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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분 영상] 할머니들 녹이는 '우리집 강아지' 경남 함안 법수면에 위치한 석무마을에서. 이른 아침 나무그늘 아래 모인 할머니들이 어느집 손주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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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9:40)
 
노인회관 옆 나무그늘 아래 앉았습니다. 동네 할머니들 가운데 4살 난 어느집 손자의 재롱이 한창입니다. 생면부지의 여행자도 눈인사 하고 자리를 잡으니 어느 한 사람 눈치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경남 함안 법수면의 석무마을입니다. 전날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지금 시각이 오전 10시에 가깝습니다. 눈앞에 푸른 벼논과 하늘과 주황색 지붕 얹은 키작은 집들, 그 뒤로 악양마을 둑방 위 풍차가 보입니다.
 

 
어제 정오쯤 말산리에서 출발해 저녁 무렵 예까지 왔습니다. 자전거 아니면 안 된다 다짐한 건 아닌데 결국은 또 멈추질 못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풍광과 대기의 감촉이 여간 흡족하지 않은데다, 땀에 흠뻑 젖어 봇짐을 풀고 자전거를 접고 하는 일이 무척 번거롭기 때문입니다. 
 
고집스레 달려와 남강을 보고 그 앞에서 애잔한 사연 지닌 처녀 뱃사공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악양루의 석양은 보지 못했습니다. 시간도 맞아떨어졌지만 누각 가는 길 계단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공사가 아니었어도 이정표 위치가 애매해 그냥 지나칠 뻔 했는데 근처 '악양루 가든' 입구가 악양루로 가는 길이니 혼동치 마십시오.
 

악양루 절경을 놓친 아쉬움은 남강교 건너 악양마을에서 금세 해소됐습니다. 미처 알지 못한 곳인데 마을 입구에서 붉은 풍차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올해 첫 함안둑방마라투어 대회를 열고 현재까지 사계절관광지 조성 사업 중인 악양 둑방길입니다.
 
어디서 왔냐 묻는 동네 어르신들과 잠시 담소 나누고 둑방에 올라서니 사방 경치가 훌륭했습니다. 노을 기운 감도는 남강, 강물 모유 삼아 풍성해진 수풀림, 물길이 빚은 모래언덕, 푸근한 흙길…. 거기에 사람이 만든 솟대길과 정자, 색연필 바람개비 등의 조형물이 잘 어울렸습니다.
 
이 정도면 딱 좋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개발이 지속되고 외부인의 발길이 과해져 자연이 빚은 본래의 모습이 훼손될까 걱정스럽습니다. 풍경에 취해 홀로 걷고 있으니 풀숲의 참새떼가 우르르 몰려 나와 부산을 떨었습니다.
 
새벽 둑길을 다시 보고파 악양에서 자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숙박시설이 전무한데다 마을회관엔 이미 손님이 들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악양에서 이곳 석무로 왔지만 상황은 같았습니다.
 
날 저물기 직전이었고 더 나아갈 힘도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건 어찌해서 다른 데로 간다해도 이곳보다 더 외질 거란 주민의 조언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석무에서 하룻밤 묵을 방도를 찾아야 했는데, 그러는 중에 구원의 손길이 뻗쳐 왔습니다. 
 

 
처음에 봤던 슈퍼 아줌마가 길건너 '뚱보갈비'네 가서 도움을 청해보라 했고, 달려가 급박한 사정을 전하니 식사 중이던 주인 부부가 흔쾌히 수락을 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넓은 홀 옆에 방 하나를 가족 중 할머니와 함께 쓰게 됐습니다.
 
