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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년의 세월로 접어들면서 늦잠을 자본 적이 거의 없지 싶다. 더러 과음을 한 때도 있고, 특별한 일로 늦게 잠든 경우들도 있지만, 날이 밝아서야 눈을 뜬 적은 정말 많지 않다. 유난히 새벽을 좋아했다. 특히 어둠이 걷히고 온갖 사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좋아하고 사랑했다. 그 시간에는 늘 깨어 있고자 했다.

 

 그 덕분에 색다른 사유들을 얻은 적도 많다. 요즘에는 좀 더 유다른 감미로운 질감들을 얻곤 한다. 새벽 3시나 4시쯤 일어나면 우선 세 개의 방을 살며시 들여다보곤 하는데, 그 일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누린다.

 

 1.

 

 방학이라 대학생 아이들이 집에 와 있는 덕에 잠자리 변경이 생겼다. 안방의 내 잠자리를 딸아이에게 내주었다. 그래서 모녀가 함께 잔다.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모녀가 함께 잠잘 수 있는 세월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 세월이 다 가기 전에 방학 때만이라도 모녀가 함께 자는 것이 좋지 않겄남."

 

 아내는 동의했고 딸아이도 좋아했다. 할머니 퇴원에 맞춰 집에 내려온 딸아이는 엄마가 방학을 하면 곧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다. 모녀는 사이좋게 나란히 누워 연속극도 보고 야구도 보고 월드컵 축구도 본다.  

 

 나는 건넌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건넌방에서 아들 녀석과 함께 잔다. 올 여름 처음 아들 녀석과 잠자리를 함께 하면서 마누라에게 했던 것처럼 나 자신에게도 말했다.

 

 "부자가 함께 잠잘 수 있는 세월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 세월이 다 가기 전에 방학 때만이라도 부자가 함께 자는 것이 좋지 않겄남."

 

 

 새벽 서너 시쯤 일어나면서 아들 녀석의 잠자는 모습을 잠시 들여다보기도 한다. 베개를 바르게 베어주기도 하고, 이불을 잘 덮어주기도 하고, 볼을 두어 번 가볍게 토닥거려 주기도 한다. 때로는 볼에 살며시 입을 맞추기도 한다. 아빠보다도 키가 큰, 다 큰 아들 녀석의 볼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내가 우습기도 해서 혼자 키득키득 웃기도 한다.

 

 이 녀석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품안에 바짝 끌어안고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잠을 자곤 한 때가 엊그제인데, 그 세월이 언제 어디로 다 달아나 버렸지? 그런 생각을 하며 새삼스럽게 세월 덧없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오늘의 이 세월도 얼마 남지 않았음이 더욱 확연히 느껴져서 괜히 한숨을 머금기도 하고….

 

 방을 나오면 우선 가까운 안방을 들여다본다. 여름철이라 문을 여는 수고는 필요 없다. 모녀의 잠자는 모습이 평화롭다. 평화로움에 취하며 엄마보다 훨씬 키가 큰 딸아이의 갓난아기 적 모습도 떠올려본다. 2.5Kg 체중으로 세상에 나와 처음 엄마 젖을 빨 때 뭉툭한 젖꼭지를 쉽게 물지 못해서 모두 애를 먹었지. 아이도 애를 쓰고, 엄마도 애를 쓰고,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지켜보는 나도 할머니도 애가 탔지.

 

 몇 번 실패 끝에 아이가 드디어 젖꼭지를 물었을 때 "물었다, 물었다!"라고 작게 환성을 지르던 아내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뇌리에 명확하다. 힘들여 젖을 빠는 갓난것의 이마에 땀이 몽글몽글 맺혔던 것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젖 먹던 힘'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확실한 질감으로 떠올랐던 기억도….          

 

 다음에는 거실을 가로질러 어머니 방으로 간다. 지난 8개월 동안 어머니가 없었던 어머니 방이었다. 낮에는 계속 빈 방이어야 했고, 밤에 조카아이만 머무는 방이었다. 올해 중1인 조카아이도 그 방에서 매일 밤 자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혼자 자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는 학원 공부를 마치고 아빠 집에 가서 자고는 아빠 출근길에 큰집에 오는 날이 많았다. 또 방학 때는 아예 아빠 집에 가서 생활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머니 방은 거의 늘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랬던 방에 어머니가 지난 5일 다시 돌아오셨다. 8개월만의 귀환이었다. 처음에는 이 방에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무거운 의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꼭 돌아오시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청소만을 했을 뿐 뭐 한 가지도 치우거나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8개월 만에 기적같이 완쾌되신 몸으로 돌아오시어 당신 방에서 평안히, 깊은 잠에 빠져 계시는 노친 모습을 본다. 그 옆에서 자고 있는 조카아이도 평온한 모습이다. 원상회복된 조손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더없이 안온해진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행복의 실체를 담뿍 안는 기분이다.

