와 늘씬한 미녀들에 가려진 자신들의 존재.

그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하루 14시간 넘게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 코피를 흘려가며, 잠도 제대로 못자고 죽을 힘을 다해 일해도 160만 원도 안 되는 저임금에 허덕이는 사람들.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공안기관원 같은 관리자들의 사찰을 받는 사람들. 회사에 찍힐까 봐 친구도 제대로 못 만나고, 그저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다 큰 남자 어른들.

세상은 이들을 외면하는 게 아니다. 아예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뭘 바꿔달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화려한 자동차 뒤에 우리들이 있다!"고 외쳐야 했다. 자동차는 원래 저런 모양으로 불쑥 솟아난 게 아니라는 걸. 그걸 구경하는, 혹은 운전하는 당신처럼 살갗이 있고, 피가 흐르며, 밥을 먹고, 잠도 자는 구체적인 인간들이 가진 근육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빼곡히 들어찬 관객들이 환호로 답해 주었다
▲ 원 데이 에즈 어 라이언의 무대 빼곡히 들어찬 관객들이 환호로 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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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말해선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므로 자신들의 생산물인 자동차에 짐승의 피를 던지면서 하소연했던 것이다. 그들의 하소연은 용산의 남일당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친 철거민들의 외침과 같다.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이 기타 뒤에 가려진 자신들의 삶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릴 때 집안 어딘가에서 뒹굴던 기타를 떠올렸다. 아마 몇 차례 이사를 다니며 버려졌을 그 기타는 콜트였던 것 같다. 기타 코드 에이 마이너와 시 마이너를 외우며 잠깐 그 기타를 튕겼던 기억도 어슴푸레 떠올랐다.

한 번도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 내가 가지고 놀다 버려진 기억도 없는 그 기타 뒤에 이런 노동자들의 아픔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 어디 기타뿐이랴. 자신이 만든 화려한 주상복합 아파트의 대리석 한 칸만도 못한 월급을 받는 건설노동자들도 있고, 1년 치 월급보다 많은 돈을 우습게 긁어대는 손님에게 웃음 지어야 하는 명품숍 판매노동자들도 있다. 세상엔 행복하지 않은 노동만 가득하다.

행복하지 않은 노동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이런 구체적인 인간들이 삶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아픔이 서린 기타로 노래할 수 없다'고 외쳤던 뮤지션들이 고마웠다. 하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뭐 하나 아쉬울 것 없는 그들이 그런 아픔에 대해 말해준다는 건 노동자들에게도 힘이 되는 일이었지만 나에게도 신선함 경험이었다. 늘 생산하는 노동자들과 한 편인 나만 생각했지, 소비자인 나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뮤지션들의 연대가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성찰의 시간을 준 것도 이번 원정투쟁의 성과다.

"기타가 자유 찾아 노래 부를 수 있도록, 부탁해요"

잭 드 라 로차의 공연에 앞서 '기타가 자유를 위해 노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원정단의 방종운 콜트 지회장
▲ 수만 명 관객 앞에서 방종운 원정단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잭 드 라 로차의 공연에 앞서 '기타가 자유를 위해 노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원정단의 방종운 콜트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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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공연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출연자 대기실에서 잭 드 라 로차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공연에 앞서 노동자들의 주장을 외칠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해 주었고, 사흘 뒤 도쿄에서 열릴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위한 콘서트에도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페스티벌 공연 후 일본 투어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는 터라 자신의 도쿄 콘서트에 노동자들을 초청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의 매니저 낯빛이 어두워졌다. 로커가 왜 자유로운 영혼인지 알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눈치 보지 않고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 한국 연예인들이 연예산업의 틀에 막혀 영혼 없는 뮤지션이란 비판을 듣는 것에 견주면 그의 태도는 참 부럽고 대견했지만, 한편으론 그가 그럴 수 있는 것 자체도 자본주의식 권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상품으로 소비하는 자본주의의 연예산업에서 권력은 상품성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티켓 파워를 가진 뮤지션일수록 그의 발언은 힘을 갖는다. 탐 모렐로의 한 마디에 미국의 펜더사가 진상조사를 약속하고 노동자들과 면담에 응하는 걸 보면 그렇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권력이 노동자들을 위해 쓰이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조차 자본주의인가. 잠깐 씁쓸해진다.

