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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올라 부산시 수정동의 오래된 아파트를 찾았다. 2005년 세상을 떠난 김형률씨의 작은 방에서 그의 어머니 이곡지님과 아버지 김봉대님을 뵈었다. 그날, 빗방울은 간간이 떨어졌고 하늘빛은 조금 어두웠다. 아버님은 부산에서 제일 깔끔히 잘한다는 복어탕를 맛 뵈어주시고는 빗속을 걸어 수박 한 통을 사들고 오셨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형률씨는 1945년 원자폭탄의 피해가 그 후세들에게 전달되는 원폭2세 환자들의 문제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이곡지님은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은 1세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전체 피해자 중 10%인 7만여 명이 조선인으로 알려져 있다. 살아남은 1세 중 3만여 명이 1946년 전후로 귀국했고 그들의 2세 중 약 2,300명은 암, 면역 질환, 다운 증후군, 정신지체 등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한다.

 

형률씨의 방안은 그가 살아있던 5년 전 그대로였다. 그가 수집한 원폭 관련 자료가 수북이 쌓여있는 작은 방 안에서, 이곡지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곡지님의 부모님은 경남 합천이 고향이다. 일본의 오랜 식민지 수탈로 인한 삶의 궁핍함은 이들을 일본으로 내몰았다. 이곡지님의 부모님과 두 살 위 언니는 히로시마의 변두리 지역에 살게 된다. 그리고 1940년 그곳에서 이곡지님이 태어났다.

 

 

"한국 엄청 못 살아서 누가 우리 아버지 보고 일본에 가자고 했어. 일본이 돈벌이 된다고 갔어. 돈 벌어서 우리 엄마 오라고 해서 언니는 여기서(합천) 낳고 나와 여동생은 거기서(히로시마) 낳고. 우리 엄마는 일본에서 목욕탕에 불을 땠대. 한국에 오면 논도 사고 집도 살라고."

 

그러던 1945년 8월 6일 아침이었다. 미국이 히로시마 땅에 떨어뜨린 원폭으로 아버지와 언니를 잃었다.

 

"그 때 내가 6살이니 언니가 한 8살 안됐겠나. 12시에 공습이 있다고 해놓고는 방송에 또 안 던진다고 해서 피난 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서 껴입은 옷을 다 벗어놓고 어린 우리는 팬티만 입고 있었지. 그리고 던져버렸지. 우리가 2층으로 올라갔으면 우리도 죽었을 거야. 언니는 2층에 있어서 죽었지."

 

세 살배기 동생은 엄마 등에 업힌 채로, 여섯 살 '나짱(일본이름)' 이곡지님은 엄마 치맛자락을 붙든 채로 그렇게 그들은 히로시마의 벌거벗은 검은 땅 위에 발을 디뎌야 했다.

 

"12시가 되어 우리는 나왔어. 천지가 컴컴하니. 히로시마가 싹 재로… 허허벌판에 우리 엄마하고 여동생하고 나하고. 막 구름 연기 사라지고 나니까 훤해지대. 그것 말고는 기억이 안나. 그 때는 막 마음이 떨리고 상상도 못해. 돌도 다 타고. 히로시마 그 얼마나 넓어요. 하아…사람들 엄청 흐늘흐늘하니 타고, 발만 타고 위에는 산 사람도 있고…그래 참 사람 많이 죽었소."

 

두 번의 전쟁, 가슴에 묻은 어머니

 

그렇게 해방이 되자 '조센징 나가라'는 핍박에 서둘러 합천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945년의 빛, 누군가에게는 해방이고 평화였다. 그런데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 빛이 누군가에게는 겹겹이 쌓인 어둠의 시작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돌아와 생을 시작한 집은 또다시 한국전쟁으로 점령당했다. 마을 한복판에 있던 이곡지님의 집은 인민군의 차지가 되기도 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방은 인민군으로 꽉 차 있었다. 마을의 소와 돼지, 귀한 쌀도 내주었다. 그리고 곧, 인민군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우리 동네 150가구가 사는데, 우리 엄마 집이 또 다 탔어. 한복판이다 보니까. 인민군 죽이려고 민간인 집을 폭격했는데. 인민군은 이북으로 올라가도 자꾸 폭격하니까 우리가 죽기도 하고 집도 다 타고 그랬지. 인민군을 죽인다고 기관총 막 연방 던지고 나면 한 몇 시간은 또 안 그래. 그러다 또 폭격을 막…."

