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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19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전용기에 올랐다. 제주행. 소련 정상으로서 최초의 한국 방문이다. 비행기는 남북 휴전선을 넘고, 이념의 갈등을 넘어, 평화의 섬 제주에 닿았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러시아와 제주의 인연은 이렇게 역사의 획을 그으며 시작됐다.

 

행정안전부가 올해 초 조사한 외국인주민 실태조사에 따르면, 제주에는 26명의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 중에는 결혼 이주 여성도 있지만, 대학이나 호텔, 관광업 등에 종사하는 러시아인도 많이 있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그들만의 문화를 공유하며, 제주사회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해 살고 있다.

 

그래서 5월 말 제주에서 열린 다문화 축제에서 러시아 코너에 더욱 눈길이 갔다. 러시아 전통 의상과 음식 그리고 붉은 색감이 눈에 띄는 작은 인형들. 그 실마리를 찾다 보니 그 끝에 제주 한라대학 관광러시아어과 인나(Inna Ishmurzina) 교수가 있었다.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에 푹 빠졌어요"

 

인나 교수는 기러기 엄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경제대학 교수로 재직 중 교환학생으로 온 한라대학 학생들과 만나면서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 러시아에 왔던 학생들은 제주로 돌아가 한라대학에서 인나 교수가 강의를 했으면 좋겠다고 추천했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기로 뜨겁던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그녀는 대학에서 러시아 언어와 문화, 역사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기자가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 선반에 러시아 전통 인형들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러시아 전통의상이 걸려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한라대학 관광러시아어과 김신효 학과장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그녀가 제주에서 산 지도 어느덧 8년이다. 그래서 때때로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지만 그럴 때면 제주에 있는 러시아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간다고 한다. "보통 2주에 한 번씩 모이는데, 모여서 사는 얘기도 하고 제주에 대한 정보도 주고받고 그래요." 그녀는 이런 모임을 통해 제주를 알아가고, 제주에 새로 정착한 러시아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지난달 15일에는 그녀의 외동딸 크시니아(Kseniya Ishmurzina)가 제주를 찾았다. 13살부터 제주에 놀러 왔던 크시니아는 봄과 가을마다 놀러 왔었지만 대학에 입한 한 후부터는 매해 한 번씩 제주를 찾았다. "제주에 오면 항상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다워요." 그녀는 앳된 얼굴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녀는 대학에서 한국어 강좌를 수강해 서툴지만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기자가 모녀를 만났을 때는 오후 4시가 다 된 시각이었는데, 그들은 이미 해수욕장을 다녀와 햇볕에 붉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크시니아는 "제주에 있으면서 이호, 함덕, 협제, 삼양 해수욕장을 다녀왔다"며 "제주도 해수욕장은 바로 옆에 있는 해수욕장인데도, 삼양은 검은색, 함덕은 하얀색이라서 놀랐다"고 말했다. 다음 날에는 서귀포 쪽으로 갈 예정인데, 그야말로 해수욕장을 다 돌아볼 작정이었다.

 

러시아는 흔히 추운 지방으로 알고 있지만, 그녀의 고향이기도 한 블라디보스톡 같은 러시아 남부 지방은 여름에 무덥다고 한다.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도 바다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크시니아는 "제주의 바다는 정말 깨끗하고, 휴양하기에 아주 좋다"며 "앞으로도 계속 제주에 놀러오고 싶다"고 들뜬 모습으로 말했다.

 

이 모녀는 제주에서 한 달간 머문 후 오는 16일 부산으로 올라가 사흘간 여행하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예정이다. 인나 교수는 오랜만의 고향 방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크시니아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주에서 가장 불편했던 게 뭐나고 물으셨죠? 큰 지네가 있다는 거예요. 저쪽에 있었어요." 모녀의 웃는 낯에 제주가 더욱 아름답게 비쳤다.

 

"오염되지 않은 살아있는 자연이 제주의 매력"

 

제주의 자연에 빠져 자연을 천직 삼아 살고 있는 러시아 남자도 있다. 대한민국 최남단 따뜻한 서귀포에서 9년 째 살고 있는 빅토르(Victor Ryashentsev) 씨는 발품을 팔아 관광업을 하고 있다.

 

'제주에코'라는 여행사를 운영하는 빅토르 씨는 말로 사는 직업인지라 한국말도 능숙했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문의전화가 끊이질 않았다.

 

러시아 극동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그는 "대학시절인 1990년대에만 해도 한국어과는 인기 학과가 아니었다"며 "선배들은 주로 북한에 유학을 가서 한국어를 배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과의 한소 정상회담을 계기로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때 저는 일본어와 중국어의 대안으로 한국어를 선택했는데 지금은 그 선택이 '선경지명'이었던 것이에요."

 

1997년 연세대에서 교환 강사로 출강을 했던 그는 시간이 날 때면 제주도에 여행을 다녔다. 그 때 제주의 바다를 보았고, 그는 제주의 바다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제주 바다를 아주 좋아해요. 6월부터 9월까지 러시아 관광객이 여름휴가로 한국으로 오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데, 제주도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지요."

 

그 뿐만이 아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제주 감귤밭의 주황 물결을 보면 탄성을 자아낸다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 감귤을 빼놓지 않고 먹을 만큼 귤을 좋아해요. 그래서 제주에 왔을 때, 주황색으로 물든 감귤 밭에 완전히 매료되죠." 하지만 그는 감귤 밭이 줄어들고 있는 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런 아름다운 장관을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걱정은 제주의 천혜의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깨끗한 자연, 오염되지 않은 살아있는 자연이 제주의 매력이에요. 저는 케이블카는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를 계속 만들려는 것 같아요." 제주도는 비양도 케이블카 건설 문제가 논란이 돼 외국인들도 관심이 많다.

 

그럼 근심 속에 그는 제주 지키미를 자처하고 제주를 세계에 알리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제주가 '세계7대경관'에 선정될 수 있도록 홍보하고 있는가 하면, 세계7대경관 홈페이지에 제주바다 수중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주위클리(The Jeju Weekly)에 영어 기사로도 실립니다.


태그:#제주, #러시아, #바다, #해수욕장,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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