고성서 만난 세 할머니 이후 다시 만난 고마운 인연입니다. 문명의 혜택이 덜한 마을은 도시보다 불편한 게 많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편의를 합친대도 사람간의 정과 살아 숨쉬는 자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루종일 체력소모가 컸던 데다 마음이 편안해져 모처럼 고기 구워 술도 한 잔 했습니다. 가게서 일하는 화통한 이모가 대작을 해줬습니다. 몇 안 되던 손님이 가고 술 못하는 주인 아주머니도 곁에 와 앉았습니다. 그렇게 기분좋은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PM 2:00)

 

나무 아래 왁자지껄한 한때가 지나고 사람들 각각이 제 갈길을 갔습니다. 재롱둥이 꼬마는 "이모 안녕, 이모 안녕" 열 번쯤 인사를 했습니다. 매미 울고 바람 맴도는 자리에 홀로 앉아 헤죽헤죽 웃다 일어섰습니다.  

 

하룻밤만 묵고 아침 일찍 떠나려던 계획을 바꿔 내일까지 머물기로 했습니다. 행여나 폐가 될까 우려했지만 주인 부부, 할머니 모두 개념치 말고 편히 있다 가라 했습니다. 바깥분 되는 아저씨는 "젊어서 여행하는 사람들한텐 돈 받으면 안 돼" 하시며 밥값도 마다하셨습니다.

 

멀리 갈 생각 없이 근처 동네를 돌고 왔는데 집집마다 대문이 없습니다. 있다 해도 속이 훤히 들여다 뵈게 열어뒀습니다. 오래만에 보는 풍경입니다. 낮도 밤도 예외가 없는데 사나운 동네서 온 여행자만이 잠결에 잠시잠깐 불안했습니다.

 

 

세월따라 집도 늙어 겉모양은 허름하나 그 안에 고운 삶이 엿보입니다. 정들여 곱게 가꾼 화분이나 땀흘려 거둬들인 붉은 고추가 주인의 성품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대문이 없어도 감히 들어가거나 오래도록 들여다 볼 엄두는 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네집 담벼락 아래선 '개벽이'가 고개를 빼죽 내밀고 있었습니다. 개줄이 꼬였나 싶어 쳐다봤는데 그렇진 않고 제가 좋아 하는 듯 했습니다. 덩치 큰 녀석이 짓지도 않고 무척 무료하단 표정으로 바라 봤습니다. 잠시 어릴 적 외가댁 보내졌다 개소주가 된 '예삐'가 떠올랐습니다.

 

 

맘껏 쏘다니다 가게에 돌아오니 할머니와 주인 아주머니가 성화셨습니다. 할머니는 밥때 지났다 걱정하셨고 주인 아주머니는 함안 장에 데리고 갈랬더니 없었다 아쉬워 했습니다. 조금 전엔 단골인 듯한 아저씨 손님이 와서 걸쭉한 입담을 풀어 놓고 갔는데 그 얘기가 참 재밌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 얘기와 우스갯소리를 오가던 아저씨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 빼기 삼이 뭐냐" 해서 "이"라고 했고 "이 더하기 이가 뭐냐" 해서 "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쉬운 답을 뭘 망설이냐며 풀이를 해주겠다 했습니다. 풀이인 즉 "오해를 세 번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 이해에 이해가 더해지면 사랑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엔 전해들은 수수께끼 하나 내겠습니다. "얼굴과 낙하산의 공통점이 뭘까요?" 알 듯 한가요? 생각이 났나요? 공통점은 "활짝 펴져야 산다" 입니다. 저도 맞추진 못했습니다. 

 

아저씨의 명강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너무 길었던 나머지 자리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새겨들을 말이 적지 않았습니다.

 

머문지 이틀인데 좁은 마을이다 보니 벌써부터 눈인사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급한 일정이 없거나, 혹여 다친 마음 추스리며 책 보는 생활 그리는 사람이면 한동안 살아도 좋을 곳입니다. 

 

마침 뚱보갈비네 2층에 빈방 하나가 있는데 한달에 12만 원이랍니다. 전날밤엔 얼큰히 취해 하마터면 계약까지 할 뻔 했으나 술 깨고 보니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맘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뚱보네 이모님께 전화 드리겠습니다.


태그:#국내여행, #함안, #둑방, #악양루, #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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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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