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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강남몽>은 강남의 개발신화 열풍과 그 속에 잿더미가 된 인간의 덧없음을 대비한다.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한 권모술수는 초고층 빌딩과 초호화 백화점을 세우고 다지는데 제격이다.

 

그 속에 활보하는 인간 군상들은 죄다 자본주의의 속물들이다. 그 속에서 구사일생 살아난 백화점 직원은 고군분투한 무력소녀(無力少女)의 단면이기도 하다.

 

주원규의 장편소설인 <무력소년생존기>는 인간의 사악함과 무기력함이 공존하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그 생명을 연명한 무력소년(無力少年)의 고군분투기다. 

 

황석영처럼 정형화된 틀을 갖추거나 전개방식이 순탄하게 흐르는 건 아니다. 그 스스로 하위문학 장르를 취했다 하듯이 플롯이 독창적이고 반전도 뜻밖이다. 이외수의 <칼> 보다도 더 좌충우돌이다. 흡인력은 최고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무한경쟁은 우리 모두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아수라장 속에 몰아넣고 오직 한 가지 욕망에만 반응하는 괴물로 탈바꿈시키고 말았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맹목적인 인간이 된 셈입니다. 정치는 희망을 잃고 더 이상 대의를 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맹목이 대세인 사회라면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보다 지시와 복종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 테니까요." (작가의 말)

 

신자유주의는 성공과 패배로 양분될 뿐이다. 그 속에 숨 쉬고 있는 인간은 로봇과 다를 바 없다. 자본의 욕구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물욕의 폐인(廢人)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성공과 출세에 허덕이는 인간들은 무간지옥에서 아귀다툼하는 인간 군상에 지나지 않는다. 생사를 함께 하는 동고동락의 끈도 자본의 속성에 의해 쉽게 끊어지는 새끼줄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의 중심 무대는 자본주의의 끝을 상징하는 138층 초고층 건물이다. 주인공 '소년'과 그 3대(代)가 겪는 무기력한 34년의 일생이 그 속에 농축돼 있다. 우리의 근 현대사가 그랬듯이, 그 속에서 성공을 꿈꾸는 이들과 그 꿈을 빼앗으려는 자들의 각종 욕망과 혹독한 싸움을 보여준다.

 

그 건물은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공산품들을 생산하는 '폐신 집합소'(廢神 集合所)다. 생산량이 미달되면 노동자들은 스패너로 맞아 터진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는 곳이다. 선택과 집중만 난무할 뿐 그 밖의 것들은 잉여에 불과하다. 건물의 독재자는 부의 증식과 그 아래 인간들의 서열화만 신경 쓸 뿐이다.

 

자본과 성(性)의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순진한 소년 주인공은 한순간의 실수로 샴쌍둥이를 얻는다. 머리 부분의 3분의 2를 가진 '원배'와 왕성한 하체를 자랑하는 '복배'가 그들이다. 원배의 수리력은 가히 초과학적이요, 성욕을 자제할 줄 모르는 복배도 또 다른 초인을 대변한다. 물론 그 집합소 지배자들은 지(知)의 제국주의보다 욕(慾)의 제국주의를 원한다. 인기와 권력의 흡인력에서도 원배보다 복배가 더 월등이 앞선다.

 

소년의 손자는 복배로부터 태어난다. 인간과 로봇의 합작품 터미네이터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물리적인 힘을 발취하는 소년이 아니라 무기력(無氣力)한 소년이다. 그가 어떻게 그 속에서 생을 연명할 수 있었던가? 실질적인 지배자 칼잡이가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든 까닭이다. 15등급이라는 피라미드 제도가 그것이다. 신자유주의 살육교육을 정면으로 비튼 현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폐신 집합소는 온갖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마치 한순간에 폐허더미로 변한 예루살렘 성전을 방불케 한다. 칼잡이는 '등급 간 경쟁 촉발대회'를 통해 나름대로 신분상승의 성전(聖戰)을 치르도록 했다. 헌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로봇소년이 온갖 원한으로 사무친 지하 생명체와 함께 건물 전체를 쓰러트리며 솟아났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그리고 신 자본주의 복음(福音)은 거대한 개혁의 분화구와 함께 그 끝을 고한다는 뜻이다.

 

"거의 완벽하게 건물이 붕괴될 그 시점에 벽을 붙잡고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던 칼잡이와 소년은, 목격하고야 말았다. 그들의 어설픔과 잔인함, 근거를 상실한 분노와 해명할 수 없는 모순이 일궈낸 마지막 꿈의 한 조각을 말이다. 소녀의 눈빛을 흥분으로 진동케 했던 그 어느 때의 뚜렷한 충격, 바닥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혼들이 토해낸 일그러진 영웅이 거대한 불가항력이 되어 지금 그들의 분노, 꿈, 자유를 짓밟고 유린한 모든 것에 대한 심판으로 정체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365쪽)

 

아무쪼록 황석영의 <강남몽>과는 전혀 색다르면서도, 이외수처럼 뜻밖의 가상공간을 무대로 한 주원규의 <무력소년생존기>를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가 지니고 있는 인간의 사악함과 무기력감을 함께 들여다보면 좋겠다. 이미 그것은 우리 각자의 내면을 깊이 후벼 파고 있다.


무력소년생존기 - 無力少年生存記

주원규 지음, 한겨레출판(2010)


태그:#주원규, #무력소년생존기, #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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