그러나 4년차 장기투쟁에 그런 걸 따질 여유는 없다. 수만 명 앞에서 우리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원정단은 상기되었다. 특히 원정단장인 콜트 악기의 방종운 지회장은 힘찬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호소했다.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면서 수십 년간 좋은 기타를 만들었지만, 4년 전 콜트는 아이바네즈와 함께 거짓말로 해고를 시켰습니다. 후지록페스티벌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 기타를 사랑하신다면 저희들과 함께 해주십시오. 탐 모렐로와 원데이 에즈 어 라이언 같은 세계적인 뮤지션들도 저희들과 함께 해주고 있습니다. 기타가 자유를 찾아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여러분들에게 호소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그는 이 짧은 발언을 위해 손등에 뮤지션들의 이름을 적어 놓고 하루 종일 외우고 또 외웠다. 낯선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와 피켓을 들고, 머리띠를 두른 채 외치는 생경한 목소리를 듣고 의아해 하던 관객들은 발언이 끝나자 엄청난 환호로 답해주었다. 이 공연이 끝난 후 다음날까지 부스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한국말이 들려 깜짝 놀랐다는 한국인 관객들도 부스를 찾아 반갑게 연대를 표현했다.

다음 날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룹 오조매틀리 공연이 오전과 오후에 2차례 열렸고, 원정단은 그 무대에도 올랐다. 시간이 짧아 준비해간 말을 서둘러 내뱉고 내려왔지만, 관객들은 또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생활인으로 돌아가면 누구보다 보수적으로 살지도 모르는 사람들일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노동자들의 호소에 환호했고 귀 기울여 주었다.

노동자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

등에는 현수막을, 옆구리와 가방에는 보튼을 주렁주렁 달고 페스티벌을 누볐다
▲ 우리 몸이 곧 선전판이다 등에는 현수막을, 옆구리와 가방에는 보튼을 주렁주렁 달고 페스티벌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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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록페스티벌이 열리는 3일 동안 원정단은 부지런히 이곳 저곳을 뛰어다녔다. 선전물을 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 등자보와 버튼을 덕지덕지 붙이고 제 몸을 선전판 삼아 돌아다녔다.

뮤지션들이 마련해준 대형 무대뿐 아니라, NGO빌리지에서 주관하는 토크무대에도 서고, 늦은 밤에 열린 오조매틀리의 공연에 우르르 관객으로 몰려가 보컬인 라울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오조매틀리는 무대의 키보드에 우리가 전해 준 티셔츠를 걸어놓고 공연하고 있었다. 원정단은 사흘 밤낮을 뛰어다니며 투쟁하고, 선전하고, 조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3일을 헛되지 않게 보내려 애썼다.

'No Workers, No Music, No Music, No Life'

노동자 없이는 노래도 없고, 노래 없이는 삶도 없다. 어디 노래뿐인가? 노동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가 없다면 기타는 없다. 물론 기타가 없어도 연주는 가능하다. 사람이 곧 악기이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고 땀이 흠뻑 젖은 채로 잭 드 라 로차는 다시 원정단을 찾아주었다.
▲ 잭 드 라 로차와 함께 '노 콜트'를 외쳤다 공연이 끝나고 땀이 흠뻑 젖은 채로 잭 드 라 로차는 다시 원정단을 찾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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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노동 없이 홀로 연주될 수 있는 악기는 사람이 유일하다. 하지만 사람의 연주는 곧 노동이다. 국립오페라단 노동자들이 결국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것도 연주노동을 하는 제 몸을 깨닫고 난 후다. 결국 노동 없이 이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후지록페스티벌이라는 이 거대한 축제의 모든 무대를 만든 것도 노동하는 사람들이고, 그걸 보러 오는 관객들도, 뮤지션도 모두 노동으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다. 오늘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나라의 낯선 노동자들로 만났지만 우리는 결국 그래서 하나다.

후지록페스티벌이 자본권력이 만들어 놓은 자리라 해도, 자본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외치는 자유라 해도, 체제에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 저항이라 해도, 그 안에는 구체적인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하는 머리를 가졌고, 말할 입을 가졌으며, 꿈꿀 자유와 연대할 손을 가진 사람들. 자본주의가 늘 놓치는 것은 바로 그 구체적인 '사람들'이다.

사흘 낯, 사흘 밤 광란의 시간들이 지나고 축제가 끝난 아침, 아마도 비정규직들일 일본의 노동자들은 묵묵히 무대를 철거하고, 쓰레기를 모으고, 축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축제는 끝나도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덧붙이는 글 | 다음 이야기에서는 원정투쟁기 마지막, 원정단 사람들과 일본에서 만난 활동가들을 소개합니다.



태그:#후지락페스티벌, #콜트ㆍ콜텍, #기타, #원정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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