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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2 지방선거에는 전국적으로 1만여 명에 달하는 후보자들이 출마했다고 한다. 그중 한 사람인 경기도 안양시 바 선거구(달안동 부림동 관양 1, 2동)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했던 권혁록(62) 당선자.

 

권 당선자는 민주당 후보인 2-나 번으로 출마해 두 명을 뽑는 이 선거구에서 당당히 1등으로 뽑혀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이 선거구엔 한나라당 후보 두 명 민주당 후보 두 명이 후보로 나왔었다.

 

또 다른 민주당 후보인 2-가 번으로 출마했던 여성 후보자는 물론이고 한나라당 1-가 번 으로 출마한 후보까지 누르는 기염을 토했던 것.

 

권 당선자는 이 지역구에서만 네 번째 당선되면서, 이번 전반기 의장 후보로 유력시 되고 있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수도권에서 민주당 후보가 가번이 아닌 나번을 배정받을 경우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1등으로 당선된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인터뷰 해보았다. 인터뷰는 지난 24일 안양시 의회에서 있었다. 

 

- 먼저 당선을 축하드린다. 2-나번으로 출마해 1등으로 당선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던데 이렇게 당선된 비결이 있으면 말해 달라.

"지역민들과 항상 가깝게 지냈던 게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 같다. 지난 의원 임기동안 주민들 민원과 관련해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해결을 하려고 노력 했었다. 그리고 선거 기간 동안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잘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등으로 당선된다는 것은 꿈도 못 꿨다. 사실 2등이라도 당선된다면 고맙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1등으로 당선돼 지난 임기동안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해 주민들이 저를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저를 기억해 주신 주민들께 너무나 감사했다.

 

저는 민주당에 지금까지 35년간 뿌리를 내리고 활동을 했었다. 공천과정에서 가 번이 아닌 나 번으로 선거에 나가게 되었을 때 솔직한 심정으로 출마 포기 까지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만류했다. 당신은 나 번으로 출마해도 당선이 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런 말에 용기를 얻어 출마를 했지만 선거 초반에는 솔직하게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 3선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아내가 선거운동이나 지역 활동을 돕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나서더라. 새벽녘 몸이 아파서 도저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데도 5시만 되면 아내가 나를 깨워주고 함께 나갔다. 사흘씩이나 내리 비가 오던 지난 5월 25일 무렵에도 아내는 비를 흠뻑 맞으면서 저와 함께 선거운동을 펼쳤었다."

 

- 출마를 한 후보자들의 경우 최선을 다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 같고 그 정도 비결 말고는 다른 이유는 없었는가.

"노력이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니까. 자신이 최선을 다해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의정활동을 펼쳤다면 그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주민들이 한다는 것이고 그 잘잘못에 대해 결코 잊어먹지 않더라는 것이다. 결국 그 같은 평가가 이번에 열악한 상황에서도 1등으로 당선된 요인인 것 같다.

 

나는 술을 못 먹는다. 하지만 사람들 모이는데 가면 소주 한잔을 받아서 앞에다 가져다가 놓고는 아무리 늦은 시간까지라도 자리를 함께 해 준다. 또한 지역사업 이라고 한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실제 주민들한테 전화가 오면 자다가도 일단은 나간다. 민원 해결은 기본이다. 변전소 증축 문제를 가지고 갈등이 있을 때 앞장서서 중재 했던 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 즉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주민과 한 약속을 잘 지킨 것이 가장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선거 운동을 할 때도 '일 잘하는 의원', '경험 많은 의원'이 필요하다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했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유권자들과 악수한 후, 약속한다는 의미로 한분 한분과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걸었었다. 또 다른 승리 요인으로 저는 지역구에 사시는 권씨 문중 분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었다.

 

선거운동에 있어서는 로고송, 음향기기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좋은 장비를 사용한 것은 물론, 모든 선거 운동도 조직적으로 그리고, 운동원들도 최선을 다해줬었다. 연설문도 철저히 준비해서 호소력 있는 연설을 했었다고 자평한다. 다른 후보보다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잤다. 이런 내 모습 주민들도 인정 한것 같다. 공보물도 최대한 신경 써서 잘 만들었다.

 

부안 초등학교 운영위원장으로서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했었다. 그런 활동들에 대해  학부모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 줬던 것은 아닌가 한다. 거리 유세를 다니다 아이들이 '권혁록 아저씨다!'라고 소리치는 것을 볼 때, 아이들도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구나 싶더라.

 

동별 표를 분석해 보면 다른 동에서는 다른 후보들과 조금씩 밀리거나 조금 앞서는 정도로 나왔으나 개표 마지막에 열었던 부림동에서 몰표가 나왔던 것이 가장 큰 승리 요인이었다. 부림동에서만 2500여 표 정도 다른 후보들보다 앞섰던 것 같다. 이는 제가 지난 12년 동안 부림동을 위해서 남다르게 봉사활동등을 펼쳐 왔었는데 이에 대한 주민들의 화답이었다고 생각한다."

 

- 선거 끝나고 입원 했다는데. 도대체 얼마나 강행군을 했기에 그렇게 되었는가.

"내 나이가 올해 예순 둘이다. 나이가 있는데도 선거 기간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뜨거운 태양볕 아래에서 계속 무리한 게 결국 입원까지 불러왔던 것 같다. 실제 선거운동 기간 중에는 하루 한 끼 먹는게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라면으로 한 끼를 때워야만 했다. 3D업종 종사자들보다 더 힘든 일을 하는 게 바로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긴장된 보름여 동안의 선거운동아 끝나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사무실에서 현기증이 나면서 쓰러졌다. 곧 바로 일어나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원에 입원한 후 각종 검사를 받았지만 별 다른 병은 아니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못 먹고 몸을 혹사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던 2주간 동안에는 포도당 주사기를 몸에 꽂은 채 지내야만 했다. 2-나 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까지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총 다섯 번의 출마 경험 중에서 이번이 최고로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당락을 떠나서 내 자존심을 걸려 있기에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 또 다시 그렇게 하라면 두 번은 못할 것 같다."

