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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다른 지역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애마 자전거를 차 트렁크 속에 넣어 데리고 간다. 볼일도 보고 짬을 내어 그 지역이나 인근지역을 자전거로 여행해 볼 수 있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대전에 갈 일이 있어 차에 자전거를 접어 실으면서 어디를 달려볼까 생각하던 차에 대전에서 가까운 옥천이 떠올랐다. TV 인기 프로그램인 <1박 2일>에도 나왔던 옥천 금강변의 향수 30리 길이 그곳으로 정감어린 서정시 '향수'를 지은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차안에 달린 내비게이션에 대전의 행선지를 검색하니 지도와 함께 고속도로 통행료가 7천원이 넘게 나온다. 우리나라는 미국은 물론 일본보다 기름값이 비싼데, 도로이용료까지 이렇게 비싸다니. 민자 고속도로를 경유하는 추천 경로는 9900원이나 나온다. 부산은 얼마나 나올까 입력해보니 2만원 돈이다. 빨리가도 천천히 가도 어차피 통행료는 같으니 차의 연비라도 높일겸 (일명 에코 드라이빙) 고속도로를 평균 80km로 달렸더니 리터당 25km가 넘는 흐뭇한 수치가 나온다.  

8월 20일 대전을 경유하여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 도착하니 TV <1박2일> 프로에서 출연자들이 출발점으로 달렸던 옥천역이 나온다. 나는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장계리 장계국민관광지에 차를 대고 잔차에 올라타 출발을 하기로 했다. 이날 여름 날씨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상청에서는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으니 웬만하면 낮에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겁을 주고, 일본에서 폭염속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으니 '오늘 충북 옥천에서 김모씨가 자전거 여행 중 열사병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라고 9시 뉴스에 나오진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금강의 이웃인 대청호수 주변의 놀이기구가 큰 선풍기로 보일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금강의 이웃인 대청호수 주변의 놀이기구가 큰 선풍기로 보일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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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고추는 무척이나 크고, 빨간 색깔이 곱기도 하다.
 옥천의 고추는 무척이나 크고, 빨간 색깔이 곱기도 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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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자전거 고행!

휴가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장계리 장계국민관광지를 벗어나 2차선의 차도를 따라 금강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다. 머리 위로는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발 아래로는 태양이 달군 도로의 열기가 올라오니 이건 화끈하기 그지없는 '원 플러스 원 여름 이벤트'다. 다행히 도로변 가로수의 고마운 그늘과 넓은 대청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전거 여행자를 덜 지치게 해준다.       

한낮의 더위로 차량들이 거의 없어 여유로이 달리다보니 주민인 듯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홀로 도로 갓길을 하염없이 걸어간다. 가끔 오가는 버스 시간을 놓치셨나보다. 뙤약볕아래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거북이가 걷듯 느릿느릿 걷는 모습이 언제 집에 가시려나, 보는 내가 막막해 작은 자전거라 못태워 드리는게 안타까울 정도다. '할머니! 오가는 차들 조심해서 가세요' 인삿말로 막막한 마음을 대신한다.

얼마 안 있어 인포리라는 작은 동네가 나오고, 안내 중학교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학교도 보인다. 수돗가가 있는 동네 가게에 들어가 길도 물어보고 음료수도 사먹고, 시원한 물이 나오는 수돗가에서 세수도 하며 열기를 식힌다. 가게의 나이 지긋한 여주인은 날도 이렇게 푹푹 찌는데 자전거 타고 무슨 고생이냐며 수돗물을 가득 채운 대야에 머리를 박고 있는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신다. 문득 내가 자전거 타는 고행자나 순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금강을 찾아 가는 여정은 정말 향수가 느껴지는 길들의 연속이다.
 금강을 찾아 가는 여정은 정말 향수가 느껴지는 길들의 연속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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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향수 30리 길은 삭막한 차도마저 정겨운 동네길로 만든다.
 옥천의 향수 30리 길은 삭막한 차도마저 정겨운 동네길로 만든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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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의 휴식처 안남면사무소

오늘은 웬일로 안 보인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저 앞에 언덕길이 나타난다. 무더위에 무리하면 안될것 같아 끌바 (자전거 용어로 자전거를 끌고 나아감)를 하고 언덕길을 오르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부드러운 경사의 언덕들이라 옥천의 자연에게 고맙다고 혼잣말을 하며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오른다. 길가에 풍요롭게 자라는 옥수수와 고추들 그리고 풀을 뜯어 먹으면서 나를 쳐다보는 새까만 염소들이 힘내라고 응원을 해주는 것 같아 덜 힘들게 느껴진다.    

