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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이 올려다 뵈는 남부면 도장포 마을에 왔습니다. 조금 전 노부부 사는 집에 방 한 칸을 빌려 여장을 풀었습니다. 창밖으로 해금강 가는 선착장이 있는 작은 포구가 보입니다. 날이 늦어 우도와 해금강 유람은 내일 하렵니다. 

지도로만 보던 섬에 직접 와 보면 언제나 '아차' 싶습니다. 섬을 너무 얕본 것입니다. 반나절이나 길어도 이틀이면 속속 훑어보고 떠날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럴 수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간곡마을에서 본 일출
 간곡마을에서 본 일출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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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하루 온전히 쉰 덕분에 새벽 일찍 눈을 떴습니다. 섬의 일출이 시작되려던 찰나였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본 일몰도 근사했지만 일출은 또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양팔을 벌려 해의 기운을 받았습니다.

살갑게 대해준 펜션 주인 내외에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아침 7시의 섬 풍경은 갓 세안을 마친 피부고운 청년 같았습니다. 어딜 봐도 눈이 맑아지는 듯 했습니다. 해는 구름 뒤에 숨어 아직은 준비운동 중인 듯 했습니다.

칠천도 앞까지 차를 태워주신 부산 아저씨.
 칠천도 앞까지 차를 태워주신 부산 아저씨.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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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기분을 만끽하고 슬슬 땀이 맺힐 때쯤 픽업을 했습니다. 관포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지나가는 용달차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자전거를 실으려면 일반 자가용은 곤란합니다. 선뜻 차를 세워준 사람이 반갑게도 동향 사람이었습니다. 구수한 인상의 중년 아저씨였는데 주말이면 늘 여행을 다닌다 했습니다. 덕분에 칠천도 초입까지 편히 왔습니다.

칠천도는 다리로 이어진 섬 안의 섬입니다. 때묻지 않은 자연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곳입니다. 바닷물 속 돌맹이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습니다. 칠천교에서 마주보는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왜군에 대패해 물러나고 이순신이 백의종군한 전터이기도 합니다. 후세에 영웅으로 칭송될지라도 싸우고 죽는 일은 결국 애달픈 일입니다.

칠천교에서 바라본 사연많은 바다
 칠천교에서 바라본 사연많은 바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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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교 지나 물안 해수욕장 방향으로 섬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옛 이름이 옆개인 물안 해수욕장은 고즈넉하니 가족이나 연인과 같이 오면 좋을 곳입니다. 특히 조용한 해변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이맘때(7월15일부터 8월 초까지)가 적기입니다. 해안가 매점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햇반과 사발면을 사고 김치는 공짜로 얻었습니다. 그것만도 족한데 콧수염이 멋진 주인 아저씨가 직접 잡아 삶은 담치(홍합) 한 냄비를 가져다 줬습니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오면 좋을 7월의 물안 해수욕장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오면 좋을 7월의 물안 해수욕장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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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포마을에선 밭일이 한창이던 중년부부를 만났습니다. 타지에서 부모님 또래 분들을 보면 그냥 반갑습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느냐 했더니 아저씨가 "그럼 보내줘야지" 했습니다. 그렇게 주소와 연락처를 나누고 다시 오면 한 밤 재워 주겠다는 약조까지 받았습니다. 길이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2시간여 만에 칠천도에서 나와 30여 분쯤 후에 다시 픽업을 했습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수십 미터의 고지대를 자전거로, 그것도 이 무더위에 달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탄소똥' 배출을 되도록 자제하고 있으나 무사히 여정을 잇기 위해선 융통성도 필요합니다. 차로도 1시간을 넘게 달려 서이말 등대가 있는 공곶이를 거쳐 학동 흑진주몽돌해변에 도착했습니다. 

칠천도 관포마을에서 만난 인연들
 칠천도 관포마을에서 만난 인연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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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점심 때고 더위가 절정이라 얼른 근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비빔국수를 먹고 팥빙수까지 추가로 시켜 오후 3시까지 해를 피했습니다. 여행 첫날 보수동 책골목에서 샀던 '돈키호테'를 꺼내 읽었습니다. 내용이야 대략 알지만 제대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달짝지근한 팥고물 입 안에 넣고 히죽히죽 웃어대니 옆사람이 힐끔힐끔 쳐다봤습니다.

'어느 무더운 7월의 아침, 날이 새기 전에 무장을 단단히 갖춘 후 그는 로시난테의 등에 높이 올라탔다. (중략) 그는 말이 원하는 대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야만 모험의 묘미가 있는 것이라 믿었다.'

로시난테를 자전거로, 말을 마음으로 바꾸면 내 여행과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과 겹치는 책 속의 인연이 제법 신기합니다.

학동에서 도장포 마을 가는 도로.
 학동에서 도장포 마을 가는 도로.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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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가 주춤할 때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학동에서 도장포마을까지 온 힘을 다해 왔습니다. 고속버스, 자가용과 함께 달리는 길이라 눈 앞의 비경에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이 구간이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곳 중 하나입니다. 사진을 찍고 또 찍어도 고개 넘으면 또 감탄인지라 가다 서다를 반복했습니다.

오후 6시쯤 도장포 마을에 왔으니 학동에서부터 2시간 30분쯤 걸렸습니다. 해금강 가는 배는 이미 끊겼습니다. 오후 5시가 막배라 했습니다. 한 이틀이면 되겠지 했는데 거제도에서 사흘째 밤을 맞습니다. 아마도 닷새 되는 날에 섬을 나가지 싶습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
 "오르막길 내리막길"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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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오는 길에 물통을 떨어뜨려 깼습니다. 배낭 묶은 짐판 밧줄에 끼워뒀는데 달리는 중에 빠져버렸습니다. 제주일주와 두 번의 일본여행 때도 함께 했는데 물건이라도 정이 들어 아쉽습니다.  

제주일주와 두 번의 일본 여행을 함께 한 물통
 제주일주와 두 번의 일본 여행을 함께 한 물통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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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국내여행, #거제도, #칠천도, #돈키호테, #바람의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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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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