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 대회의 왕중왕전 격인 25회 록 마스터 대회(이탈리아 아르코)에서 난이도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자인, 춘천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앞두고 맹훈련중이다. 힘든 와중에도 웃음꽃을 잃지 않는다.

클라이밍 대회의 왕중왕전 격인 25회 록 마스터 대회(이탈리아 아르코)에서 난이도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자인, 춘천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앞두고 맹훈련중이다. 힘든 와중에도 웃음꽃을 잃지 않는다. ⓒ 곽진성


세계 스포츠 클라이밍의 정상을 향해 달리고 있는 김자인(22·고려대·노스페이스팀). 152cm. 42㎏의 작고 여린 체구지만, '강철 체력'과 '뛰어난 평행감각'으로 6연속 아시아 선수권 챔피언으로 우뚝섰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스포츠 클라이밍 월드컵 우승(2009, 터키브르노)을 통해 아시아를 뛰어 넘어, 세계 클라이머들의 '퀸'이 되고 있다.

2010년 7월, 이탈리아 아르코에서 열린, '록 마스터(Rock Master) 초청 스포츠 클라이밍대회'는 새로운 여왕의 대관식이라 할 만했다. 세계 랭커들이 참가하는 왕중왕전 성격의 대회인 록마스터 리드(난이도) 부문에서 현 세계랭킹 2위인 김자인이 디펜딩 챔피언 앙겔라 아이터(오스트리아)를 누르고 우승, 아시아 여성 최초의 챔피언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상승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진중하다. 오는 28일부터 30일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열리는 '2010 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을 차분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국내 팬들 앞에서 즐겁게 경기"를 하고 싶다는 당찬 꿈을 가진 김자인, 그녀의 열정은 지금 뜨겁게 빛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첫 클라이밍... 울어 버렸다

 힘든 훈련 중에도 활짝 웃는 모습이 인상적인 김자인 선수

힘든 훈련 중에도 활짝 웃는 모습이 인상적인 김자인 선수 ⓒ 곽진성

지난 12일, 수유동 노스페이스 건물에서 김자인 선수를 만났다. 훈련 중인 그녀는 5m 인공벽을 로프도 없이 성큼성큼 오르고 있었다. 영화 속 스파이더맨이 봐도 깜짝 놀랄 '스파이더걸'의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찔한 높이임에도 홀드를 잡는 손길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성큼 성큼 위로 오르더니, 순식간에 마지막 홀드를 움켜쥐고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김자인. 문득 스포츠 클라이밍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족들과 함께 인공 암벽장에 갔어요. 아빠와 오빠들이 모두 클라이밍을 해서 저도 호기심에 따라하게 됐는데 5m 위까지 올라갔었죠.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그만 그 자리에서 울어 버렸어요.(웃음)"


처음에는 스포츠 클라이밍이 두려워 엉엉 울었다는 그녀, 다시는 이 무서운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오빠들을 따라 간 캠프는 김자인에게 '스포츠 클라이밍'을 운명으로 만들었다.

"친오빠(자하(27)-자비(24))들을 따라 청소년 클라이밍 캠프에 가면서 스포츠 클라이밍에 도전해보고 싶어졌어요. 처음에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놀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평소엔 조용한 성격인데 클라이밍을 할 때면 유난히 밝아졌죠."

그렇게 김자인은 높은 벽을 즐기는 클라이머가 됐다. 그녀에게 스포츠 클라이밍은 힘든 운동이 아니었다. 하나의 재밌는 놀이였다. 김자인은 힘듦을 즐겼고, 클라이밍을 하며 흐르는 땀을 사랑했다. 그런 마음가짐은 15살이란 어린 나이에 김자인을 국내 1인자로 우뚝서게 만든다.

17살에 시니어(성인)에 데뷔한 그녀는 세계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장밋빛 미래를 이어갔다. 비단 국내뿐만이 아니었다. 국제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아시아 챔피언십에서 6년 연속 우승하며 아시아 최고 선수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운동화 끈 꽉 조이고, 클라이밍을 준비하는 김자인 선수(왼쪽 사진). 높은 인공 벽을 바라보는 김자인 선수(오른쪽 사진)

운동화 끈 꽉 조이고, 클라이밍을 준비하는 김자인 선수(왼쪽 사진). 높은 인공 벽을 바라보는 김자인 선수(오른쪽 사진) ⓒ 곽진성


발목 인대·어깨 연골 부상... 네일 아트도 해봤어요

하지만 2006년, 밝은 미래로 가득할 것 같던 김자인에게 큰 부상이 찾아온다. 왼쪽 발목 인대가 파열되어 3달 동안 한쪽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한동안 목발을 짚어야 했기에 보통 사람이라면 크게 실망했을 법한 상황. 하지만 김자인은 실망 대신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용기를 낸다.

"한 다리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2006년 서울시장배 대회에 참가를 신청했죠. 당시 주최측에서 한쪽 다리가 다친 상태에서는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다행히 제 의지를 알고 나중에 신청을 받아주셨어요. 어렵사리 경기에 참여해 우승을 할 수 있었죠."

오르고자 하는 집념과 굳은 의지는 때론 작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김자인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경기장까지 목발을 짚고 온 그녀는 왼쪽 다리를 허공에 띄운 채, 경기에 임했고 두손과 한 발만 사용해 묘기에 가까운 클라이밍을 해냈다. 그렇게 김자인은 부상을 극복하고 2006년 서울시장기 대회 우승을 따낼 수 있었다. 당시 부상 투혼에 감동한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는 그녀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홀드를 잡고 인공 벽을 오르고 있는 김자인 선수

홀드를 잡고 인공 벽을 오르고 있는 김자인 선수 ⓒ 곽진성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2008년 또 한 번의 큰 부상이 찾아온다. 독일에서 훈련 도중, 어깨 연골 파열 부상을 당해 선수 생활에 큰 위기를 겪은 것이다.

