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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농사 4년째. 그런대로 요령도 생기고 재미를 붙여가는 중이지만 고추 농사만 나오면 어려워진다.

첫 해에 고추모종 100주를 심었으나 풋고추만 따먹는 것으로 끝내야 했다. 열리는 양으로 봐서는 백여 근의 붉은 고추를 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가졌는데 고추가 익기 전에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농사를 처음 시작한 자랑도 할겸 의기양양하게 풋고추를 솎아(?) 이웃과 직장 동료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만 남은 농사였다.

다음해는 50주만 심었다. 아예 처음부터 우리 가족이 풋고추나 먹고 고추 장아찌나 담을 양만 된다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병도 해걸이 하는 것인지 그 해는 병이 늦게 오는 바람에 한두 번 김치 담글 정도의 붉은 고추도 맛볼 수 있었다.

지난해(2009년)에는 비닐하우스 안에 50주, 텃밭에 50주씩 100주의 고추를 심었다. 후끈한 비닐하우스안에서 아내와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노린재라는 고약한 벌레를 일일이 손으로 잡아내고 알이 슨 잎은 따내어 주었다.

겨우 10근 정도의 태양초를 만들었는가 싶었는데 고추가 막 익을 무렵 마을에 탄저병이 돌았다. 목초액을 희석하여 뿌리고 소주와 식초를 탄 물을 뿌렸어도 병은 막을 수 없었다. 농약을 하지 않았던 우리 고추밭은 무방비 상태에서 허망하게 당하고 만 것이다.

땅을 살리는 친환경 농사를 실천하겠다는 각오로 제초제는 물론 화학 비료조차 뿌리지 않겠다고 시작한 농사였다. 야콘, 고구마 콩 등 다른 작물은 농약 없이 비교적 성공이었다. 그러나 열무, 배추 그리고 고추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열무는 싹이 나오면서 벌레에게 당했고 배추는 자라는 도중에 배추애벌레의 밥이 되고 말았다. 특히 고추는 열무나 배추처럼 씨만 뿌린 것이 아니라 두둑을 치고, 멀칭을 하고, 모종을 사다 심고, 지주를 세워서 묶는 작업까지 많은 품을 들였음에도 결과는 늘 좋지 못했다. 그래도 고추 농사로 용돈을 벌자는 것이 아니기에 풋고추만 먹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는데 금년의 경우는 초장부터 말씀이 아니다.

건강이 좋아진 아내가 자신감을 회복하여 학교로 돌아간 것은 좋은 일이나 노린재의 극성을 막을 도리가 없었으니 그 점이 문제였다. 나름대로 잡기도 했으나 몇 차례 모임과 또 비오는 날이 많아 텃밭에 못 간 것이 화근이었다. 고추의 즙을 빨아먹는다는 노린재라는 벌레는 고약하기 짝이 없다. 고추밭은 완전히 노린재의 세상이 되어버려 손을 쓸 수 없었다.

"친환경 하자고 다짐한 사람이 약을 치다니, 그럴 순 없다. 차라리 풋고추나 먹고 말자."
고 생각하다가도 풋고추마저 구멍이 뚤려 하얗게 말라죽는 것을 보면서, 
"어차피 사 먹는 고추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 차라리 우리가 조금 더 안전한 약을 뿌려 조금이라도 건지는 편이 나은가?"하는 생각 때문에 안절부절.

약을 쳐? 말아? 쉽게 답이 안 나오는 갈등. 약을 뿌리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말에 농약상까지 간 적도 있지만 약의 성분이 잎과 줄기에까지 스며들어 열매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에 빈 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생각 끝에 목초액과 소주를 섞어 뿌렸으나 효과는 전무했다. 그 사이에 막 붉어지는 고추조차 노린재의 습격으로 구멍이 뚫려 마르기 시작했다.

신념과 현실의 괴리 속에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벌레를 못 당한 고추 신념과 현실의 괴리 속에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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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우리 고추를 본 이웃 송씨 아주머니도

"요즘 농약 안 친 고추가 어디있느냐?"
"시장에서 농약 안 친 고추를 사먹을 수 없다."
"잘 된 고추를 버리겠느냐?"고 하면서 자신이 쓰던 약을 들이밀었다. 독한 마음으로 약통을 짊어졌다. 그러나 약을 쳤음에도 노린재는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기왕에 버린 다짐, 다시 한 번 더해보자. 농협에 갔더니 친환경 농약이라고 '스파이더'라는 약병을 내민다. 24일, 두 번째 약통을 짊어졌다. 비닐하우스 안은 물론 밖의 텃밭에도 뿌렸다. 잠시 후 강한 비가 내리는 바람에 텃밭에 심은 농약은 허사로 끝났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찜찜했던 마음이 씻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25일), 비닐 하우스안의 고추만 살폈더니 노린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꼭 소중한 것을 놓친 기분이다. "우리가 조금 덜 친 것으로 위안을 삼자"는 아내의 말에도 왜 이렇게 마음은 개운하지 못하다. 환갑 나이 값을 못하는 것도 같다.

탄저병 예방약은 더 독하다는데, 아직 병은 오지 않았지만 탄저병에 대한 예방도 해야 하나? 좋아하는 열무 농사를 포기 했듯이 내년에는 아예 고추 농사를 포기해야 하나? 고추농사, 참 어렵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추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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