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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산에서 내려다 본 알람브라궁전
▲ 알람브라 궁전 이베산에서 내려다 본 알람브라궁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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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비카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비카 언덕에 자리 잡은 성채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한 필의 말이 멈췄다. 순간, 성문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100여 m에 이르는 벼랑에 축성된 성곽은 그라나다를 휘감아 도는 '따로'강이 품고 있었다. 천혜의 요새다.

"여왕 폐하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 어서 문을 열어라!"

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처녀의 몸으로 까스띠야 왕에 등극하여 아라곤과 포르투를 통합하고 이제 나스르를 향하여 칼끝을 겨누고 있는 이사벨라 여왕의 힘이 피부 가까이 느껴졌다. 전갈을 받은 무하마드12세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밖에서 보면 평범한 토성이다.
▲ 알 카사바 성벽. 밖에서 보면 평범한 토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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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구나."

똘레도와 꼬르도바 그리고 쎄비야를 파죽지세로 석권하던 까스띠야 군의 함성이 귓전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사자의 목을 쳐 돌려보낼 것인가? 친서를 받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허나, 사자의 목을 쳐 돌려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승산 없는 도발이며 이슬람의 혼이 깃들어 있는 궁전의 파괴를 의미한다는 것이 자명했다.

성채를 방어하던 대포. 성채에 전시되어 있다.
▲ 홍이포 성채를 방어하던 대포. 성채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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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성문이 열렸다. 성안으로 들어선 사자는 눈을 의심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돌과 흙벽돌을 석회로 쌓은 보잘 것 없는 성채였지만 그 폭이 3m에 이르렀다. 성벽을 파괴하는 포를 아무리 쏘아대도 끄덕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자는 대사의 방에 안내되었다. 벽과 기둥의 이슬람 무늬가 경이롭다. 선과 선을 이으며 대칭을 고수하는 이슬람 문양. 끊어지는 것 같았지만 공간을 뛰어넘어 다시 이어지는 선과 선.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의 기하학적 선의 반복. 이슬람 문양은 영원을 추구하는 마법 같기도 했다.

8천개의 삼나무 조각으로 모자이크 된 이슬람의 천계(天界)
▲ 대사의 방. 8천개의 삼나무 조각으로 모자이크 된 이슬람의 천계(天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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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위로 돌렸다. 천정 돔이 시야에 들어왔다. 8천개의 삼나무 조각으로 모자이크 된 이슬람의 천계(天界)가 사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치밀한 수학적 계산으로 분할된 천정은 빛이 들어오는 각도마저 디자인되어 있었다. 창문 사이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현란했다. 이 방에 발을 들여놓은 조공국 왕과 사절들은 그 찬란함에 정신을 잃고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을 직접 알현하고 싶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경거망동인가? 예전 같으면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한 망발이었다. 나스르 왕조가 번성했을 때, 조공을 바치던 주변 왕들이 궁전을 방문하여 대사의 방에서 왕의 알현을 기다렸다. 후궁과 시녀를 희롱하던 왕이 '돌아가라'하면 왕의 얼굴도 못보고 나오던 왕궁이다. 한마디로 주변 군소왕국들을 떨게 했던 이베리아반도의 맹주 나스르 왕조였다.

"여왕 폐하의 친서입니다."

서찰을 받아든 무하마드 12세의 두 손이 떨렸다. 이사벨라 여왕이 누구인가? 천하의 여걸이 아닌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선 결혼도 정략을 택했고 이베리아 반도 통일을 위해선 어머니의 모국, 포르투를 침공한 냉혈 여인이 아닌가. 두려움이 밀려 왔다.

10km이상 떨어진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을 궁전으로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 아라야네스 정원. 10km이상 떨어진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을 궁전으로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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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의 제1강국 까스띠야 왕궁에 고고의 성이 울려 퍼졌다. 포르투에서 시집온 이사벨 왕후가 공주를 낳은 것이다. 1451년 4월 22일이다. 왕후는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 이사벨라를 물려주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이사벨라의 아버지 후안 2세는 수상 루나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주지육림에 빠졌다.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위기를 느낀 이사벨라 왕후는 전처 소생 엔리케 왕자와 손잡고 루나 수상을 처형했다. 그리고 엔리케를 왕위에 밀어 올렸다. 왕위에 오른 엔리케는 왕후의 정치력에 위협을 느꼈다.

"언젠가는 나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알폰소를 등극시킬 것이다."

기둥에 각인된 이슬람 문양과 문자
▲ 문양 기둥에 각인된 이슬람 문양과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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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떨던 엔리케는 왕후를 이레발로 유배 보냈다. 졸지에 어머니와 함께 유배 길에 오른 이사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배지에 도착한 왕후는 자신의 성정을 이기지 못해 정신 착란증세를 보였다. 실성한 어머니와 나이어린 동생을 보살피며 유배 아닌 유배생활 하던 이사벨라는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깊은 신앙에 빠져 들었다. 천주교다.

부전자전일까? 정적을 유배 보낸 엔리케는 국정을 살피지 않고 황음에 빠졌다. 귀족들의 횡포는 도를 더해갔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인내의 한계점에 이른 백성들이 봉기했다. 내란이다. 3년간의 내전은 알폰소를 추대한 반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현실을 직시한 이사벨라는 '나는 엔리케를 지지한다'라고 선언하고 궁으로 들어갔다.