 

- 통상적으로 후보자들은 자신이 꼭 당선된다고 확신하는 것 같더라. 권 당선자의 경우 선거 운동을 하면서 승리를 예감한 적은 있는가.

"못했다. 2등만 해서 당선만 돼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투표가 모두 끝나고 개표 할 때까지도 그랬다. 실제로 첫 개표 할 때까지만 해도 제가 떨어질 줄 알았다. 개표 당일 개표함 개함은 관양 1동, 2동 순으로 진행되었다.

 

관양 1동에서 개표결과 2등이었다. 이때 당선 된다고 생각은 들었는데 곧 바로 이어진 달안동 투표소의 투표함을 개함했을 때는 네 명의 후보 중 꼴등이었다. 아찔했다. 선거사무실 베란다로 나간 후 줄 담배만 피워댔다 이어서 4개동 중 마지막으로 부림동을 개표하는데 압도적인 표가 나왔다. 그 때부터 1등이 되었다. 부림동이 나를 살린 것이다. 주민들에게 감사한다."

 

- '2-나'번 으로 출마가 결정되었을 때 무척 실망 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사실 이해 할 수 없었다. 모든 주변 상황이 나 번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민주당 기여도를 봐서도 그렇고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그 같은 결과에 대해 그동안 인간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사람 관리 하는 게 정말로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 안양시 시의회 의장에 출마 하셨다는데.

"7월 2일 날 결정된다. 민주당 12명이 합의 추대 했다. 양당이 어느 정도 합의 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결과는 2일 날이 되어야 알 것 같다. 아직은 말 할 단계가 아니다. 만약 제가 의장이 된다면 초선, 재선 의원 위상 문제나 의원 활동 특히 여성의원 예우 문제 등에서 지금까지 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시간을 두고 의원님들과 상의 할 것이다. 바람직한 의회상을 정립하는 것은 물론 열린 의정을 펼침으로서 시민과 각 시민사회 단체의 대의 기관으로서 그 위상을 새롭게 세울 것이다. 또한 주민들의 민원을 우선 하는 '생활 정치'를 으뜸가는 화두로 삼고자 한다. 

 

시 집행부와 관계하는 '예산심의' 와 '행정감사' 등에 있어서도 의회가 시 집행부와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에서 쌍두마차로 이끌어 나가고자 한다. 여야를 초월해서 의장으로서 의원들의 공약을 해결 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겠다.

 

의회 사무국에 대한 관리 감독에 있어서도 의원들의 눈높이에 맞게 하겠다. 특히, 의원과의 관계개선, 예우문제는 물론, 각종 '민원' '행정지원' '지역사업' 등에 있어서도 의원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의 업무지원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고자 한다. 지난 12년간 한나라당 소속 의회 의장과는 확연하게 다를 것이다."

 

 

- 권 당선자께서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계기는 무엇 이었는가.

"처음부터 마음을 먹고 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을 뿐이다. 30여 년 전 우리 집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도 학교에 앰프 시설을 지원 해준 적 있는데 그 당시 셋방에 살던 때였다. 이런 식으로 봉사 활동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시 의원에 출마를 권유해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을 뿐이다."

 

-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지난 91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 곤욕을 치렀다고 하는데.

"당시 지역구 위원장이었던 이석현 위원장이 권유했다. 이 위원장은 당시 국회의원은 아니었다. 어쨌든 당시 이석현 위원장이 출마를 권유해 출마를 했는데 봉사 활동 차원에서 동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쌀을 사준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선관위에 후보로 등록한 다음날 새벽, 내가 사전 선거운동을 했다면서 선거법 위반이라며 검찰 수사관들이 집에 찾아와 연행됐다. 그래서 옥중 출마를 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떨어졌다. 억울했다. 평상시에 늘 하던 봉사활동 이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구속 영장도 없이 가두어 놓더라, 그런 후 선거가 끝나자마자 풀어줬다. 바로 재판하고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약 45일 만에 나오게 된 것이다. 당시 억울해서 항소했지만 어림도 없더라. 야당 지지로 출마에 나선 보복성 수사였다. 군사정권이 그만큼이나 무서웠던 것이다."

 

- 첫 당선은 언제였는가.

"3대 때인 지난 98년 지방선거에서 당선 되었다. 그때 부림동에서 출마했었다. 당시 최희준 의원이 권유한 결과였다. 그 후 사는 곳은 관양동 이지만 부림동에 남달리 열정을 쏟았고 이번까지 포함해 총 네 번의 선거에서 부림동 주민 들은 번번이 저를 선택해 주었다."

 

-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에피소드는 없었는가.

"초등학교 5학년 손자 녀석이 저한테 명함을 달라고 하더라. 왜 그런가 의아해 하면서도 몇 장을 줬더니만 그 명함을 가지고 곧 바로 선거운동을 하더라. 바로 자기 친구들한테 제 선거용 명함을 건네 주면서 '너희들 엄마 아빠한테 우리 할아버지 찍어 달라고'하면서 명함을 건네주는 선거운동을 했다고 하더라. 미성년자가 선거운동을 한 것인데 이것이 선거법에 저촉되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하하하. 아주 웃기는 손자 녀석이다. 감사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권혁록, #안양시 의회, #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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