"2008년, 어깨 연골 부상을 당한 후 과연 예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컸죠. 몸 자체가 많이 망가져 있었거든요. 또 다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었어요."

 홀드를 움켜쥔 김자인 선수의 손에서 집념이 느껴진다

홀드를 움켜쥔 김자인 선수의 손에서 집념이 느껴진다 ⓒ 곽진성


거듭된 부상. 계속되는 치료는 힘들었고 반복되는 재활 훈련은 지루했다. 2006년 다리 부상때와 달리 2008년의 어깨 부상은 홀드를 잡을 수 조차 없게 만들었다. 그런, 힘든 나날 속에서 김자인은 자신에게 '스포츠 클라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갔다.

"부상이 길어져 기분 전환 겸해서 네일 아트란 것을 처음 해봤어요. 막상 해보니 재밌긴 했는데 사람들이 왜 이것에 집착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웃음) 전 선수이기 때문에 짧은 손톱이 제일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했죠. 운동을 할때는 벽을 타서 손톱이 항상 짧거든요. 몸이 얼른 회복되어 무대에 서고 싶었어요."

4개월여의 길고도 어두웠던 부상이란 터널, 김자인은 '다시 즐겁게 클라이밍'하는 꿈으로 그 힘든 터널을 탈출했다.

"다리 부상일 때는 다른 다리가 있었지만, 어깨 부상을 당하니까 홀드를 잡을 수 없게 되더라고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클라이밍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 그렇게 생각하니 성적보다 중요한 것이 경기를 즐기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죠."

2008년 9월, 그토록 갈망하던 부상 회복과 함께 김자인은 스위스 월드컵 무대에 섰다. 부상 후 첫 경기라 긴장을 많이 해 결과는 17위권에 그쳤지만, 그녀는 몇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회복됐다는 것과 즐기면서 운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긴 부상을 극복한 김자인은 한 단계 더 성숙해져 있었다.

아시아 여성 최초 월드컵 우승... 랭킹 집착 안해

 힘든 순간을 이기며 위로, 위로 오르다(왼쪽 사진). 온 힘을 쏟고 있는 김자인(오른쪽 사진).

힘든 순간을 이기며 위로, 위로 오르다(왼쪽 사진). 온 힘을 쏟고 있는 김자인(오른쪽 사진). ⓒ 곽진성


2009년, 김자인은 2년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 대회에 참가한다. 이 대회는 '스포츠 클라이밍'의 최고 권위 대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결승루트를 완등하는 게 오랜 목표였던 그녀는 중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완등을 하며 2위를 차지한다.

"세계 선수권 첫 완등이었기 때문에 감격을 했죠. 벽을 내려오는데 눈에선 눈물이 흘렀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외국 관중들도 진심어린 박수를 쳐줘서 감동을 받았죠."

이후 김자인은 세계선수권 2위를 비롯해, 2009년 터키 브르노에서 열린 제5차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다. 그녀에게 있어, 그리고 아시아 여성 클라이머에게 있어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이었다. 아시아 여성 최초의 일을 해낸 것. 이런 맹활약 덕분에 김자인은 2009년 세계 랭킹 순위가 2위로 껑충 뛴다.

엄연한 세계 강자 대열에 낀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2010년 7월. 이탈리아 아르코에서 열린 제25회 '록 마스터(Rock Master) 초청 스포츠클라이밍대회'는 그녀를 세계 강자에서, 클라이머들의 '퀸'으로 거듭나게 했다.

"대회 자체의 전통 때문에, 록 마스터에 초청되는 게 모든 선수들의 꿈이에요. 정말 멋있는 대회죠. 세계 강자들이 모두 나오기 때문에 월드컵이나 다름 없어 즐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회에 임했는데 우승을 했네요(웃음)."

김자인은 스포츠 클라이밍의 3종목(리드, 스피드, 볼더링) 중 리드(난이도. 13m 이상 높이의 다양한 경사각으로 이뤄진 인공 경기벽에 난이도를 설계한 루트를 따라 로프로 오른 후 등반고도로 순위를 겨루는 경기)에서 2위의 기록보다 무려 일곱 동작(높이 4m)을 더 진행한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의 우승으로 좋아진 점이 있냐고 묻자 김자인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은 성적을 거둬 마음 편하게 지원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점이 좋네요(웃음). 예전보다 스포츠 클라이밍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진 것도 좋고요."

 김자인 선수는 "즐겁게 클라이밍 하고 싶다"고 자신의 꿈을 말했다

김자인 선수는 "즐겁게 클라이밍 하고 싶다"고 자신의 꿈을 말했다 ⓒ 곽진성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들려온 그녀의 답은 의외였다. 세계랭킹 1위, 혹은 세계 선수권 우승을 말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또다른 꿈을 말한다.

"작년에 월드 랭킹 2등을 했기 때문에 모두들 목표가 1등 아니냐는 말을 해요. 물론 월드 랭킹 1등하면 좋겠지만, (웃음) 거기에만 집착하고 싶지 않아요. 작년에 한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작년만큼 다치지 않고 몸 조절 잘하면서 즐겁게 경기를 하고 싶어요."

8월 28일 국내 처음으로 춘천에서  열리는 '2010 스포츠 클라이밍 월드컵'은 김자인의 바람을 이뤄줄 최고의 무대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국내 팬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보여줄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클라이머의 퀸인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 클라이밍의 매력에 빠져들길 진정 바라고 있다.

김자인 스포츠 클라이밍 록 마스터 우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잊지말아요. 내일은 어제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저널리스트는 오늘과 함께 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