 

가까이 부유한 친척이 살았지만 몸을 숨길 구석 하나 내어주지 않았다. 엄마는 지아비도 없고 아들도 없다고 괄시만 받았다. 그런 엄마는 폭격을 피하려고 호미로 작은 굴을 파서 이곡지님과 동생 두 어린 딸을 넣어놓고 자기 몸으로 구멍을 막았다. 두 딸에게는 땅을 뒤흔드는 폭격 소리와 함께 엄마의 커다란 등이 보였을 것이다. "그게 엄마라" 하고 이곡지님이 읊조린다.

 

70년 평생 동안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가슴에 묻은 어머니가 일군 집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것도 두 번이다. 할 이야기도 억수로 많고 한도 많다. 그런데 세월의 깊이 속에 묻어둔 탓에 말도 안 나오고 기억도 희미하다. 그러나 어찌 감정마저 사라질까. "아이고 우리 엄마 불쌍타"는 말이 입가에서 뱅글뱅글 맴돈다. 티 없이 작고 둥그런 양 볼을 타고 참아내야만 했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히로시마에서도, 합천에서도, '엄마 옆에 있어서 우린 살았는기라.'

 

 "동네 할머니들이 다른 집은 다 타도 우리 엄마 집만은 타지 말아야 하는데 하고 혀를 끌끌 찼어. 참 우리 엄마가 인심은 안 잃었구나 싶었지. 두 번이나 당했다. 우리 엄마 생각하면 불쌍해. 나는 이렇게 말이라도 하지 엄마는 억수로 순해. 아무리 자기를 공격해도 화낼 줄 몰라. 그래서 나는 절대로 엄마 혼자 키워서 나쁘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나 혼자 참 많이 참았어."

 

어머니의 역사를 보듬던 아들을 잃다   

 


여자도 학교 보내야 한다는 외삼촌에 힘입어 소학교에도 다닐 수 있었다. 작은 기둥 위에 짚으로 인 지붕을 얹은 학교였다. 학교는 재미있었다. 맨 앞줄에 설만큼 조그마한 소녀였지만 줄넘기만큼은 일등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스물두 살에 결혼했다. 당시에는 최고 노처녀라고 크게 웃으신다. "북실북실하니 예쁘고 궁합도 잘 맞고." 김봉대님과 그렇게 만났다. 아들 둘에 보태어 쌍둥이 아들 둘, 그리고 딸 둘을 낳았다. 두 아들과 두 딸은 건강했지만 쌍둥이 아들 김형률과 김명기는 아팠다. 쌍둥이 아들 김명기는 낳자마자 앓아 18개월 되어 폐렴으로 잃었다. 다른 쌍둥이 아들 김형률을 잃은 것은 그가 서른다섯 되던 지난 2005년이었다.

 

형률씨는 면역글로불린결핍증으로 인한 호흡기 장애로 일 년에 수차례 병원에 입원하기를 반복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다니고 짧지만 묵묵히 직장 생활을 이어가며 열심히 살았던 그런 반듯하고 성실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이곡지님의 역사를 보듬었던 아들 김형률이었다.

 

2001년 입원 중, 형률씨는 자신을 대상으로 한 의학 사례연구 논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병이 원폭의 결과임을 증명하고 이를 알리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수탈에 의한 빈곤으로 일본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그 곳에서 핵의 양면성에 의해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조부모와 부모의 역사, 그리고 자기 몸으로 이어진 고통의 역사가 단지 개인의 짐일 수는 없다는 인식을 사회 앞에 내던진 것이다.