 

 2.

 

 안온한 기분을 즐기기 위해 한 번 더 세 개의 방을 차례로 잠깐씩 둘러본 다음 거실 소파에 앉아 혼자 기도를 한다. 아침에 가족 모두 함께 기도를 하지는 못한다. 함께 할 수 있는 기도는 식탁에 둘러앉아 하는 '식사 전/후 기도' 뿐이다. 아침기도는 각자 편한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그렇게 혼자 기도할 수밖에 없지만,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새벽 시간에 기도하는 일에서 남다른 행복을 느낀다. '가장'의 당연한 몫이라 생각한다. 기도를 하면서 우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감사는 곧 기원이기도 하다. 감사와 청원은 별개인 것 같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감사는 기원을 품고, 기원은 감사를 낳는다.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서도 다소곳이 맞아야 할 내일을 생각한다. 금세 지나간 시간들처럼 앞으로도 시간은 금세 지날 것이다. 시시각각 흐르는 시간 속에서 흐르고 있는 현재를 살 뿐이다. 그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 집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겨날 것이다. 기쁜 일들과 슬픈 일들이 날줄과 씨줄의 형태를 이루기도 할 터이다.

 

 올해 87세이신 노친께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마지막 시간이 올 터이고, 건강이 좋지 않은 내게도 언제든 운명의 시간은 올 것이다. 그 시간이 언제쯤 올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을 뿐이다. 내가 오늘 이렇게 새벽마다 세 개의 방을 들여다보며 유다르게 누리는 평온과 행복도, 또 내 차에 가족들을 태우고 덕산온천을 가거나 먼 길 나들이를 할 때마다 담뿍 안는 충만한 즐거움도 언젠가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소곳한 마음이다. 그 어떤 일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것으로 믿고 다소곳이 승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 생명뿐만 아니라 삶 전체도 내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살아왔던 그 모든 시간은 하느님의 것이었고, 내 삶 전체는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임을 되새겨야 한다.

 

 기도는 '승복'을 되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감사, 찬미, 참회, 청원 등 네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승복'을 낳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도는 승복을 낳아 키우는 것이고, 그러므로 온전한 신앙은 승복이다.

 

 그 승복의 자세로 내일을 예비해야 한다. 그 승복 안에서 승복의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다. 평온과 행복 속에서 승복의 자세로 기도하면서도 많은 불행한 이들을 생각한다. 며칠 전 노친께서 퇴원하시던 날 마무리한 일, '효(孝)'를 주제로 한 초중고 학생들의 많은 글을 읽으면서 접했던 사연들을 떠올린다.

 

 몇몇 학생들의 글 속에는 눈물겨운 사연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혹은 실직에 따른 힘겨운 생활고, 부모의 기나긴 병고 또는 갑작스런 죽음에 의한 생활의 어려움, 가출한 채 오래 소식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할머니와 살아가는 이야기 등등…. 그 슬픈 사연들을 읽으며 한숨짓고 눈물을 머금기도 해야 했다.

 

 요즘에는 기도 중에 인천대교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도 떠올린다. 목숨을 잃은 13명 중에는 일가족도 있었다. 한꺼번에 부모와 형과 누이동생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여덟 살 소년을 생각하며 가슴 에이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불행한 일들, 슬픈 처지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일이란 아무것도 없기에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다.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나 자신을 위안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다.

 

 방 안 잠자리에 앉아 기도하는 날도 있고, 거실 소파에 앉아 기도하기도 하고, 십자고상과  성상들이 모셔진 기도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쓰레기 버리는 일을 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또 새벽 별빛을 보며 기도를 하는 날도 있다. 아침에 하는 기도는 '아침기도', '삼종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수호천사께 바치는 기도', '수호성인께 바치는 기도' 등이다.

 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정갈해진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부팅을 하고,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봉헌의 기도'를 올린 다음 또 하루의 여정을 시작한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고, 크고 작은 갖가지 변화를 만들어 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일이 오고 또 내일이 오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궁극'의 내일을 위하여….


태그:#가정의 평화, #아침생활, #가장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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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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