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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만물의 근원이다. 물은 사람들이 피하는 가장 낮고 추한 곳까지 거리낌 없이 찾아갑니다. 또한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물은 모든 생명을 피어나게 만들지만 그들에게 군림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자신의 몫을 원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며 기대거나 도움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물은 바위를 만나면 그저 스윽 비켜 지나갈 뿐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기에 가장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물처럼 살고자 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를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지요.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자신을 낮춰 아래로 흘러가는 물의 속성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곧 친절하고 부드럽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표현하면 그들은 그 이상으로 보답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은 홍수가 나면 강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넘쳐나게 되지요. 사람들은 넘쳐나는 물을 막기 위해 강에 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물을 둑 안으로만 흐르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물은 흐르면서 모래와 작은 돌 등과 함께 흐릅니다. 그리고 강바닥에 놓아두지요. 자연스레 강바닥은 높아만 갑니다. 물은 낮은 곳을 찾아 가지만 둑으로 막혀 있지요. 이렇게 하여 둑은 높아만 가고, 강바닥 역시 높아만 갑니다. 사람이 둑을 쌓지 않았다면 강은 새로운 길을 만들었을 테지요. 물은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하니 높은 곳은 논이나 밭이 되었을 것이고, 보다 낮은 곳은 새로운 강줄기가 될 것입니다.

 

 

정부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이렇게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4개의 강을 살린다고 합니다. 강을 살린다는 이유로 강바닥에 쌓여 있는 모래를 파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강물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고, 강의 범람을 막는 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거대한 수로를 만드는 것과 뭐가 다를 까요? 4대강 공사 현장에 가 보면 이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천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흐르는 방향이 바뀌어 퇴적물이 쌓이면 섬이 생깁니다. 주로 큰 강 하구에 잘 생기지만, 강줄기를 따라 조그맣게 생겨나기도 하지요. 이런 섬을 하중도(河中島), 모랫등, 안섬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4대강 공사 현장에서는 이런 섬을 볼 수가 없습니다. 강물의 흐름을 방해하고, 물의 저장량을 늘린다는 이유로 파내는 것이지요.

 

강을 살린다고 했으면, 강도 하나의 유기체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강을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면 강도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히면 새로운 길을 만듭니다. 마치 몸을 뒤트는 것과 같지요. 강이 범람을 하는 것은 몸을 꿈틀거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강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기존에 흐르던 강줄기가 없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홍수가 나면 물이 넘쳐나고, 가뭄이 오면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핑계로 보(洑)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 구조물의 이름을 '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원래 보는 하천에서 관개용수를 수로에 끌어들이려고 둑을 쌓아 만든 저수시설입니다. 단순히 물길을 조금만 변화시키기 위해 막은 작은 둑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렇게 하여 논에 물을 대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농사가 끝난 겨울철이 되면 보를 열어 두어 보의 기능은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대통령에게 다가올 반격이 무섭지 않은가요?

 

 

4대강 공사 현장에서 본 보는 그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이건 보가 아니라 웬만한 댐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물의 저수량도 늘어나고, 물의 수위도 높아집니다. 또한 보를 만들어 물길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도 않습니다. 단순히 물을 막는 역할만 합니다. 갈수기 때에 물을 모아 둔다는 이유입니다. 현재 보를 만드는 곳이 갈수기가 되면 강바닥이 드러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 강바닥을 파고 보를 막아 물을 저장한다고 합니다. 보를 만들면 갈수기가 되면 흘러 보낼 물이 없습니다. 전국에 만들어진 16개의 보는 모두 수문을 막을 테지요. 그렇게 되면 아래로 흐르는 물은 없어지고, 보에 막힌 물들은 죽어갈 것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인데,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신기할 뿐입니다.

 

4대강 공사현장에서 본 조감도는 참으로 멋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조감도는 그냥 조감도일 뿐입니다. 가장 좋은 모습을 상상하여 그렸으니 좋을 테지요. 조감도에 그려진 보에는 언제나 물이 넘쳐납니다. 물고기도 어떻게 아는지 모르나 물고기만 다니는 길을 찾아 잘 다닙니다. 대통령의 탁월한 능력으로 만든 로봇 물고기를 조감도에 그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치자(治者)는 치수(治水)다'라고 합니다. 좋은 정치는 곧 물을 잘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다스린다(治)'는 말은 지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속성을 잘 살펴 아우르고 달래고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병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린다고 할 때도 같은 이치입니다. 무리하게 인위적으로 다루면 그 속성이 망가지고, 결국은 반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재앙, 자연재해는 자연의 반격입니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은 잘 다스리지 못해 반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힘으로 반격을 억누르려 합니다. 잘 다스리지 못해 생기는 반격을 힘으로만 억누른다고 해결이 될까요? 지금은 환경운동가를 비롯한 몇 명의 반격이 있겠지만, 오래가지 않아 대반격이 닥쳐올 것입니다. 과연 그때도 막아 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진정한 양심은 용기에서 나옵니다

 

고공농성이라는 극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다섯 명의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도, 삭발을 하는 신부의 하얀 머리칼도, 조용히 눈물 짓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양심은 있습니다. 물론 강바닥에서 모래를 파내는 굴착기를 운전하는 분에게도, 덤프트럭 기사에게도 양심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어떤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강압에도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더운 여름에 평택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철판으로 만들어진 공장 지붕 위에서 '같이 살자'고 울부짖었습니다. 햇살에 달구어진 철판은 달걀이 삶아질 정도로 뜨거웠으며, 더운 몸을 씻을 물조차 경찰에 의해 끊긴 곳에서 그들은 외쳤습니다. 이번에 환경운동가들의 고공농성을 보고 쌍용자동차의 지붕이 생각난 것은 왜일까요?

 

가족들과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을 한다는 것이 나름대로의 보람과 자부심과 긍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죽음을 강에서 공사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사람들, 정말 그렇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자식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일을 해야 하고, 아픈 부모의 병원비를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양심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당당해야 하고, 자신에게 당당해야 합니다.

 

더운 날, 시원한 강줄기를 바라보며 굴삭기를 조종하고,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부탁합니다. 양심을 버리지 마세요. 여러분이 하는 일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하세요. 진정으로 강을 살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세요. 그리고 굴삭기의 운전대에서 손을 놓으세요. 여러분의 작은 손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손이 될 것입니다.


태그:#4대강, #함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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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말이 적어야 하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하고, 머리에 생각이 적어야 한다. 현주(玄酒)처럼 살고 싶은 '날마다 우는 남자'가 바로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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