 

이곡지님 본인도 젊은 시절 종양으로 말 못할 고생을 겪었건만 인터뷰에서는 단 한마디도 자기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어놓지 못했다. 아버지와 언니를, 자식 둘을 잃어도 내 복이려니 하고 사는 것뿐이다. 생계를 위해 수십 년 노점상을 해왔어도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다. 형률씨는 그런 '어머니의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닌 사회라고 주장했다.

 

숨을 거둔 순간까지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던 아들이었다. 병원에서도 링겔대를 밀고 다니면서 자료를 모았다. 60년이 넘도록 아무도 하지 못한 것을 깡마른 체구의 아들이 3년 만에 일구었다. 그 싸움을 지금은 아버지 김봉대님이 계속하고 있다. 형률씨는 언제나 2세 당사자의 운동을 주장했지만 가난과 병고라는 무게를 떠안은 2세들의 삶 속에서, 건강한 2세와 아픈 2세 사이의 복잡한 갈등 속에서, 운동이란 쉬이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

 

"형률이가 이 병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이걸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에 당도되었어요. 그런데 이제 뒷바라지 하고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나야 하는데… 부모로서는 굉장히 가슴이 아프거든요."

 

아들의 삶은 계속 된다

 


'형률이의 뜻을 어떻게라도 이뤄야 한다.'

 

아버지의 숨결이 단단하다. 늘 진실하고 꾸밈없는 성격으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좋아라하는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목숨이 찢어질 듯 기침을 내뱉는 아들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아버지가 매만지는 형률씨의 유품 속에서 시간은 절대로 멈출 줄을 몰랐다. 원폭 2세에 관한 고뇌가 빼곡히 담긴 형률 씨의 다이어리, 그 검은 빛깔 거죽은 여전히 매끈하다. 형률씨가 참석한 원폭 관련 강연이 녹음된 엠피쓰리는 아직까지 충전이 되어 있다. 형률씨의 옷은 가지런히 벽에 걸려있다.

 

아들은 죽음 뒤에 한번 엄마의 꿈에 나타났다. "형률아 니 왔나"하고 반겼다. 그 뒤로 엄마는 매일 새벽 아들의 방에 올라와 금강경을 내리 읽는다. 극락세계에 가라고 부산 범우사에 쌍둥이 김명기와 함께 이름을 올려두었다. 그 뒤로 아들은 꿈에 찾아오지 않았다.

 

"어쨌든 형률이를 위해서 모든 단체들이 얼마나 그리워하는데 좋은 곳에 가고. 시민 단체 분들 다 잘되기를 기도하고. 그것 밖에 없어요. 그거 다 울라고 하면 안돼요. 언젠가 모르게 자꾸 마음에 상처가 오거든. 그래 내가 마음을 크게 먹어. 그래도 안 될 때에는 눈물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65년 전, 사람이 살던 땅에 떨어진 원폭을 사람이 잊을 수 있는가. '원폭이 뭐요'하는 말에 이곡지님은 기가 찬다. 모르는 게 정상인가 싶을 때도 있다. 지금 히로시마에는 원폭이 투하된 장소가 보존되어 있다. 아들이 미처 이루지 못한 특별법 제정은 이제 아버지의 목표가 되었다. 국회의원들에게 수 통의 편지를 보내고 보건복지부로 뛰어다녔다. 혈기가 있는 이상 자식이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지을 심정이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아버지 역시 재발한 방광암으로 수술을 앞두고 있다. 일이 끝나면 아직 정리하지 못한 아들의 유품을 자료관으로 보내고 작은 비석도 세워주고 싶다. 아들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노부부의 어깨에 기대어 아들이 삶을 외치고 있다. 미국도 일본도 우리들도 여태껏 듣지 않았다. 유전자는 말을 못하지만 사람은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덧붙이는 글 | - 이 글을 쓴 최현정 기자는 평화로운 공동체 만들기에 관심이 많은 임상심리학자로 역서에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피터 엘사스의 『고문 폭력 생존자 심리치료』등이 있습니다.

- 이 기사는 <희망세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형률, #원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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