백만 대군보다 더한 원군을 만나 위기에서 탈출한 엔리케는 이사벨라를 포르투에 시집보내 안정을 추구하려 획책했다. 이른바 혼맹(婚盟)이다. 이에 이사벨라는 '아니오'라고 분명히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고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에게 비밀리에 청혼했다. 당시 여자가 남자에게 청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발칙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실행에 옮겼다.

꼼수를 포기하지 못한 엔리케가 이번에는 프랑스와 혼담을 추진했다. 속도도 빨랐다. 위기를 직감한 이사벨라는 페르난도에게 밀사를 보냈다. 이사벨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페르난도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치열한 접전 끝에 엔리케는 패주했다. 무주공산이 된 까스띠야는 이사벨라를 기다렸고 페르난도 왕자는 부군으로 변신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라를 얻고 지아비를 맞이한 것이다.

아벤세라헤스의 방이라고 불리며 종유석처럼 흘러내린 조각에 2개로 이루어진 한 쌍의 창문이 각각 다른 각도에서 햇빛을 비추고 있다. 아베세라헤스 가의 청년들을 몰살시킨 방이라 하여 '비극의 방' 이라고도 불린다.
▲ 접견실 돔. 아벤세라헤스의 방이라고 불리며 종유석처럼 흘러내린 조각에 2개로 이루어진 한 쌍의 창문이 각각 다른 각도에서 햇빛을 비추고 있다. 아베세라헤스 가의 청년들을 몰살시킨 방이라 하여 '비극의 방' 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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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아라곤과 통합한 까스띠야는 포르투를 침공하여 평정했고 이사벨라는 여왕으로 등극했다. 이사벨라는 욕심이 생겼다. 에스파냐 통일이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가스띠야, 아라곤, 포르투, 그라나다 네 왕국으로 갈라져 있었다. 여세를 몰아 국토회복운동에 나선 이사벨라는 그라나다를 손아귀에 넣었고 이제 마지막 이슬람 거점 알람브라만 남은 것이다.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전까지 궁궐을 떠나라. 거역하면 그대의 목은 내가 거둘 것이며 성채는 파괴될 것이다."

최후의 통첩이었다. 무하마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사항전 할 것인가? 성을 두고 떠날 것인가?

그러나 묘책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왕비가 갇혀 있었던 감옥
▲ 감옥 왕비가 갇혀 있었던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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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떠날 것이다. 채비를 갖추어라."

무하마드 12세가 선언했다. 지키고 싶었다. 알람브라 궁전이 어떤 곳인가? 유수프 할아버지가 창건했고 무함마드 할아버지가 가꾸어온 이슬람 문명의 총화가 아닌가? 방법만 있다면 송두리째 가지고 지중해를 건너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이슬람 문명이 알알이 녹아있는 궁전이 자신의 눈앞에서 파괴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안타까움이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부리나케 준비를 갖춘 무하마드가 말에 올랐다. 수많은 신하와 후궁들이 그 뒤를 따랐다. 허나, 투기 혐의로 무하마드의 미움을 산 왕비는 궁전 감옥에 갇힌 채 성채를 빠져 나오지 못했다. 훗날, 전화(戰禍)로부터 알람브라를 구한 것은 무하마드 12세다. 아니다. 알람브라를 사랑했던 왕후다. 논쟁의 출발점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일행이 알바이신 언덕에 올랐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온 태양이 알람브라에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하마드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나라를 잃은 슬픔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저 아름다운 궁전을 다시는 못 보는 것이다."
무하마드가 되뇌었다. 이 말은 무어인의 한숨(Ultimo Suspiro del Moro)으로 유럽인에 회자되었다.

1812년 프랑스인 세바스챤 백작은 알람브라 하계 별장에 정원을 가꾸었고 분수를 설치했다.
▲ 세바스챤 1812년 프랑스인 세바스챤 백작은 알람브라 하계 별장에 정원을 가꾸었고 분수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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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가 떠난 알람브라는 까스띠야 군이 접수했고 이사벨라는 파괴하지 말라 명했다. 무하마드가 저항하여 전투가 벌어졌다면 이베리아 반도에 꽃피웠던 이슬람 문명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 후 카를5세가 알람브라 궁전에 르네상스식 궁전을 지었으나 이슬람 건축과 격이 달랐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던 시기. 알람브라 궁전 하계 별장은 프랑스화 되었다. 이슬람문명과 그리스도 문명의 공존이다. 세월이 흐르며 보존과 파괴를 거듭해오던 알람브라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

알람브라의 야경. 그 옛날 영화를 말해주는 것 같다.
▲ 야경 알람브라의 야경. 그 옛날 영화를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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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쇠망과 함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무어인들은 호전적인 베르베르인들을 앞세워 북아프리카를 석권하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했다. 비옥한 안달루시아 지방을 장악한 무어인들은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호령했다.

700년간 통치한 무어인들은 수(數)는 물론 천문 관측과 건축기술을 에스파냐에 남겼다. 이 문명은 훗날 유럽 과학문명의 자양분이 되었으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항해술 역시 이슬람 항해술이 그 원천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1492년 12월. 이베리아 반도를 떠난 이슬람인들은 21세기 현재까지 유럽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 세력의 유럽 상륙은 그리스도 세력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정서와 무관치 않다. 그 흐름은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포연이 자욱한 오늘 현재 진행형이다.

덧붙이는 글 |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알람브라궁전은 유적 보호를 위해 하루 입장객을 7600명으로 제환하고 있다. 관람하실 분은 인터넷 예약이 편리하며 성수기 현장 매표는 상당 시간을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다.



태그:#알람브라, #그라나다, #스페인, #이사벨라, #무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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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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