면사무소와 우체국이 있는 안남면이라는 큰 동네가 나타난다. 이 동네는 옥천 향수 30리길 여행의 중간 기착지로 울긋불긋 옷을 맞춰 입은 단체 자전거 라이더들이 면사무소 앞 넓은 마당에서 등목을 하고 물도 마시며 쉬어가고 있는 모습이 반갑다. 면사무소 안에 들어가 화장실도 이용하고 앞 마당의 정자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도 마시며 나도 여유로이 휴식을 한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시는 주민분이 나같은 외지인이 반가운지 '이제 다 왔슈!' 하며 향수 30리길 가는 방향도 알려주시고 옥천 자랑을 하시는 모습에 충남 온양에 사시는 내 외삼촌이 떠올라 남같지가 않다. 면사무소 직원분이 동네 뒷길로 '둔주봉(384m)'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정상에 올라가면 금강이 물돌이 하는 풍경이 마치 한반도 모습과 같은 진경이 펼쳐진다고 하니 꼭 기억해 두었다가 가을에 또 한 번 와야겠다.       

안남면에서 금강을 향해 가는 향수 30리는 두가지 길이 있다. 석탄리 방면의 금강길과 TV <1박2일>에 나왔던 지수리 방면의 금강길인데 이번엔 후자의 길을 선택해서 달려간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초록의 벼들이 자라는 논밭과, 길가에 빠알간 고추들을 말리는 정다운 시골풍경이 맞아주니 더운 여름날이지만 자전거 여행이 풍성해진다. 

길가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이 되어줘 나무 밑에 누워 잘 쉬었다.
 길가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이 되어줘 나무 밑에 누워 잘 쉬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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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산하는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참으로 아름답다.
 금강의 산하는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참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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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그리고 향수 30리길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시인
정지용 시인 (1902~1950)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6.25전쟁 발발 당시 그의 납북여부와 사인이 모호하여 한때 이름이 '정X용'으로 표기되고 그의 시가 금기시 되었으나, 1988년 비로소 해금되어 국어 교과서에도 그의 시 '향수'가 수록되었다.  

정지용님의 서정적인 시 '향수'의 시구이자 귀에 많이 익은 노랫말이다. 이 시는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옥천이 배경이라고 한다. 시에서 이름을 딴 향수 30리길이 있는 옥천은 TV에도 여러 번 방영되어 유명세를 탄덕에 평일인데도 화려한 복장의 단체 라이더, 친구와 둘이서 달리는 라이더, 외로운 늑대같고 순례자같은 홀로 라이더 등 다양한 자전거 여행자들을 지나치고 만난다.

자전거도 복장도 각기 다른 그들과 공통점이 있다면 지나치면서 서로 목례를 하거나 손인사를 나눈다는것. 자전거 여행은 이렇게 모르는 사람끼리도 동지애를 느끼게 하는 따뜻함이 있는 것 같다.

안남면사무소에서 주민분이 알려준 길을 따라 달려가는데 다 왔다며 금방 나올 거라는 금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대신 언덕길이 떡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다. 여행을 하다가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보면 어느 동네나 웬만한 곳은 다 왔다고 가깝다고 알려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금강변의 도로는 사람도 차들도 드물어서 강변의 정취를 감상하며 여유롭게 달리기 좋다
 금강변의 도로는 사람도 차들도 드물어서 강변의 정취를 감상하며 여유롭게 달리기 좋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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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말을 그대로 믿었다가는 곧 힘만 빠지게 되므로 몇 번 당한(?) 여행자는 그런 말에 큰 기대를 안 한다. 처음에는 여행지의 주민들이 여행자를 골려주거나 혹은 여행자를 배려해서 힘내라고 가깝지 않지만 일부러 가깝다고 말해주는 줄 알았는데, 내가 다른 여행자에게 길을 알려주다 보니 이제 알 것 같다. 바로 그 동네에 살기 때문에 익숙해서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외지인이 느끼기엔 무척 멀지만 말이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지수리를 지나니 드디어 금강이 반갑게 나타나고 더불어 길은 비포장의 흙길로 변한다. 주변에 식당은 커녕 민박집도 거의 없는 그야말로 청정 금강길에서 바라본 금강 주변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자꾸만 자전거를 멈춰서게 된다. 도시에서 사는 내겐 귀하고 신기한 강변 모래톱이 보여 아예 라이딩을 중단하고 강가로 내려가 맨발로 모래찜질도 하고 강변을 걸어보기도 한다. 이런 곳이 고향이라면 누구나 정지용님 같은 시인이 될 것 같다.

그렇게 금강가를 따라 금강 휴게소까지 무사히 옥천 향수 30리길을 달렸다. 중간에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를 맞기도 했는데, 비를 피하기는커녕 옷 입은 채로 소나기에 샤워를 하기도 하면서 돌아왔다. 저녁 나절 대전으로 가서 만난 친구는 내 몰골을 보더니 '너 서울에서 여기까지 자전거 타고 왔니?' 한다. 타는 듯한 폭염과 소나기속에서 달렸던 옥천 향수 30리 길 여행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정지용 시인의 시구처럼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기 어려울 것 같다.

장계리 국민관광지에서 출발하여 인포리 - 안남면사무소 - 지수리 - 금강 - 금강휴게소를 달려가는 정겹고 향수어린 코스
 장계리 국민관광지에서 출발하여 인포리 - 안남면사무소 - 지수리 - 금강 - 금강휴게소를 달려가는 정겹고 향수어린 코스
ⓒ 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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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자전거여행, #향수30리, #옥천 , #금강 ,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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